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교, 교황 성하?”
“어찌 이런 짓을……!”
놀랍게도 퀴리날레 궁에 침입한 인물은 안드레아였다.
교황은 항상 정갈한 수단을 입고, 백색 주케토를 쓰고 다녔다.
하지만 오늘은 은빛 갑옷에 큼지막한 지팡이까지 든 모습이었다.
마치 성기사들이나 입을 법한 복장이었다.
게다가 느릿느릿하던 평소와는 달리, 걸음걸이에 힘이 넘쳤다.
쿵!
지팡이로 바닥을 강하게 찍은 안드레아는 대통령 집무실로 들어오며 좌중을 둘러보았다.
“그렇게 경고했는데, 아직도 그자와 결탁할 작정이라니. 쯧쯧! 실망스럽기 그지없소.”
“그건…….”
교황청에서 힐러 지원을 줄였으니, 당연한 거 아니냐는 말이 턱 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결국에 죠반니 라타치의 입은 열리지 못했다.
바티칸이 아니었다면, 이탈리아는 유럽 최강국의 지위를 유지할 수 없었을 테니까.
앞으로도 달콤한 과실을 취하려면, 교황청에 반하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되었다.
물밑에서는 뒷공작을 획책하더라도 말이다.
“저는 끝까지 이자들의 만행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문득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껏 입을 꾹 다문 채 버티던 세르조 몬타리오 대통령의 한마디였다.
그러자 이탈리아를 이끄는 정치인들의 얼굴이 새하얗게 탈색되었다.
아무리 바티칸 시국의 위세가 대단하다고 해도 이건 너무한 처사였으니까.
“대통령은 자존심도 없소?”
죠반니 총리가 불같이 화를 내며 호통을 쳤지만, 세르조는 뭐가 문제냐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대통령의 놀라운 반응에 안드레아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 그대는 믿을 만하군.”
“별말씀을요.”
“이자들은 우리 측에서 거두어 가겠소. 내각을 새로 구성할 준비부터 하시오.”
“예.”
교황의 명령에 세르조 대통령은 살짝 고개를 숙이더니, 그대로 집무실을 나가 버렸다.
이곳에 남은 정치인들은 황급히 구조 요청을 하려 했다.
하지만 그들의 휴대 전화가 허공에 둥둥 뜨더니, 안드레아의 뒤편으로 날아가는 게 아닌가.
“저, 저런!”
깜짝 놀란 죠반니가 잽싸게 몸을 던졌다.
어떻게든 휴대 전화를 낚아채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총리의 비대한 몸은 곧이어 들어온 금발 벽안의 남자에 의해 간단히 막혔다.
성스러운 제의를 입은 남자는 한 손으로 죠반니를 패대기쳐 버렸다.
콰앙!
“…….”
이탈리아 정치인들은 그저 공포에 떨 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압도적인 힘을 코앞에서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단 한 명의 헌터도 없는데, 대체 무슨 수로 이 상황을 타개한단 말인가.
이윽고 그들은 교황이 데려온 성자들에 의해서 줄줄이 압송되고 말았다.
“조금만 기다려라, 블라드 유진. 내 친히 네놈의 목을 치러 갈 테니.”
안드레아는 퀴리날레 궁 밖의 전경을 노려보며 으르렁거렸다.
어느새 교황의 눈빛은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 * *
이탈리아의 주요 정치인들이 속속 자취를 감춘 이후, 세르조 대통령은 내각 재구성에 들어갔다.
한편, 블라드 유진은 프랑스 서부 진공 작전에 착수한 상태였다.
2차 미궁 성장 사건으로 인해 상당한 진통이 예상되었다.
각국의 전선이 돌파되면서 전 세계가 몸살을 앓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에게는 별다른 해당 사항이 없는 이야기였다.
아니,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5레벨이라……. 나름 괜찮은 성과로군.”
어느새 유진의 레벨은 2,005가 되어 있었다.
이게 다 2차 미궁 성장 사건 덕분이었다.
그런데 홀로그램을 흡족하게 바라보던 그의 근처를 누군가가 얼쩡거리며 돌아다녔다.
문득 고개를 돌린 블라드 유진은 엔세데스와 눈이 딱 마주쳤다.
화룡왕은 괜히 아무것도 아닌 척, 자연스럽게 말을 붙였다.
“슬슬 작업에 착수해도 되겠어.”
“무슨 작업?”
“아, 그 왜 있잖아. 마나 집적 마법진.”
“사르데냐섬은 다 정화하지도 않았는데, 네가 원하는 것만 쏙쏙 빼 가겠다?”
