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TF1 News. 좋은 저녁 되시고 모두 환영합니다. 이번 주 수요일의 소식은 포르투갈이 고토 회복에 성공했다는 내용입니다. 스페인과 협력한 세계 최고의 헌터 블라드 유진은 포르토와 리스본, 지브롤터 해협을 고작 두 달 만에 수복했습니다. 더불어 코르시카섬 공략에 나설 전망입니다. 포르투갈의 선례로 보았을 때, 프랑스에 판매할 가능성이 매우 큰 것으로…….]
“코르시카섬을 되찾을 수 있다고? 그럼 무조건 들어가야지!”
“좁은 섬인 만큼, 입도가 엄청나게 힘들지 않겠어? 왠지 큰돈을 받고 들일 것 같은데.”
“그렇다고 불안하게 본토에 살 수는 없잖아. 영국을 봐! 섬은 최고의 선택이 될 수도 있어.”
“완벽하게 장악한다면, 방어에 유리하긴 하지.”
“뭘 망설이는 거야? 우리도 당장 블라드 유진과 협력해야지. 낡아 빠진 유럽 연합은 버려야 한다고!”
“그래. 그 자식들 돈만 받아먹지. 전선에 해 준 건 아무것도 없잖아?”
소식을 접한 프랑스인들의 여론은 유진에게 매우 우호적이었다.
남부 전선을 정리하여 방어에 큰 도움을 준 장본인이 바로 그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는 루시아와의 계약을 이행하기 위해 길을 뚫은 것뿐이었지만, 어쨌든 이득은 이득이었다.
게다가 프랑스에서는 유럽 통합군의 패배를 크게 다루지 않았다.
하지만 독일과 이탈리아, 체코 등지에서는 악의적인 보도를 쏟아 냈다.
아무런 관련도 없는 블라드 유진이 유럽 통합군을 기습했다는 뉴스였다.
당연히 궤멸당했다는 내용은 들어 있지 않았다.
그저 그와 스페인, 포르투갈을 싸잡아서 악마화하는 여론전을 펼칠 뿐이었다.
“교황청 소속이면서 체코에는 오지도 않는 거야? 바티칸의 성검께서는 전선을 돌아다니며 큰 도움을 주고 계시는데.”
“교황청의 후광을 등에 업고 하는 짓이 영토 판매라니! 저열하기 짝이 없군.”
“독일과의 계약은 왜 파국으로 치달은 거지? 망해서 나자빠진 스페인보다 우리가 더 많은 걸 줄 수 있는데 말이야.”
“이유는 간단하지. 그자는 그저 나라를 좌지우지하고 싶을 뿐이야. 그래서 폭삭 망한 스페인과 포르투갈에만 이빨을 들이민 거잖아.”
“이게 맞네! 일부러 약소국만 노린 거구먼.”
유진에 관한 악감정이 극에 달했을 무렵, 유럽 연합은 통합군 확대 방안을 내놓았다.
그러자 자원입대하려는 청년들의 수효가 속속 늘어났다.
일각에서는 3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는 것 아니냐며, 우려의 목소리도 있었다.
78%에 달했던 나치 독일의 징집률을 들먹이는 사람까지 나타났다.
물론 대상자의 범위가 다르고 아직은 20대의 45%에 불과했지만, 징집은 계속되는 중이었다.
하지만 우려를 불식하는 의견 또한 마구 쏟아졌다.
“아니, 어차피 우린 전쟁 중 아닌가?”
“미궁 성장 사건으로 젊은이들 왕창 뽑아 갔잖아. 몬스터들이 못 들어오게 막으려면, 높은 징집률은 어쩔 수 없어.”
“그래. 그전에도 30%가 넘었다고.”
“게다가 한국은 이미 98%야. 20대만 대상으로 하고, 기간도 2년에 불과하지만.”
“여긴 유럽인데, 갑자기 한국이 왜 나와?”
“아, 그냥 말이 그렇다고.”
미궁 사태 이후, 각국은 거의 전시 상태에 돌입했다.
몬스터로부터 전선을 지키기 위해선 모병제로는 턱도 없었다.
장벽이 길게 늘어진 나라는 반드시 징병제를 택해야만 했다.
그러다 보니, 의무 복무 기간이 5년이 넘어가는 국가도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곧이어 터진 소식에 유럽 연합은 충격에 휩싸여야 했다.
[속보. 코르시카섬 탈환 성공. 프랑스, 스페인과 협상 중. 블라드 유진, 곧이어 사르데냐와 시칠리아도 공략할 것이라 밝혀.]
