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땅을 제값에 잘 팔아먹기 위해서는 유럽 연합의 개입을 차단할 필요성이 있었다.
이쪽의 힘이 통합군 못지않게 강하다는 걸 보여 줘야 협상이 가능할 테니까.
포르투갈 자본이 스페인으로 흘러 들어오는 걸 막지 못하도록 말이다.
그래야 차후에 지중해의 섬과 프랑스 서부, 벨기에, 네덜란드 등을 먹었을 때도 판매가 수월할 터.
유럽 통합군을 박살 낼 이유는 충분했다.
물론 루시아가 동의하지 않더라도 블라드 유진은 이 일을 추진했겠지만.
“내 역할은 여기까지다. 지금부터는 완전히 손 뗄 거야.”
엔세데스는 어깨를 으쓱이며 자신은 아무 관련 없다는 듯, 딴청을 부렸다.
마계와의 싸움뿐만 아니라, 인간들의 전쟁에 가담하는 것도 화룡왕에게는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다른 차원에 너무 많은 영향력을 발휘하면, 드래곤 로드에 의해 유희가 끝나 버릴지도 모르니까.
그래서 살짝 꼼수를 썼다.
엔세데스가 사전 준비를 해 놓으면, 방아쇠를 당기는 것만 블라드 유진이 하는 거였다.
“이 정도면 충분해.”
그는 벼랑 끝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는 길쭉한 바위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제 유럽 통합군이 들어오는 타이밍에 맞춰서 떨어뜨리기만 하면 끝이었다.
“잘 찍고 있나?”
“네, 물론이죠.”
유진은 그저 상대를 박살 내는 거로 끝내지 않고, 영상물까지 제작하려 했다.
자신의 위용을 과시하고 유럽 연합에 경고하기 위함이었다.
카메라는 놀랍게도 루시아가 잡고 있었다.
“때가 되었군.”
절벽에서 뒤로 조금 물러난 그는 일부러 카메라 렌즈를 잠깐 응시했다.
이 모든 게 철저한 계획하에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은연중에 드러낸 것이다.
그러고는 길쭉한 바위를 향해 달려가며 서서히 속도를 올렸다.
거의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 빠르게 쇄도할 수 있지만, 일부러 느릿하게 움직였다.
일반인들도 다 볼 수 있게 말이다.
타다닷! 콰우우우―!
허공에서 몸을 돌리며 발차기를 날리자, 블라드 유진의 다리에 새하얀 후폭풍이 일었다.
삽시간에 음속을 돌파하면서 소닉 붐이 발생한 것이다.
곧이어 그의 발이 바위의 상단부에 작렬하자, 폭탄이 터진 듯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콰아아앙! 쿠궁! 쿠구구구!
벼랑 아래로 떨어진 바위는 그 밑에 설치된 구조물과 부딪치며 연쇄 반응을 일으켰다.
엔세데스가 해 둔 사전 준비가 바로 저런 것들이었다.
툭 건드리면 와르르 무너지도록 무게 균형을 맞춘 암석 더미가 이 산에만 수백 군데가 있었다.
게다가 하나하나 도미노처럼 넘어지게 치밀한 계산까지 해 두었다.
“와우!”
―주인, 머싯다.
일행은 엄청난 산사태가 일어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는 중이었다.
림일국과 레니는 양팔을 번쩍 든 채로 환호성을 내질렀다.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의 산사태를 내려다보자, 형언할 수 없는 통쾌함이 몰려왔기 때문이었다.
물론 저 엄청난 물리력에 직접 당하는 사람은 죽을 맛이겠지만.
아니, 실제로 무수히 많은 사람이 죽을 터였다.
스페인을 향해서 본격적으로 진군을 개시한 유럽 통합군이 말이다.
‘저들은 그저 선봉, 유럽 통합군의 주력은 따로 있다.’
현대전을 그저 일반 보병의 소총 싸움으로 볼 수 없듯이 적군의 주력은 고작 저뿐만이 아닐 터였다.
“가자. 녹턴.”
“푸르르! 푸르르!”
전운을 감지한 모양인지, 녹턴은 크게 투레질하며 유진의 곁으로 다가왔다.
이번에는 그 혼자만 타고 가는 게 아니었다.
―나 준비됐어.
“좋아. 떨어지지 않게 조심해.”
―레니는 가벼워서 잘 붙어 다녀.
“그래.”
유령 군마의 화염 꼬리에 암청색 기운을 연결한 레니는 양팔을 쫙 펼쳤다.
그러자 마치 날다람쥐 같은 피막이 팔과 다리 사이에 생겼다.
그녀가 공중전을 펼칠 수 있도록 특별히 제작한 윙슈트(Wingsuit)였다.
물론 기류를 타는 건 아니고, 녹턴과 연결하여 수상 스키처럼 끌고 다니는 방식이었다.
