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얄 블러드-191화 (192/226)

16화

“블라드 유진 님께서 원하는 만큼의 땅을 영구 조차하고, 스페인에 50억 유로를 지불. 그와 동일한 규모의 상기 군수 물자를 제공한다. 맞습니까?”

―응.

“허허…….”

장 뒤르켐 대통령은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협상안을 읽어 보았다.

100억 유로 상당의 금액을 스페인에 공여하는 거야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예전만큼은 아니라고 해도 프랑스는 10조 달러 규모의 국부를 보유한 나라니까.

무려 현재 영토만큼을 되찾게 해 준다는데, 이 정도면 굉장히 저렴한 가격이었다.

하지만 첫 번째 문장이 너무도 눈에 거슬렸다.

“아니, 이건 너무한 거 아닙니까? 원하는 만큼이라면, 서부 지역 전부를 가져갈 수도 있겠네요? 코르시카섬도 마찬가지고요.”

―아마 그러지는 않을 거야.

“그렇다면 조차할 정확한 면적과 지역을 특정해 와야지요. 이렇게 두루뭉술한 조약이 어디 있습니까?”

―그건 안 돼.

“예?”

―영지랑 영기……. 아무튼 주인이 안 된댔어.

설명하기 귀찮았던 레니는 대충 유진의 거부 의사를 표명했다.

그녀의 단호한 대답에 장 뒤르켐은 이마를 짚었다.

힐끔 스페인 측 인사들을 쳐다보았지만, 하비에르 대통령은 딴청만 피우고 있었다.

협상에 관여할 생각이 전혀 없다는 태도였으나, 이 소녀를 응원하는 티가 났다.

아마 속으로는 쾌재를 부르고 있을 것이다.

장 뒤르켐 대통령은 목소리를 낮추며 프랑스어로 중얼거렸다.

“이거 해도 되는 거 맞습니까? 저들이 불순한 마음을 먹으면, 서부를 통째로 빼앗길 수도 있습니다.”

옆자리의 마크 지라르에게 하는 질문이었다.

당연히 마크 총리에게서는 부정적인 의견이 튀어나왔다.

“그게 아니더라도 요지에 알박기를 할 수도 있지요.”

“어찌 되었건 좋은 꼴은 못 보겠네요.”

“어쩔 수 없죠. 그때는 전쟁이라도 불사하는 수밖에요.”

“블라드 유진이 있는 스페인을 상대로요? 유럽 통합군이 어떻게 되었는지 보셨잖습니까?”

“으음! 엄청난 난관이 도사리고 있었군요. 그럼 면적 제한이라도 걸어 보는 게 어떨까요?”

“아아, 그거 좋겠군요.”

빠르게 작당 모의를 마친 장 뒤르켐은 레니를 향해서 영어로 설명을 하려 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다 안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 머릿속으로 말을 걸어왔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터였다.

입으로는 커다란 롤리팝을 할짝거리고 있었으니까.

―최대 면적 제한을 하자는 거지?

“예? 예……. 그, 그렇습니다.”

왠지 작전이 들킨 느낌이라, 장 뒤르켐은 뜨끔한 표정으로 어물어물 말을 이었다.

그러자 레니는 하비에르 대통령과 그 옆에 앉은 사람을 가리켰다.

―쟤네 둘한테 받은 것보다는 많이 가져갈 거야.

영문을 몰라서 멀뚱멀뚱 바라만 보고 있자, 하비에르가 어색하게 웃으며 설명을 덧붙여 주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 조차한 땅을 말씀하시는 걸 겁니다.”

“그게 어느 정돕니까?”

“저희 측 자료를 보시지요.”

하비에르 대통령의 요청으로 화면에는 몇 장의 지도가 띄워졌다.

이베리아반도 곳곳의 지역 정보였는데, 생각보다 광범위하고 꽤 다양했다.

정말 알박기라도 한 것처럼 여기저기에 마구 퍼져 있는 것이다.

“저런 페널티를 감수하고도 정화를 요청한 겁니까?”

“그래도 나름 배려받았습니다. 웬만하면 도시 지역은 빼 주셨거든요.”

“그럼 우리는…….”

“저희보다는 더 가져가시지 않을까요? 방금 협상 전문가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셨고요.”

“허!”

“아마 조사가 필요해서 확답을 못 주시는 것 같습니다. 그때 가서 재협상을 하는 건……. 어려우려나요?”