놀랍게도 고작 일주일이 지나는 동안, 유진은 코르시카섬을 완전히 장악해 버렸다.
섬에 미궁이 들어서면, 마기가 계속 중첩되어 공략이 매우 어려워졌다.
게다가 지중해의 섬들은 미궁 사태 초기부터 오염 지대가 되어서 온갖 문제를 일으키는 곳이었다.
대표적으로 ‘이주’ 현상이 종종 발생하여 유럽 본토와 아프리카 북부를 노리곤 했다.
그런데 그런 곳이 달랑 일주일만에 함락당했다.
“잠깐만, 이거 잘하면 우리도 섬을 먹을 수 있는 거 아니야? 프랑스가 협상하는 거 보니까, 그렇게 비싸지도 않던데.”
“걔네가 살 수 있을 정도면, 우린 무조건 가능하지.”
“이러면 굳이 블라드 유진을 배척할 필요가 있나? 징집률을 높이고 국방비를 왕창 지출하기보단, 그냥 사는 게 낫지 않아?”
“그러게. 게다가 더 큰 적이 있는데, 왜 같은 사람끼리 싸워야 하는 거지?”
사르데냐섬과 시칠리아섬을 정화한다는 이야기가 나오자, 이탈리아의 민심은 급변하기 시작했다.
솔직히 군대에 가고 싶은 사람이 대체 얼마나 되겠는가.
미궁 사태 이전처럼 연봉을 나름 괜찮게 주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바람은 체코와 독일까지 번져 가고 있었다.
경천동지할 속보가 유럽을 강타하기 2주 전.
유럽 통합군을 박살 낸 블라드 유진은 곧장 지중해 한복판으로 날아갔다.
코르시카는 제주도보다 훨씬 오래된 미궁의 섬이었다.
그곳엔 중첩된 마기로 인해 그야말로 지옥과도 같은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어둠의 군주인 그조차도 살짝 부담스러울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공략 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아무리 강해 봤자 일반적인 몬스터에 불과했으니까.
물론 시간은 다른 지역보다 배로 오래 걸렸다.
도저히 발 디딜 틈도 없이 몬스터가 빽빽하게 들어차 있어서 전투가 잦았기 때문이었다.
“어쩔 수 없이 한 놈을 건드리면, 사방천지에서 마구 몰려드네. 무슨 좀비 영화를 보는 줄 알았어.”
“그런 것도 보나? 드래곤 입장에서는 별로 재미없을 것 같은데. 어차피 손톱으로 꾹 누르기만 해도 다 죽는 놈들 아닌가.”
“당연히 다른 관점에서 봐야지. 주인공이 죄다 인간인데.”
코르시카섬을 평정한 직후 엔세데스가 낸 감상은 꽤 신선했다.
유진을 따라서 인간들의 콘텐츠를 몇 개 즐기더니, 최근에는 아예 푹 빠져서 살고 있었다.
엘칸 차원의 시대에 뒤떨어진 작품들보다 훨씬 낫다는 평을 내릴 정도였다.
이제 이 녀석도 지구의 현대 생활에 완전히 적응한 모양이었다.
“여긴 슬슬 협상에 들어가도 되겠어. 이제 사르데냐를 노릴 차례로군.”
“저긴 되게 심상치 않아 보이는데?”
“여기보다 마기가 더 강해. 오래되기도 했고, 아마 면적이 더 넓어서 그럴 거야.”
사르데냐섬과 시칠리아섬은 코르시카보다 훨씬 심각한 상태였다.
혼자서 저곳을 공략하는 건 매우 귀찮은 일이었다.
지금은 그를 도와줄 레니와 스페인 헌터들이 없고, 애물단지인 엔세데스만 함께하고 있었으니까.
화룡왕 본신의 능력이 강하면 뭐 하겠는가, 불이 나지 않는 세상의 소화기처럼 쓰지도 못하는데.
“그나저나 레니는 왜 안 데리고 온 거야?”
“시킬 일이 있어서 보냈어.”
“몬스터 암살하는 것 말고, 뭐 또 다른 일을 한다고?”
“응.”
“뭔데 그게?”
“의외로 걔가 말이 잘 안 통하거든.”
“엥?”
“나중에 두고 보면 알아.”
순진무구한 레니의 얼굴을 떠올린 엔세데스는 고개를 갸우뚱하고 말았다.
드래곤의 뛰어난 두뇌로 아무리 생각해 봐도 블라드 유진이 뭘 시켰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으니까.
화룡왕은 그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질문 세례를 퍼부었다.
