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얄 블러드-187화 (188/226)

12화

대략 두 달이 흐르는 동안, 블라드 유진은 이베리아반도 서부를 거의 평정할 수 있었다.

스페인에서의 성공적인 전선 확장 사업은 림일국의 도움이 매우 컸다.

미국에서와는 달리, 몬스터 웨이브가 시작되기도 전에 끊어 버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언제나 성공적이지만은 않았다.

몬스터들도 마기 축출 역장의 존재를 알아차린 듯, 되레 선제공격을 가하기도 했으니까.

놈들의 능동적인 대응에 림일국은 목숨을 잃을 뻔했다.

하필이면 역장을 수리하던 도중에 기습당한 탓이었다.

“어휴! 그때 생각만 하면, 진짜 온몸에 소름이 돋습니다요.”

림일국은 사극에서 본 간신배 말투를 따라 하며 진저리쳤다.

“레니가 지켜 주고 있는데, 뭐가 문제지?”

“그때는 저 혼자뿐이어서 말이죠.”

“전투 훈련을 따로 해야 하나 고민이로군.”

“이 나이에 그건 좀…….”

독특한 능력을 지녔지만, 림일국의 전투력은 정말이지 형편없었다.

오로지 마기 축출 역장 원툴이라, 반드시 호위가 필요했다.

그래서 레니를 붙여 둔 거였는데, 그녀는 그리 좋은 파수꾼이 아니었다.

스킬이 죄다 암살에 특화된 데다가, 소극적으로 방어하기보다 상대를 모조리 죽이는 걸 선호했으니까.

적을 몰살시키면 안전해진다는 지론이 확고했다.

―웬만한 건 알아서 좀 해결해. 도망을 치든지.

“제가 그놈들한테서요? 무지막지하게 빠르던데요?”

―그럼 죽어.

“헙!”

레니의 타박에 림일국은 오싹한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현재 일행과 스페인 헌터들은 포르투갈 남부의 리스본까지 남하한 상태였다.

이제 대략 열흘 정도만 작업하면, 이베리아반도는 미궁의 위협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다.

물론 모로코와 프랑스 서부에서 날아드는 파편만 아니면 말이다.

“슬슬 시작해도 될 것 같군.”

유진은 루시아를 의미심장하게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녀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이제 스페인과 프랑스 등지에서 활동하는 포르투갈 단체에 판매 소식을 알릴 차례였다.

물론 국제 사회의 비판이 화살처럼 날아드는 건 자명한 일이었다.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블라드 유진의 말대로 끝까지 밀어붙일 작정이었다.

애초에 포르투갈 땅을 판매한다는 건 루시아와 스페인 정부의 계획이 아니었던가.

“됐습니다. 조만간 여론전을 개시할 겁니다.”

하비에르 대통령과 통화하고 온 루시아는 착잡한 표정으로 입맛을 다셨다.

궁여지책으로 내놓은 작전이었지만, 그리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다.

나라를 빼앗겨 본 경험이 있다 보니, 포르투갈 국민의 마음을 이해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돈을 주고 영토를 되찾는 선택지가 존재한다는 게 어디인가.

스페인 국민은 프랑스 전선을 전전하며 피눈물을 흘려야만 했는데.

“그래 봐야 자기 합리화일 뿐이죠.”

“단순하게 생각해. 감정은 빼놓고 말이야.”

“고마워요.”

유진의 무뚝뚝한 대답에도 루시아는 감사를 표했다.

이게 그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위로라는 걸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목석같은 이 남자에게서 이런 반응이 나온 것만 해도 환호성을 지를 판국이었다.

스페인 정부가 움직이기 시작했으니, 공략대도 제 할 일을 해야만 했다.

그런데 타구스강을 지나 알마다 쪽으로 넘어가려던 순간이었다.

“뭔가가 다가오고 있군. 수효가 꽤 많아.”

“저는 아직 아무것도 안 느껴지는데요?”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데다가, 거리가 좀 있어. 조만간 알게 될 거야.”

블라드 유진은 짙은 마기의 구름 속에서 은밀하게 움직이는 무리를 감지했다.

이런 곳을 돌아다니는 놈들이야 뻔했다.

