소설리스트

로얄 블러드-193화 (194/226)

18화

“협상을 하자는 거로군.”

“예, 저희처럼 최대한 조건에 맞추겠다는 전언도 함께였습니다.”

“교황청의 입김이 센 나라일 텐데?”

“그 문제도 확실히 해결하겠다더군요. 아마 성공적인 케이스가 속속 나오니, 내부적으로도 말이 많았던 모양입니다.”

블라드 유진의 존재로 변화한 나라는 유럽에만 있지 않았다.

그 이전에 이미 한국과 미국에서 완벽한 확장 사업을 벌인 바가 있었다.

섬에 혈안이 된 현대 사회에서 이탈리아가 사르데냐와 시칠리아에 눈독 들이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북쪽과 동쪽에서는 전선이 계속 후퇴하고 있지 않았던가.

잠깐 뜸을 들인 마크 총리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소식을 들었음에도 그가 별반 반응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독일에서도 접촉을 시도 중입니다.”

체코 전선이 붕괴하면서 독일 또한 상당한 피해를 보고 있었다.

원래는 나라 절반을 차지한 북부의 오염 지대만 신경 쓰면 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동쪽에도 새로운 장벽을 쌓아 올려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어느 쪽이든 한시라도 빨리 해결해야만, 그나마 숨통이 트일 터였다.

“거기서는 뭐라던가.”

“벨기에와 네덜란드를 비롯한 북부의 오염 지대를 우선으로…….”

“프랑스에게 유리한 조건이로군.”

“겨, 결과적으로는 그렇습니다. 하지만 저희가 암중에서 개입한 내용은 절대 아닙니다.”

“독일도 웬만하면 가능성이 큰 쪽에 배팅을 했겠지. 그래야 프랑스에서도 한마디 거들 수 있으니까.”

“…….”

정곡을 찔린 모양인지, 마크 지라르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저 손수건으로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을 닦아 낼 뿐이었다.

오염 지대에서 미궁을 박살 내고 있지만, 유진은 각국의 사정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알고 있었다.

사실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문제였다.

2차 미궁 성장 사건이 발생하자마자, 그는 이 상황을 예견했을 정도니까.

“어디가 더 적극적이던가.”

“독일은 이제 막 운을 뗀 상태입니다.”

“그럼 이탈리아 쪽부터 만나 보는 게 낫겠군. 자리 한번 마련해 봐.”

“예, 알겠습니다.”

마치 부하 직원 다루듯 명령을 내렸지만, 마크 총리는 공손한 태도로 즉각 대답했다.

이탈리아와의 협상 회의는 상당히 전격적으로 이루어졌다.

어지간히도 급했는지, 아직 공략이 한창 진행 중인데도 협상단이 프랑스 서부로 날아올 정도였다.

마기로 가득한 오염 지대 인근까지 말이다.

“총리가……. 바뀌었군요. 그런 이야기는 듣지 못했는데요.”

루시아는 안토니오 알디니를 가리키며 귀엣말을 해왔다.

이탈리아의 총리는 지명제였고, 임기가 짧다는 것이 특징이었다.

1년도 못 채우고 바뀌기도 했으니, 그리 이상할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유럽 각국에서 이 사실을 전혀 모른다는 건 다소 문제가 있었다.

물론 스페인은 EU를 탈퇴해서 그럴지도 몰랐다.

그러나 프랑스 측의 반응을 보면, 이탈리아가 의도적으로 알리지 않은 것 같았다.

협상 회의는 루데악(Loudéac) 인근의 평지에 대충 세워진 막사에서 시작되었다.

“두 섬의 일부 지역뿐만 아니라, 본토의 땅도 조차할 수 있습니다. 물론 국유지나 사들일 수 있는 경우에 한해서요. 하지만…….”

말꼬리를 흐린 안토니오 총리는 루시아를 힐끔거리면서 살짝 불편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스페인에 보상금과 무기 공여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건 됐어.”

“아! 그렇다면, 어떻게든 조차지를 더 마련해 보겠습니다.”

“그것도 됐어. 어차피 조사가 끝나야 조차할지 말지 판명 나는 거거든.”

유진은 조건을 본인에게 이익이 되는 쪽으로 변경하려 했다.

이제 스페인은 안정되었다.

지브롤터 해협의 문제가 남아 있긴 했지만, 그건 자기들끼리 알아서 할 일이었다.