“에헤이! 그래도 내가 프랑스에 와서 열심히 했는데.”
실제로 엔세데스는 공략 속도 증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프랑스의 헌터들이 잘 싸울 수 있도록 강화 마법을 건다든지, 장벽 건설이 쉽도록 땅을 파기도 했다.
직접 전투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보조적 역할 수행을 충실하게 한 것이다.
솔직히 그건 유진도 인정하고 있는 부분이었다.
어차피 당장은 새로운 아이템이 필요한 것도 아니었으니, 그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마법진인지 뭔지, 어디 한번 만들어 보라고.”
“흐흐! 그럼 당분간은 못 볼 거야. 공략은 알아서 해. 이제 거의 다 끝났잖아?”
“네가 없어지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별로 신선하지도 않다.”
“오케이! 그럼 수고!”
쉬이이이잉!
비행 마법을 펼친 엔세데스는 곧장 남쪽으로 날아갔다.
영지를 돌면서 모자란 영기를 보충하려는 모양이었다.
신난 화룡왕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블라드 유진은 팔짱을 낀 채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렇다고 영기를 더 쓰라는 말은 아니었는데.”
이미 떠나 버린 엔세데스를 붙잡을 수도 없고,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오늘 유진의 목표는 프랑스 북서부, 아틀랑티크주의 주도 낭트였다.
이제 프랑스 서부 정화 사업은 절반 이상 진행된 상태.
북서쪽으로 쭉 밀고 가기만 하면, 영국 해협까지도 닿을 수 있었다.
프랑스에서 비위를 잘 맞추면, 주변의 섬도 정화해 줄 참이었다.
“슬슬 유럽 쪽은 이제 그만해도 되겠네.”
원래 목적인 스페인의 안정화는 이미 기대 이상으로 완수했다.
굳이 루시아가 헌터들을 이끌지 않아도 알아서 수비할 정도가 된 것이다.
지브롤터 해협을 넘어서 올라오는 미궁 분화만 막으면 될 테니까.
게다가 이제 유럽 연합의 압력도 상당 부분 해소되었고.
“돌아가시려는 건가요?”
“프랑스 정화만 끝내면 그래도 될 것 같네.”
“아쉽네요. 유진 님이랑 단둘이 있어서 좋았는데.”
루시아는 괜히 입맛을 다시며 그의 옆모습을 힐끔 쳐다보았다.
그러자 조용히 사탕만 빨아 먹고 있던 레니가 한마디를 툭 던졌다.
―단둘이 아닌데. 동생 바보넹.
“마, 말이 그렇다는 거죠. 여긴 경쟁자가 없잖아요.”
루시아가 떠올린 건 전시영과 다이애나였다.
항상 블라드 유진의 주변을 얼쩡거리는 그녀들이 없으니, 최근에는 날아갈 듯이 기분이 좋았다.
대놓고 그의 얼굴을 보고 있어도 되고 말이다.
물론 엔세데스와 레니가 이따금 놀려 대긴 했지만.
“설치 완료했습니다. 얼른 들어오시죠.”
그런 와중에 마기 축출 역장을 구축한 림일국이 출입구를 만들며 소리쳤다.
이윽고 프랑스 헌터들은 앞다투어 안으로 들어갔다.
2차 미궁 성장 사태로 인하여 마기가 이전보다 훨씬 강해졌기 때문이었다.
아마 B급 수준으로는 1시간도 버티지 못할 만큼, 숨이 턱턱 막힐 터였다.
그래서 그런지 낭트 근교까지 파견된 헌터들은 죄다 A급이었다.
프랑스 정부에서도 이 사업에 사활을 걸었는지, 영혼까지 끌어모아서 병력을 지원해 준 모양이었다.
“오늘은 여길 마지막으로 하자고.”
“네.”
유진은 루시아와 함께 낭트 남부의 대성체 미궁을 공략하려 했다.
이제 웬만한 미궁은 하나하나가 대규모급에 근접한 상태였다.
워낙 마기가 강하다 보니, 인류의 영토는 급속도로 줄어드는 중이었다.
물론 블라드 유진의 비호를 받는 스페인과 포르투갈, 프랑스는 예외였다.
그런데 미궁의 입구로 향하는 도중, 문득 루시아가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나저나 한국과 미국은 어찌 되었나 궁금하네요.”
“상황이 좋지만은 않을 거야. 아마 한국보다는 미국이 어렵겠지.”
“아무래도 전선이 넓을 테니까요. 이번 일이 끝나면,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실 건가요?”
