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뱀파이어 무리의 리더는 쿠르단이라는 녀석이었다.
작위를 받은 마족은 아니지만, 최상급 중에서도 나름대로 실력이 있는 자였다.
따지자면 갓 SS급에 오른 수준이라고 할 수 있었다.
S급의 끝자락에 있는 전시영과 루시아, 다이애나 등보다는 좀 더 강했으니까.
물론 마계와 비슷한 환경이어야 한다는 조건이 붙었지만.
‘결속력이 높아서 다행이로군.’
서른 명에 달하는 뱀파이어들은 쿠르단이 꽉 휘어잡은 상태였다.
덕분에 굳이 여러 명을 하수인으로 만들 필요는 없었다.
주요 인물들에게만 혈성쇄혼술을 걸어 놓고, 나머지는 자율 통제에 맡기는 게 가능했다.
전대 뱀파이어 로드들이 그랬던 것처럼 피라미드식 조직을 구축하는 것이다.
복종의 맹세를 받은 블라드 유진은 곧장 쿠르단에게 혈성쇄혼술을 걸었다.
현재 하수인 슬롯은 스물두 명까지 찬 상태였다.
스킬 정보창을 보고 있자니 문득 DK의 얼굴이 떠올랐다.
녀석을 잃지 않았다면 23이 되어야 정상일 테니까.
‘미궁 성장을 일으킨 주범을 찾으려면, 속도를 높이는 게 좋겠어.’
그는 DK의 실종이 최근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직감적으로 꿰뚫고 있었다.
문득 궁금한 것이 생긴 유진은 쿠르단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마기가 없는 곳에서도 활동 가능한가?”
“그러려면 야간에만 움직여야 합니다. 아직 항성풍 면역이 생기지 않은 개체들이라 그렇습니다.”
“제약이 많겠군. 이탈리아로 보내는 건 위험하겠어.”
“교황청 인근은 얼씬도 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최근 그곳에서…….”
“알아. 뭔가가 나타났다는 거지?”
“예, 저희는 무지막지한 신성력을 지닌 존재가 탄생한 거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만났던 백작급 마족 루드벨이 거짓을 고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심신이 확실하게 제압된 쿠르단도 같은 소리를 하는 걸 보면 말이다.
작게 고개를 끄덕인 그는 곧장 명령을 내렸다.
“당분간은 근처에서 대기해. 괜히 말려들지 않게 적당히 거리 좀 두고.”
“예, 알겠습니다. 로드.”
공손히 고개를 숙인 쿠르단은 마기의 구름 속으로 총총 사라져 갔다.
그런 뱀파이어 하수인들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블라드 유진은 심장이 뭉클해짐을 느꼈다.
계파는 다르다지만 1천 년 만에 동족을 만나서 그런 것 같았다.
그는 검지에 끼고 있던 수코의 인장을 무심코 내려다보았다.
뱀파이어 로드의 상징은 왠지 기묘한 빛을 발하는 듯했다.
‘동족이라……. 굳이 만들 생각은 없었는데, 이렇게 알아서 찾아와 주다니. 이것도 운명인가.’
최후의 뱀파이어이자 최후의 로드가 된 이후로, 유진은 더 이상 동족을 만들지 않기로 했다.
교황청과 치열한 전쟁을 벌이던 당시, 일족의 수뇌부는 놀랍게도 권좌 다툼을 하고 있었다.
로드가 성자들에게 당하여 약해진 틈을 타서, 신진 강자들이 권력을 찬탈하려 한 것이다.
그놈들의 자중지란에 염증을 느낀 그는 스스로 일족을 떠나 버렸다.
뱀파이어 집단이 일망타진당하자, 각지에 흩어졌던 피의 권능이 블라드 유진에게로 돌아왔다.
의도치 않았지만, 역대급으로 강력한 뱀파이어 로드가 되어 버린 것이다.
하지만 그는 막강한 권능을 얻고서도 일족의 번영을 위해 힘쓰지 않았다.
뱀파이어의 발생적 특성상, 인간의 추악한 권력욕을 버리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를지도 모르겠군.”
유진은 지금까지의 로드와는 사뭇 달랐다.
막강한 피의 권능을 한 몸에 받았으며, 거기다 이전의 경지를 뛰어넘은 지 오래였다.
압도적인 강함을 갖춘 군주라면, 권좌를 탐할 마음조차 먹지 못할 것이다.
물론 그가 항시 건재해야만 가능한 일이겠지만.
‘그래도 절대로 믿지 않는다.’