두두두두두!
유령 군마가 질주하자, 레니는 허공에 붕 떠서 날아가기 시작했다.
마치 연과 같은 모양새였다.
이윽고 녹턴과 그녀의 거리는 수 킬로미터까지 멀어졌다.
레니의 무기인 델레오 아르마는 형태를 마음껏 변형할 수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온다.”
―웅!
촤르르르륵!
블라드 유진의 명령과 함께 그녀는 암청색 기운을 수십 가닥으로 나누어 공중에 쫙 펼쳤다.
그러자 거대한 그물이 번쩍이며 튀어나왔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쉬이이익! 퍼버버버벙!
마침 스페인 영공으로 침투하던 기체들이 거대한 그물에 걸려들며 연쇄 폭발을 일으켰다.
다쏘 FCAS, 유로파이터 타이푼, F―35B 등 여기저기에서 긁어모은 제트 전투기와 폭격기였다.
요즘 같은 시대에 이런 항공 전력을 갖추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사실 이런 현대 무기는 미궁이나 마기 속에 숨은 몬스터에게 별반 소용이 없었다.
놈들이 안전지대로 나오기라도 하면 모를까, 들고 있어 봐야 괜히 유지비만 나오는 애물단지였다.
차라리 현대 무기를 정리하고, 헌터를 키우는 게 전선에는 훨씬 나은 영향을 미쳤다.
그럼에도 유럽 연합은 십여 대의 중(重) 폭격기를 보내왔다.
아마 계속 줄여 오다가 그냥 없애 버리기에는 아까워서 놔둔 기체들인 모양이었다.
이런 식으로 쓸 날이 오기도 하니까.
“또 온다. 모조리 집어삼켜.”
―불나방 잡는 날다람쥐 나가신당!
콰과과과광!
레니가 델레오 아르마의 간격을 좁혔다가 다시금 펼치자, 유럽 통합군의 항공기들이 걸려들었다.
이는 유진의 암흑화, 녹턴과 레니의 은신술 덕분에 일어난 대참사였다.
레이더는 물론이고 육안으로도 보이지 않으니, 피할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게다가 유령 군마는 소리도 없이 마하 5 이상의 극초음속으로 날아다녔다.
그러고도 뭔가 무리한다는 느낌은 전혀 없었다.
공기 저항 따윈 받지 않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으니까.
수 제곱킬로미터나 되는 엄청난 넓이의 그물을 펼쳐 놓은 레니 또한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그야말로 천외천의 괴물들이 펼치는 공중 투망 대작전이었다.
“확실히 혼자 돌아다니면서 제거하는 것보다는 훨씬 낫네. 일망타진도 되고.”
이로써 유유히 편대 비행을 하던 유럽 통합군의 항공 전력은 대부분이 멸절되었다.
전 세계적인 경제난이 펼쳐진 상태에서 이보다 더 큰 항공 전력을 보유한 국가는 몇 없을 터였다.
미국이나 러시아, 중국도 비슷한 상황이었으니까.
아마 유진의 포르투갈 판매에 관해서 딴지를 거는 목소리는 쏙 들어갈 것이다.
헌터를 현대 무기로 제압할 수 있다는 상식이 완벽하게 박살 나는 순간이었다.
“슬슬 내려가자.”
―재밌는데, 나방 더 없어?
“이제 더는 안 올 모양이네.”
블라드 유진의 감각은 수십 킬로미터 밖의 상황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예리했다.
물론 장거리 탐지는 공중일 때만 가능한 일이었다.
중간에 물체가 많으면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으니까.
어쨌거나 감지 범위 내에 항공기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델레오 아르마를 끌어당겨 레니를 앞에 앉힌 그는 녹턴의 고도를 서서히 낮추었다.
이윽고 유진은 무지막지한 두께의 토사와 바위 더미에 깔린 도시를 살폈다.
무혈입성했던 유럽 통합군은 거의 궤멸한 상태였다.
푸이그세르다의 전경은 마치 폼페이 최후의 날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화산이 아니라 산사태였지만, 지옥과도 같은 아비규환임은 똑같았다.
“레니, 이거 들어.”
―웅. 나 이제 이런 거 잘 만져.
“잘 찍어야 한다.”
―잉.
휴대 전화를 건네자, 레니는 망설임 없이 동영상을 촬영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찍는 건 박살 난 탱크와 돌덩이에 깔려 신음하는 병사들이었다.
인간들이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며 구원 요청을 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발걸음을 옮겼다.
블라드 유진은 초토화된 잔해 속에서 웬 중년 남성을 끄집어냈다.
“으아악! 끄악!”
육중한 무언가에 끼어 있던 다리가 찢어지자, 그놈은 괴성에 가까운 비명을 질렀다.
어지간히도 고통스러운 모양이었다.