지금까지 확보한 물자와 병력으로도 충분히 방어가 가능할 것이다.

루시아는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나 더 주신다고 하면, 정중하게 거절할 참이었습니다. 과하면 저희로서도 부담이 클 수밖에 없거든요.”

“그거 잘된 일이로군요.”

그녀의 대답에 안토니오 총리의 표정이 풀렸다.

유럽의 힘이 이베리아반도로 치중되는 건 좋은 현상이 아니었다.

난리는 북유럽과 동유럽에서 나는데, 스페인에 힘을 실어 봐야 뭘 하겠는가.

지브롤터 해협을 틀어막고 강짜를 부릴 수도 있으니, 견제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나저나 언제부터 가능하겠습니까? 이제 얼마 남지 않은 거로 아는데요.”

“협상안에 조인하면, 2주 내로 넘어가서 착수하지.”

“저, 정말입니까?”

“그래.”

“알겠습니다. 그럼 곧바로 체결하도록 하시지요.”

안토니오 총리는 밝은 표정으로 협상장을 나설 수 있었다.

* * *

블라드 유진과 이탈리아의 계약 성사는 유럽 전반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날카롭게 대립각을 세우던 이탈리아가 친선을 표명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교황청은 아무런 입장도 내지 않았다.

암묵적으로 그의 미궁 정화 능력을 인정한 것이다.

그러자 눈치만 보던 유럽 국가들이 너도나도 달려들기 시작했다.

그중에는 놀랍게도 독일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가장 강경하게 유진을 규탄하던 세력들이 백기를 들고 항복한 거나 다름없는 현상이었다.

“아니, 언제부터 블라드 유진한테 살갑게 굴었다고 득달같이 달려들어? 적어도 독일은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니냐?”

“당장 급한 불부터 꺼야지. 다 죽어 가는 북유럽은 보이지도 않음?”

“아니, 거긴 이미 다 죽었잖아. 동유럽 전선부터 어떻게 해야 하는 거 아닌가? 벌써 500km나 후퇴했다고. 체코는 지옥이야.”

“우린 나라 잃은 지 10년 넘었어. 이 양심 없는 새끼들아!”

“우리부터 안 해 준다고? 그래. 오늘 당장 전선에서 빠질 거다. 남의 나라 땅을 왜 방어해 줌?”

“그래! 전부 개같이 멸망해 보자.”

유럽 전반의 여론은 불같이 들끓었다.

어찌어찌 버티던 전선이 극단적으로 후퇴하며 벌어진 현상이었다.

벌써 체코, 슬로바키아, 헝가리,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까지 수도 없는 나라가 거꾸러졌으니까.

게다가 동유럽, 북유럽의 수많은 난민이 전선 인근으로 몰려든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난민들은 동쪽으로 계속 이동하려 했다.

전선 인근에 남아 있어 봐야 독일이나 이탈리아에 좋은 일이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분위기가 영 좋지 않네요. 프랑스 측에서도 난민 수용을 적극적으로 검토하는 중이랍니다.”

전화 한 통을 받은 루시아는 태블릿 PC로 온, 오프라인 상황을 쭉 보여 주었다.

전선은 갈수록 중앙 유럽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게다가 성난 군중의 유입으로 독일과 이탈리아는 몸살을 앓는 중이었다.

어쩌면 블라드 유진의 영지를 보전해야 할 프랑스마저 전선과 맞닿게 될지도 몰랐다.

“전선이 늘어나면 지키지 못할 수준인가?”

“아마 프랑스 혼자서는 힘들 겁니다. 남부 쪽을 지킬 여력이 없거든요.”

“스페인에서 지원해 준다 해도?”

“저희는 지브롤터를 지키는 것만으로도 벅찬 상태라…….”

갓 정상 궤도에 오른 스페인이 뭔가를 더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제 막 나라를 되찾은 포르투갈도 마찬가지고 말이다.

“전선이 어떻게 고착화하느냐가 문제로군.”

“EU는 이렇게 예상하는 모양입니다.”

루시아는 화면을 넘겨서 지도를 보여 주었다.

이탈리아 북부와 독일 동부가 완전히 날아간 전선의 형태.

확실히 체코부터 시작해서 슬로바키아와 헝가리를 거치는 전선보다는 훨씬 방어 범위가 좁았다.

분화된 대성체 미궁이 최대한 멀리 날아간다 해도 단번에 알프스를 넘기는 힘들 테니까.