블라드 유진은 쿠르단이 사라진 쪽을 잠시 스산한 눈빛으로 응시했다.
* * *
유진의 작전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올랐을 때쯤, 유럽 연합에서는 긴급 정상 회의가 열렸다.
대뜸 스페인이 언론에 정화된 포르투갈 영토 사진을 공개한 것이다.
유럽 각지에 흩어졌던 포르투갈인들은 환호했지만, 곧장 조국으로 되돌아갈 수는 없었다.
스페인이 이베리아반도로 들어오는 국경을 막아 버렸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지브롤터 해협과 북대서양에서는 해상 봉쇄까지 이어 지는 상황이었다.
그러자 유럽 연합에서는 즉각 정상회의를 열었는데, 하비에르 대통령은 얼굴조차 비추지 않았다.
“이베리아반도 북부의 오염 지대는 그대로 놔두고 포르투갈만 쏙 점령했습니다. 이건 아예 작정하고 서쪽만 공략한 겁니다.”
“정말 뻔뻔하군요. 나라를 되찾자마자 하는 짓이 지중해를 틀어막는 거라니…….”
지브롤터 해협은 다양한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얽힌 곳이었다.
스페인과 모로코가 오염 지대에 휩싸인 이후, 해협 장악 시도는 전혀 없었다.
미궁의 위협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영국조차도 상륙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하지만 블라드 유진이 개입하면서 판도가 극명하게 바뀌어 버렸다.
“확실히 그자가 문제로군요. 예전에는 그저 구세주로만 여겼는데.”
“제가 말씀드렸잖습니까? 스페인 편애가 심각하다고요.”
으르렁거리듯 말하는 인물은 독일의 베른트 폰 마이어 총리였다.
이전에 이자는 유진에게 독일 동부 진공 작전을 부탁했다가 매몰차게 거절당하고 말았다.
그 때문에 베른트는 그를 향한 악감정을 갖고 있었다.
적절한 보상을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이지만, 이유 따윈 상관없었다.
이번 정상 회의는 블라드 유진과 스페인을 규탄하기 위해서 마련된 자리니까.
“그나저나 스페인은 다시 들어올 생각이 없답니까?”
프랑스의 대통령 장 뒤르켐은 항상 하비에르 대통령이 앉던 자리를 힐끔거리며 말했다.
영토를 모조리 상실한 스페인은 유럽 연합에서 뼈아픈 홀대를 받았다.
59명이던 의회 의석은 0명으로 줄었으며, 임시 정부 수장이었던 하비에르를 정상 회의에 부르지 않기도 했다.
이는 9%에 육박하던 분담금을 한 푼도 내지 못해서 벌어진 일이었다.
깡통만 차게 된 스페인을 위해서 EU는 결단코 움직이지 않았다.
각국의 상황을 극복하기에도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베리아반도가 정상화되면서 유럽 연합국의 생각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어떻게 한 입 해 볼까 하는 욕심.
블라드 유진을 이용하면, 자국의 오염 지대도 몰아낼 수 있을 거라는 희망.
이런 다양한 망상이 정상들의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었다.
“지금 다시 받아 주는 것도 웃긴 일이죠. 포르투갈도 진작에 빠지지 않았습니까?”
덴마크의 총리 메테 에릭슨은 염세적인 표정으로 한마디를 툭 던졌다.
현재 덴마크 왕국은 거의 숨만 간신히 붙어 있는 상태였다.
아마 퓐섬, 토싱에섬, 에뢰섬, 랑엘란섬 등이 아니었다면 진작에 멸망하고 말았을 것이다.
스페인이나 포르투갈처럼.
유럽 연합의 회원국들이 얼마나 이기적인 행보를 보였는지 잘 알았기에, 좋은 말이 나올 수가 없었다.
분담금을 내고는 있었지만, 덴마크에는 유럽 통합군이 올라올 생각조차 하지 않았으니까.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우리가 그들을 내쫓은 겁니까? 스스로 나간 거지요.”
독일 총리 베른트는 메테 에릭슨의 발언을 비판하며 의견을 모으기 시작했다.
지금이야말로 유럽 통합군이 움직일 때라고 말이다.
“연합의 결속을 해치는 행위는 용납할 수 없습니다. 스페인의 행보는 결국에 우릴 고립시킬 테지요.”
수에즈 운하가 막힌 이때, 지중해에서 대양으로 나갈 방법은 지브롤터 해협을 지나는 수밖에 없었다.