“인상착의 확실하군.”
그가 붙잡은 건 유럽 통합군 최고 사령관 귄터 크루거였다.
스이잉! 푸확!
소수혈인을 꺼내 쥔 유진은 사령관의 목을 단번에 끊어 버렸다.
그러고는 카메라를 향해 돌아서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다음번 목표는 전선이 될 것이다. 멸망하고 싶다면, 또 보내 봐.”
군침을 흘리는 하이에나들을 향한 경고였다.
어떻게든 한 입 먹어 보려는 수작을 멈추지 않으면, 각국의 전선을 박살 내 버릴 작정이었다.
그럼 몬스터 웨이브에 국토가 초토화하는 건 시간문제였으니까.
이런 결과가 나올 줄은 아무도 예상치 못했을 테니, 오늘을 기점으로 유럽 연합은 분열하기 시작할 터였다.
“구호 활동은 허락하지.”
마지막 한 마디를 끝낸 그는 손짓으로 동영상 촬영을 끊었다.
그러고는 레니에게 스마트폰을 받아서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하비에르, 여기 와서 장비 챙겨. 네가 원하던 게 다 있군.”
푸이그세르다는 명백히 스페인의 영토였다.
남의 나라에 와서 군수 물자를 넘겨주고 알아서 죽어 주는 고마운 존재가 있다니.
참으로 감읍할 따름이었다.
아마 하비에르 대통령은 신난 표정으로 수송대를 보낼 터였다.
이제 블라드 유진이 해 줄 수 있는 건 모두 끝났다.
앞으로 국제 분쟁은 스페인이 알아서 하고, 그는 미궁 정화에 집중할 요량이었다.
“가자.”
―나 사탕 먹을래.
“루시아가 갖고 있어. 동생한테 가서 받아.”
―웅.
레니를 앞에 태운 유진은 곧장 안도라 공국을 향해서 녹턴을 몰기 시작했다.
* * *
통합군이 궤멸당하는 영상이 올라오자, 유럽 연합은 재차 긴급 정상 회의를 개최했다.
독일에서 모인 각국의 정상은 표정이 매우 좋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서 결과를 받아들이기가 너무도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아니, 대체 뭘 어떻게 싸웠길래 시작도 못 해 보고 다 죽었단 말입니까?”
베른트 폰 마이어 총리는 목에 핏대까지 세워 가며 소리를 질러 댔다.
그러자 반대편에 앉아 있던 프랑스 대통령 장 뒤르켐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답했다.
“그야 독일에서 잘 아시지 않소? 목 잘린 최고 사령관도 독일 사람이고, 통합군은 거의 그쪽에서 다 제어하셨던데요.”
“지금 우리끼리 분열을 일으키자는 겁니까? 이게 독일만의 책임인가요? 지중해에서 SLBM이라도 발사하고 하는 말입니까?”
당연히 흥분해 있던 베른트 총리는 불같이 화를 내며 반박했다.
함대지 탄도 미사일을 쏜다고 해서 블라드 유진을 끝장낼 수 있다는 보장은 없었다.
게다가 그렇게까지 자극할 이유도 전혀 찾지 못했다.
프랑스는 영국과 마찬가지로 그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으니까.
장 뒤르켐 대통령은 지금이라도 이 허울뿐인 유럽 연합을 탈퇴하고, 스페인처럼 행동하고 싶었다.
단지 국경선을 맞댄 독일과 이탈리아의 눈치가 보여서 그러지 못했을 뿐.
만약 반기를 든다면 저 아귀 집단들은 언제든 프랑스의 뒤통수를 칠 터였다.
“자자, 회의가 너무 과열된 것 같습니다. 이성을 되찾고, 타개책을 모색해 봅시다.”
“크흠!”
이탈리아의 세르조 몬타리오 대통령이 중재하자, 베른트는 헛기침을 하며 자리에 앉았다.
“…….”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뾰족한 수를 제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허무하게 잃은 전력은 유럽 통합군의 60%에 달했고, 스페인 육군은 순식간에 재무장을 마친 상태였으니까.
게다가 포르투갈 자본 또한 순조롭게 넘어가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간 EU의 입지가 크게 흔들리고, 유럽 전체를 블라드 유진이 좌지우지하게 될 터였다.
이제 전선 유지와 고토 회복과 관련된 희망 고문으로, 분담금을 받아 내는 건 불가능할 공산이 컸다.
그가 오염 지대를 정화해서 팔기 시작하면, 유럽 연합에 돈을 부을 이유가 없을 테니.
그런데 침묵만이 감돌던 회의장에 일단의 무리가 우르르 들어왔다.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던 수행원들이었다.
그들은 들어오자마자 똑같은 내용을 각국 정상에게 전달했다.
“블라드 유진이……. 새로운 발표를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