“알아서 하라고 해. 우린 주어진 일만 하자고.”

“네.”

유진은 손을 휘저어 태블릿 PC를 물리고는 그대로 발길을 돌렸다.

루시아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웃으며 뒤를 따랐다.

이제껏 그가 인간들의 여론을 신경 쓴 적이나 있었던가.

전선이 후퇴하든 말든 이득만 취하면 그만이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군.”

블라드 유진은 프랑스 서쪽 끝의 도시, 브레스트를 바라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가 파악하기로 내륙에 있는 미궁은 딱 저 인근뿐이었다.

루시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위성 지도를 켜 보았다.

확실히 프랑스 서부의 오염 지대는 브레스트와 생르낭(Saint―Renan)이 마지막이었다.

“섬이 몇 개 남아 있긴 하지만, 언급이 전혀 없었습니다.”

섬을 정화해 준다면, 프랑스로서는 상당한 이득이었다.

하지만 아무런 대가도 없이 그곳들을 정화해 달라고 할 수는 없을 터였다.

게다가 그렇게 면적이 넓은 섬도 아니니, 당장은 관심을 두지 않는 듯했다.

프랑스는 코앞에 닥친 내부 문제로도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으니까.

“얼른 처리하고 사르데냐로 넘어가지.”

“이번에는 저도 함께 가는 건가요?”

“스페인만 괜찮다면, 원하는 대로 해.”

“네.”

루시아는 밝은 얼굴로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스페인은 반석 위에 제대로 오른 상태였다.

하비에르 대통령이 미친 짓만 하지 않는다면, 충분히 국가를 잘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 마음 놓고 유진을 따라다닐 생각에 루시아는 연신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나저나 올 때가 되었는데.”

“누가요?”

“가을걷이하러 간 놈 말이야.”

“아, 엔세데스 님이요. 지난번에 뭔가를 만든다고 하지 않았나요?”

“이 정도 시간이면, 이미 다 끝나고도 남았을 테지.”

한데, 문득 남쪽을 바라보니 비스케이만을 가로질러 올라오는 어떤 비행체가 보였다.

강력한 에너지를 마구 뿜어내는 존재감만 봐도 누군지 단번에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바로 이베리아반도의 영지를 돌러 내려갔던 엔세데스였다.

“한국 속담과 너무 딱 들어맞아서 소름이 돋는군.”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는 거요?”

“그래. 이제 속담 내용을 호랑이에서 용으로 바꿔야겠지만.”

쉬이이이익!

루시아와 사담을 나누고 있는데, 날아오던 물체가 빠르게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사실 눈으로 좇기도 힘들 정도로 엄청난 속도치고 파공성은 거의 없었다.

이윽고 엔세데스는 붉은 머리칼을 휘날리며 지면에 내려섰다.

유진은 화룡왕을 만나자마자 질문을 던졌다.

“마법진은 만들었나?”

“오랜만에 보는데, 질문할 게 그런 거밖에 없어?”

“당연하지. 아까운 영기를 자네 멋대로 소모하잖아.”

“크, 크흠!”

엔세데스는 괜히 크게 헛기침하며 딴청을 부렸다.

반응을 보니, 예상대로 영기를 어마어마하게 소모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얼마나 쓴 거지?”

“전부 다 썼어. 그러고도 마법진은 소형으로 만들 수밖에 없었지. 재료가 워낙 부족해서 말이야.”

“성능은 어떤데?”

“많이 별로긴 해. 그래도 타개책이 없지는 않지. 꽤 준수하게 마나를 뽑아낼 방법을 찾았어.”

“호오?”

화룡왕은 항상 대형 마나 집적 마법진을 만들고 싶어 했다.

언제든 주변 환경을 마법 시전에 적합하게 만들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소형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어떤 방법인지 궁금하군.”

“이게 말이야. 에너지 코어를 소모해서 마나를 발생시키는 마법진인데…….”

엔세데스는 신이 나서 설명을 이어 갔다.

하지만 이야기를 듣고 있던 유진과 루시아의 표정은 점점 굳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10분 작동시키는데 뭐가 들어간다고?”

“응. S급 에너지 코어. 시험적으로 넣어 보니까 깔끔하게 붕괴하더라고. SS급은 20분이야.”

“…….”

작동이 잘 되는지를 떠나서 에너지 효율 하나만큼은 극악인 게 확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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