사방 천지에 충만한 마기를 만끽하며 파괴 본능을 발산하는 몬스터일 터.

개중에는 기척을 잘 숨기는 부류도 더러 있었기에, 루시아는 크게 경계하지 않았다.

아무리 뛰어난 은신술을 쓰더라도 유진의 앞에서는 진면모를 드러낼 수밖에 없을 테니까.

그런데 어느 정도 가까워지자, 놈들은 되레 존재감을 발산하기 시작했다.

“좀 이상한데요? 왜 저기서 우릴 지켜보고 있는 걸까요?”

루시아의 말대로 수십의 검은 인형은 폐허가 된 도로에 우두커니 서서 이쪽을 주시하는 중이었다.

그 모습이 너무도 음산해서 그런지, 림일국은 한 차례 진저리를 쳤다.

하지만 유진은 저들의 의도를 금방 알아차렸다.

“공격할 의사가 없다는 걸 피력하려는 모양이로군.”

“네? 그게 느껴지세요?”

“봐. 되게 평화롭잖아.”

“으스스한데요?”

태연하게 도로 위의 괴인들을 가리켰지만, 그의 말에 동의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찜찜한 놈들이네.”

엔세데스조차도 저것들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지, 눈살을 찌푸렸다.

블라드 유진은 화룡왕의 의견을 가볍게 무시하고 줄줄이 뒤따라오던 공략대원들을 돌아보았다.

“일단 이쯤에 자리를 잡자고. 림일국.”

“예, 대부님.”

“역장 설치하고 대기.”

“알겠습니다요!”

그의 명령이 떨어지자, 곧바로 마기 축출 역장이 전개되었다.

짙은 마기에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던 스페인 헌터들은 앞다투어 역장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유진 일행은 되레 도로 끄트머리에 서 있는 몬스터 무리를 향해 이동했다.

사실 몬스터인지 명확하지는 않았다.

시커먼 로브를 입고 후드를 푹 눌러 쓴 놈들은 사람과 매우 닮았으니까.

물론 이토록 짙은 마기의 구름 속을 태연하게 돌아다니는 인간은 없을 테지만.

“온다.”

척. 척.

적당히 거리가 좁혀지자, 선두의 세 명이 불쑥 앞으로 나왔다.

공손하게 손을 모은 채 느릿하게 걷는 모습은 전투 의지가 전혀 없어 보였다.

하지만 루시아는 끝까지 긴장감을 놓지 않았다.

저러다 언제 돌변하여 기습을 가할지 모르는 일이니까.

그러나 정작 가장 앞서 나간 블라드 유진의 얼굴에는 왠지 모를 반가운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익숙한 기운이다. 이유는 모르지만, 절로 웃음이 나오는군.’

그들을 향해서 접근하는 동안, 그는 이 친숙한 느낌의 근원이 무엇인지 떠올려 보았다.

수천 년의 세월을 살아오면서 이런 감각은 누차 겪어 보았다.

단지 최근 1천 년 동안 단 한 번도 접하지 못했을 뿐이었다.

잠시 후, 이유를 알아챈 유진은 미소를 싹 지우고 우뚝 멈춰 섰다.

그러자 대략 다섯 걸음 앞까지 다가온 세 인형이 한쪽 무릎을 꿇으며 고개 숙였다.

“블라드 유진 님을 뵙습니다.”

굉장히 가깝게 느껴진 이유는 이들 또한 그와 마찬가지로 피와 어둠의 일족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구상의 뱀파이어는 단 한 명, 블라드 유진밖에 남지 않았다.

그는 피의 권능을 나눈 적이 없기에, 어딘가에서 일족이 양산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네놈들은 뭐지? 동족은 이미 다 죽었을 텐데.”

유진의 질문이 이어지자, 선두에 무릎 꿇은 자가 고개를 들며 말했다.

“그것이…….”

“대충 알겠군. 날 이름으로 부르는 것만 봐도 말이야.”

말꼬리를 흐리는 바람에 들은 건 없지만, 그는 곧바로 대략적인 상황을 유추해 냈다.

이들은 일족과 닮았지만, 계파가 다른 존재들이었다.