포르투갈의 페르낭 대통령은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마지막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러자 장 뒤르켐은 기대 가득한 눈으로 레니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다른 사탕을 까서 입에 집어넣기 바빴다.

아무래도 이런 자리에 또 나오는 건 싫은 모양이었다.

“하아…….”

이마를 짚은 장 뒤르켐은 깊은 고심에 잠겼다.

생각보다 출혈이 너무 심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문득 머릿속으로 레니의 심드렁한 목소리가 흘러들어 오는 게 아닌가.

―웃기네. 너희 땅도 아니면서 뭘 고민해?

결국에 장 뒤르켐 대통령은 협상안에 조인할 수밖에 없었다.

* * *

레니가 바르셀로나의 회담장에서 활약하고 있을 무렵, 블라드 유진은 사르데냐 공략에 한창이었다.

섬은 굉장히 귀찮기 그지없는 곳이었다.

미궁 정화 직후에 발생하는 몬스터 웨이브를 막고, 장벽을 구축할 병력 지원을 받기 어렵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그 역할을 할 스페인이 골골대고 있으니, 혼자서 다 하는 수밖에 없었다.

“제주도는 되게 쉬운 축에 속했구나.”

“별로 안 어려우면서 엄살은?”

“좀 돕기나 하고 훈수 두지?”

“커흠! 이 몸은 워낙 바빠서 말이야.”

“이베리아반도 다 돌고 와서 할 것도 없잖아.”

“나 넷플 봐야 해.”

“여기 인터넷 안 터져.”

“커험! 술이 어디 있더라?”

괜히 핀잔 한 마디 던졌다가 미궁 정화에 나설 처지가 되자, 엔세데스는 슬그머니 자리를 떴다.

한국에서야 금방 회복할 수 있을 줄 알고 마나를 펑펑 써 댔지만, 현실을 자각한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마나 집적 마법진을 구축할 때까지는 무리하지 않는 게 좋았다.

유진의 말장난에 휘말려서 다음번 아이템을 먼저 꺼내 주게 되었으니까.

“아아, 마나 집적 마법진은 대체 언제 만드냐?”

“그렇게 고민되면, 그거 먼저 만들어.”

“오! 진짜?”

“대신에 미궁 정화하라고는 안 할 테니까, 몬스터 웨이브나 좀 막아. 저것들 섬에 바글거리기 시작하면, 골치 아파진다.”

“아, 뭐 그 정도야 쉽지. 현신 한 번이면 거뜬해.”

사르데냐섬에는 인간이라곤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시뻘건 드래곤 한 마리가 돌아다니는 걸 본다고 해서 이상하게 생각하지도 않을 터였다.

어차피 몬스터 천지인데, 좀 더 괴물 같은 게 있어 봐야 뭐가 다르겠는가.

그의 허락이 떨어지자, 엔세데스는 신이 나서 현신했다.

쿠구구구구!

화룡왕 본체의 위용은 실로 엄청났다.

마나 소모가 극심해서 날 수는 없지만, 지상에서도 레드 드래곤은 최강이었다.

단순히 육신의 힘만으로도 웬만한 대규모급 최종 보스를 가뿐히 상회했다.

“좀 똑똑한 삼두마룡 정도는 되겠군.”

엔세데스의 활약을 본 솔직한 감상이었다.

물론 트리 페 디타스와는 다르게 생겼지만, 덩치는 비슷한 것 같았다.

화룡왕은 몬스터들의 머리통을 앞발로 후려 까며 정화된 지역을 돌아다녔다.

굳이 장벽을 세우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레드 드래곤의 위엄에 몬스터들이 설설 기었으니까.

그러다 지구에 좀 과하게 관여한다 싶으면, 현신을 풀고 어딘가에 처박혀 술만 퍼마셨다.

‘섬이 제법 넓네.’

사르데냐섬은 대략 2만 4천 제곱킬로미터, 코르시카섬의 세 배에 가까운 면적이었다.

그러다 보니, 이베리아반도를 정화하고 다닐 때와 마찬가지로 품이 꽤 들었다.

그래도 이제 거의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기에, 그는 루시아에게 전화를 걸었다.

슬슬 이탈리아에서도 반응이 올 때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뚜르르르. 달칵.

―아, 유진 님!

“어떻게 됐어?”

―이탈리아 말씀이시죠? 그게 좀 난항이 있었습니다.

“갑자기 왜?”

―바티칸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어요.

“어떻게 나오던가?”