“아마도. 다이애나와의 계약은 아직 유효하니까.”
“저도 그럼 당분간은 프랑스에 도움을 줘야겠네요.”
“의리를 지키려는 건가.”
“셋방살이를 오래 했잖아요. 이 정도면 거의 전우죠.”
서부만 정리하면 프랑스의 전선은 벨기에와 룩셈부르크 방면뿐이었다.
전선이 25% 이하로 줄어든 셈이니, 기존의 전력으로 충분히 막을 수 있을 터였다.
미궁 성장 사건으로 방어가 어려워졌다고는 해도 그만큼 전력을 집중할 수 있을 테니까.
게다가 루시아도 힘을 보태겠다고 했으니, 후속 조치를 위해서 프랑스에 돌아올 일은 없을 것이다.
두 사람은 한창 분화 중인 낭트 남부의 대성체 미궁으로 들어갔다.
* * *
땅강아지같이 생긴 최종 보스를 박살 낸 유진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루시아는 손발이 잘 맞는 파트너였다.
태구 녀석은 무지성 돌격만 해 대서 되레 그가 맞춰 줘야 하는 판국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적재적소에 깃발 창을 꽂아 넣어 주고, 간간이 탱킹도 완벽하게 해냈다.
덕분에 블라드 유진은 공격 타이밍을 수월하게 가져갈 수 있었다.
“수고했어. 나머지는 후속 병력에 맡기고 돌아가지.”
“네, 고생 많으셨어요.”
“받아.”
그는 최종 보스에게서 나온 에너지 코어를 루시아의 손에 쥐여 주며 무심하게 발길을 돌렸다.
“별로 한 게 없는데, 받아도 되는 건가요? 그리고 이거 SS급이잖아요.”
“어차피 차고 넘치는 게 SS급이야. 복주머니가 다 차서 보관할 곳도 없을 지경이지. 한데, 보상은 왜 그대로인지 모르겠군.”
“확실히 그건 좀 억울하네요. 난도만 높아진 느낌이에요.”
1차 때도 그랬지만, 미궁과 마기가 강해진다고 해서 보상까지 늘어나지는 않았다.
아마 마계에서 지구로 넘어올 때, 몬스터들이 갖고 온 아이템이 그대로 쭉 유지되는 모양이었다.
“고마워요. 잘 쓸게요.”
루시아는 생긋 웃으며 빛나는 보석을 챙겼다.
에너지 코어는 여러모로 쓸모가 많은 물건이었다.
저등급은 헌터들의 레벨을 올리는 데 쓸 수 있고, 고등급은 온갖 산업에 투입되었다.
대표적으로는 발전소와 아이템 제작 등이었다.
새로 건국한 스페인은 정말이지 아무것도 없는 나라라, 에너지 코어 하나조차도 아쉬운 상황이었다.
아마 그녀의 주머니에 들어간 SS급 코어는 산업 발전에 공여될 터였다.
“오셨습니까?”
마기 축출 역장으로 되돌아오자, 언제나처럼 림일국이 나와서 두 사람을 반겼다.
한데, 지금은 뭔가 내부의 분위기가 달랐다.
프랑스 헌터들이 작전을 위해 싹 빠졌으니, 이곳에는 림일국과 레니만 있어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그곳에는 정장을 입은 십수 명의 남자가 서 있었다.
반투명한 막으로 인해 얼굴을 자세히 알아보기는 힘들었다.
유진의 시선을 느낀 림일국은 곧장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마기가 걷히자마자 대뜸 차를 타고 접근하더니, 입장을 요청했습니다. 레니 양의 말로는 프랑스 정치인이라더군요.”
“아직 작업이 끝나려면 멀었는데, 대체 왜 온 거지?”
“일단 들어가 보시죠.”
스윽.
고개를 끄덕인 그는 림일국이 만들어준 출입문을 통해서 역장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살집이 두툼한 백인 남자가 황급히 다가오며 인사를 건넸다.
“반갑습니다. 블라드 유진 님, 총리 마크 지라르라고 합니다.”
이 뚱뚱한 남자는 낯이 익은 듯, 레니는 진심 어린 미간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협상 회담에서 본 기억이 나는 모양이었다.
블라드 유진은 무미건조하게 총리를 훑어보며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마크는 목소리를 낮추며 한 가지 정보를 전달했다.
“이탈리아에서 면담을 요청했습니다. 사르데냐와 시칠리아 때문인 듯한데, 저희의 중재를 원하는 것 같습니다.”
확실히 총리가 놀라서 현장까지 달려올 만한 사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