스페인이 그곳을 틀어막고 있는 게 마음에 안 들었던 이탈리아 대통령 세르조 몬타리오의 발언이 이어졌다.
이내 유럽 통합군 파견이 EU 정상회의의 주요 의제가 되어 버렸다.
전선을 스페인과 함께 지켰던 프랑스의 입장으로서는 곤란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아마 미궁 사태 이전이었다면, 크게 신경을 쓰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이제 전우와도 같은 존재가 되어 버렸다.
스페인의 몰락을 지켜만 봐야 하는 장 뒤르켐 대통령의 표정은 잔뜩 굳어만 갔다.
그렇다고 규탄 열풍에 휩싸인 이 판국에 반대표를 던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프랑스의 상황도 그리 좋지만은 않아서, 유럽 연합의 힘이 절실했으니까.
그래도 마지막 의리는 다할 생각이었다.
“블라드 유진, 그자가 나서면 어떡합니까? 분명 가만히 있지는 않을 텐데요.”
역사상 가장 강력한 헌터로 자리매김한 자라면, 상황을 뒤집어엎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EU 회원국의 수장들은 그런 유진의 위명을 간접적으로 전해 듣기만 했을 뿐이었다.
아마 분석된 자료만 받아 보았을 테니, 여타 S급 헌터보다 조금 뛰어난 정도로 인식한 듯했다.
하지만 프랑스는 달랐다.
전선에서 그의 활약을 코앞에서 본 자들도 많았고, 프랑스 대통령 장 뒤르켐은 먼발치에서나마 확인도 해 보았다.
상상을 초월하는 속도로 박살 나는 대성체 미궁을 직접 목격한 것이다.
물론 그 당시는 미궁 성장 사건이 벌어지기 전이었지만, 대단한 위업임은 확실했다.
하나 이미 달콤한 과실을 쟁취할 생각에 눈이 먼 유럽 연합의 주축들은 멈출 마음이 전혀 없었다.
“그깟 헌터 한 명이 무에 대수라고 그러십니까?”
“그렇습니다. 그놈의 마수에 사로잡힌 스페인을 해방하고, 포르투갈을 원래 국민에게 돌려줘야 합니다.”
정당한 명분인 양 지껄여 댔지만, 그렇게 될 리는 만무했다.
아마 EU를 탈퇴하고 괘씸한 짓거리를 벌인 스페인을 찢어 먹고, 포르투갈마저도 갈아 버릴 공산이 컸다.
“그럼 모두가 합의한 거로 알고 진행하도록 하겠소이다.”
이윽고 이탈리아 세르조 대통령의 선언이 떨어졌다.
역시 교황청을 품에 안은 국가답게 유럽 연합에서 가장 큰 발언권을 자랑하고 있었다.
결국에 장 뒤르켐 대통령은 눈을 질끈 감은 채,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전우의 몰락을 애도하면서.
하지만 이들은 앞으로 벌어질 일을 전혀 예측할 수 없었다.
고작 헌터 한 명이라 생각했던 사람으로 인해서 얼마나 큰 피해가 발생할지를 말이다.
* * *
유럽 통합군 파견이 결정된 시각, 블라드 유진은 안도라 인근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안도라 공국은 유럽 연합과 밀접한 관계의 비회원국이었다.
피레네산맥의 자그마한 국가였지만, 지금은 스페인이 부활하며 흡수되어 버렸다.
기존의 국민이 완벽하게 몰살당했기에, 나라를 찾으려는 시도조차 없었으니까.
“슬슬 움직일 때가 되었군.”
현재 이베리아반도로 출입하는 방법은 단 한 가지뿐이었다.
블라드 유진이 몽펠리에부터 마드리드까지 길을 뚫은 이후로, 이 근방은 미궁 정화를 전혀 하지 못했다.
바르셀로나는 되찾았지만, 그마저도 금방 빼앗겨 버렸다.
그래서 육로를 통해서 스페인으로 들어오려면, 푸이그세르다를 반드시 통과해야만 했다.
“정말 이렇게 해도 되나 모르겠네요.”
루시아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국경지대를 응시했다.
아마 조만간 저곳은 죽음의 구렁텅이가 되어 버릴 터였다.
유진의 의지가 반드시 그렇게 만들 테니까.
“겁만 주는 거로는 안 돼. 대화를 위해서는 그에 걸맞은 약이 필요한 법이지.”
“미친개에게는 매가 약이다. 이건가요?”
“이해가 빠르군.”
그녀의 대답에 흡족한 미소를 지은 그는 엔세데스를 돌아보았다.
“준비됐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