“아, 궁금하게 해 놓고 도망가는 게 어디 있냐?”
“알고 싶어? 그럼 아이템 하나 내놔.”
“스페인 와서는 영기 추출 한 번 제대로 못 했는데, 무슨 아이템을 내놔?”
“그럼 다음 아이템은 마나 집적 마법진 말고, 내 거로 하는 거 어때?”
“아……. 이 사악한 뱀파이어 자식!”
지구의 희박한 마나는 엔세데스의 활동에 제약을 걸었다.
물론 드래곤이 마나 좀 부족하다고 약해지는 건 아니었다.
심장에서 고농도의 마나를 얼마든지 뽑아낼 수 있으니까.
하지만 마법을 시전하는 데 있어서 마나 농도는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주변 마나 농도가 낮으면 시전 속도와 발현 확률도 덩달아 뚝뚝 떨어져 내렸다.
그런 현상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마나 집적 마법진이 꼭 필요했다.
웬만하면 고성능으로 말이다.
“내 사정 알면서 이러기야?”
“쓸 데도 없잖아. 어차피 만날 술만 퍼마시면서.”
“술 마실 돈 벌려고 그런다. 왜!”
“이미 수백 년 동안 마셔도 남을 만큼 벌지 않았나?”
“드래곤한테 수백 년은 그냥 며칠 지나는 것하고 별반 다름없는데? 너도 비슷하잖아.”
“좋아. 그럼 말 안 해 줌.”
“와! 인성 보소.”
“인간 아니니까 인성 따지지 마라.”
“……오케이. 그럼 다음번 아이템 먼저 제공할게. 걔가 할 일이라는 게 뭔데?”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한 엔세데스는 백기를 들고 말았다.
그러자 블라드 유진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협상.”
당연히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던 화룡왕은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게 무슨 개뼈다귀 같은 소리야?”
* * *
프랑스의 대통령 장 뒤르켐은 반가운 얼굴을 만나게 되었다.
임시 정부 때부터 알고 지냈던 하비에르의 초청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마 그냥 만나자고 했어도 한달음에 달려왔을 테지만, 오늘은 더욱 큰 안건이 있었다.
바로 블라드 유진이 확보한 코르시카섬을 매물로 내놓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프랑스 서부의 영토 확장 또한 도마 위에 오른 상태였다.
바르셀로나의 회담장에서 만난 두 국가의 정상은 반갑게 악수를 한 뒤, 자리에 앉았다.
“오랜만입니다.”
“전우의 얼굴은 언제 봐도 반갑군요. 예전에는 그래도 자주 만났는데, 아쉽습니다.”
“최근 스페인이 워낙 바쁘잖습니까? 나라를 바닥부터 다시 세워야 하는 상황이니 이해합니다. 큰 도움을 못 드려서 죄송할 따름이지요.”
“프랑스의 도움은 셋방살이를 할 때부터 많이 받았습니다. 괘념치 마십시오.”
끈끈한 관계인 만큼 겉치레 인사도 굉장히 따스했다.
영토 판매 안건에서도 훈훈한 분위기는 쭉 이어질 것 같았다.
워낙 전격적으로 이루어진 정상 회담이라, 실무진의 물밑 협상은 전혀 없었다.
오늘은 대통령끼리의 담판으로 모든 게 결정될 예정이었다.
그런데 문득 장 뒤르켐의 눈에 이질적인 존재가 눈에 들어왔다.
맞은 편에 앉아 사탕을 오물거리고 있는 흑발의 소녀였다.
오밀조밀한 이목구비와 깊은 눈동자, 새하얗고 깨끗한 피부는 전형적인 아름다움을 자아냈다.
하지만 너무 앳되어서 그런지 여자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장 뒤르켐 대통령은 하비에르를 향해서 질문을 던졌다.
“한데, 저분은 누구십니까?”
“아! 소개가 늦었군요. 저희 스페인 측의 협상 전문가십니다. 오늘의 논의는 모두 이분을 통해서 이루어질 겁니다.”
“예에??”
눈을 휘둥그레 뜬 장 뒤르켐은 하마터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뻔했다.
저런 소녀를 대리인으로 내세운 하비에르 대통령의 저의가 의심스러웠다.
자칫 잘못하면 이는 프랑스 대통령을 모욕하는 행위로 비추어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곧바로 이어진 하비에르 마틴 사파테로의 말에 장 뒤르켐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블라드 유진 님의 명령입니다.”
“아…….”
역시 유진의 이름엔 어딜 가나 잘 먹히는 강력한 힘이 존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