―이탈리아 측을 아예 협상에 참석하지도 못하게 했습니다. 사악한 무리와는 절대로 타협하지 않겠다더군요.

“틀린 말은 아니로군.”

블라드 유진은 마기의 일종인 피의 권능을 다루는 존재.

교황청의 입장에서 스페인은 사악한 수괴와 결탁한 암흑 제국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걸 알기에 저렇듯 예민하게 나오는 것이다.

반면에 이탈리아는 사르데냐와 시칠리아를 거래할 생각이 있는 모양이었다.

단지 교황청의 어마어마한 힘에 짓눌려 아무것도 못 하고 있을 뿐.

아무래도 이 두 섬을 팔아먹으려면, 뭔가 조치가 필요할 것 같았다.

저들이 확신을 가질 만한 결과물이 말이다.

“프랑스 협상은 어떻게 됐지?”

―거긴 잘 됐어요. 레니……. 언니가 활약했다던데요?

“그럼 여긴 그만두고 프랑스 서부부터 공략해야겠군. 코르시카에는 입도하라고 해. 거긴 정리 끝났으니까.”

―네, 알겠습니다.

뚝.

루시아와의 통화를 마친 그는 엔세데스를 찾아서 왔던 길을 돌아갔다.

더 이상 사르데냐섬을 공략하지는 않을 예정이었다.

‘어디 이 꼴을 보고도 가만히 있나 보자.’

절반 이상 원상 복구되었던 영토가 다시 마기에 휩싸인다면, 이탈리아는 조급해질 수밖에 없었다.

아마 지금도 상황을 지켜보며 군침만 흘리고 있을 테니까.

유진이 프랑스 서부를 공략하기 시작하면, 더욱 안달이 날 것이다.

교황청의 경고를 무시하고 협상을 시도할 만큼.

한데, 이탈리아 정부는 생각보다 더 빠르게 접촉해 올 수밖에 없었다.

블라드 유진이 프랑스로 떠난 지 일주일째 되던 날, 2차 미궁 성장 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이로 인하여 중앙 유럽의 체코 전선이 무너지고, 프라하가 함락되었다.

* * *

“벌써 전선이 필라흐까지 내려왔습니다. 이제 우리 영토는 지척이에요!”

이탈리아의 총리 죠반니 라타치의 목소리였다.

체코는 한순간에 쓸려 나갔고, 방비가 잘 되어 있던 오스트리아도 영토의 절반 이상을 잃었다.

그만큼 2차 미궁 성장의 피해는 막심했다.

헝가리와 슬로베니아에서 쏟아져 들어온 물량에 전선은 코앞까지 치달았다.

사르데냐와 시칠리아를 잃은 것 외에 손실이 거의 없었던 이탈리아로서는 공포에 질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세르조 몬타리오 대통령의 입은 굳게 닫혀 있었다.

“당장 그자와 계약해야 합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보십시오. 그들은 미궁 성장이고 뭐고 아무런 피해가 없어요. 근처에 더 이상 오염 지대가 존재치 않으니까!”

물론 죠반니 총리의 말에는 다소 어폐가 있었다.

이베리아반도 또한 모로코에서 북상하는 미궁 분화에 피해를 받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합심하며 지브롤터를 잘 지켜 냈다.

이는 더 이상 다른 곳으로 전력을 분산할 필요가 없어서 그런 거니, 죠반니의 말도 반은 옳았다.

“전선에 별 도움도 안 주는 교황청의 말을 계속 들어야 하는지 의문이구려.”

“바티칸의 성검 또한 전선에서 물러났다고 하던데요.”

상원의장과 대의원 의장 또한 죠반니 라타치의 의견에 힘을 실어 주었다.

블라드 유진의 활약을 놓고 보았을 때, 분명 유의미한 결과가 있을 터였다.

사실 지금도 프랑스 서부 공략은 순조롭게 진행되는 중이었다.

2차 미궁 성장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다는 듯이 말이다.

여러 사람의 의견이 모였으나, 세르조 대통령은 눈을 감아 버렸다.

의견을 수용할 마음이 전혀 없는 것 같았다.

답답함에 지친 총리와 의장들이 답변을 촉구했지만, 세르조의 입은 열리지 않았다.

대신에 퀴리날레 궁의 대통령 집무실 문이 거칠게 열렸다.

콰앙!

문짝을 거의 날려 버리다시피 하고 들어온 인물은 무미건조한 한마디를 툭 던졌다.

“재미있는 광경이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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