지구의 뱀파이어는 수천 년 전 어떤 마족이 차원의 경계를 뚫고 넘어오면서 시작되었다.

그 말인즉, 이 녀석들 또한 그와 비슷한 방식으로 이곳에 왔다는 의미였다.

그 당시에는 경천동지할 일이었지만, 지금은 그리 놀라울 일도 아니었다.

이미 마계로부터 수도 없는 마족과 몬스터가 넘어와 깽판을 치고 있지 않은가.

“죄송합니다. 저희의 로드는 단 한 분뿐이라…….”

“피의 제왕 키에리 라비에스겠군.”

“그, 그렇습니다.”

유진의 입에서 로드의 이름이 튀어나오자, 뱀파이어들은 한 차례 몸을 떨었다.

난데없이 주군의 풀 네임을 들었기 때문에, 다소 놀란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지구에서 태어난 뱀파이어가 피의 제왕을 알고 있다는 게 이상한 일이었다.

벌써 수천 년이나 지났고, 그간 마계와는 전혀 상관없이 살아왔으니까.

당황한 마음을 수습한 그들은 로브 후드를 젖히며 고개를 들었다.

머리칼의 색상은 제각각 달랐지만, 창백한 피부와 붉은 눈동자가 블라드 유진과 매우 흡사해 보였다.

외모만 봐선 그렇게까지 먼 친척은 아닌 듯했다.

그는 그런 그들에게 핵심 질문을 던졌다.

“내게 찾아온 용건은?”

“저희를 거두어 주십시오.”

답변을 예상한 건지는 알 수 없으나, 유진의 표정은 담담하기만 했다.

게다가 곧이어 튀어나온 무미건조한 대답은 되레 뱀파이어들을 당황케 했다.

“내가 왜?”

“예?”

“그런 쓸데없는 짓을 왜 해야 하지? 그것도 다른 이를 로드로 섬기는 놈들에게 말이야.”

“…….”

뱀파이어의 세계에서 클랜의 크기는 강한 권능을 상징했다.

1천 년 전만 해도 세를 늘리려는 시도가 수도 없이 있었다.

아마 마계에서도 비슷한 식으로 권력 투쟁이 이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유일한 뱀파이어가 된 이 시점에 그딴 권력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게다가 그는 지구상의 모든 존재를 통틀어서 최강자의 위치에 올랐는데.

단칼에 거절할 줄은 몰랐던 모양인지, 놈들은 서로를 힐끔거리며 재빨리 의사를 타진했다.

“유진 님의 로드로 섬기고, 주종 계약을 맺겠습니다.”

“호오?”

결의에 찬 듯한 대답에 블라드 유진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이렇게 간단히 꼬리를 내릴 줄은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었다.

동시에 너무 쉽게 주군을 바꾸는 건 아닌지 하는 의심이 들었다.

그런 기색을 느낀 모양인지, 그자는 곧장 설명을 덧붙였다.

“이제껏 로드는 키에리 님, 단 한 분뿐이었습니다. 하지만 너무 오랫동안, 저희를 방치하셨습니다. 일족의 세는 곤두박질쳤고, 몬스터와 마찬가지로 미궁에 파견되는 신세로 전락했지요.”

“방치?”

“예. 그분께서 자리를 비우신 지, 벌써 수천 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생존을 위해서 날 찾아온 거다?”

“그렇습니다. 부디 피의 권능을 지닌 자로서 저희를 굽어살펴 주시옵소서.”

그들의 요구는 본분을 망각한 키에리 라비에스 대신 주군이 되어 달라는 것이었다.

뱀파이어의 원류는 마족, 그것도 마왕의 피를 제대로 이은 강력한 존재였다.

하지만 로드가 수천 년간 자리를 비웠고, 그로 인해 일족은 파탄지경에 이르렀다.

이들이 깃발을 바꾸려고 유진을 찾아온 것도 이해가 되는 부분이었다.

최근 지구의 상황은 마계에 점점 안 좋은 쪽으로 치닫고 있었고, 이대로 가다간 언제 몰살당할지 모를 지경이었으니까.

유진은 깊은 고민에 빠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거두는 거야 그리 어렵지 않을 테지만, 당장 스페인에서 활동하기에는 처치 곤란이기 때문이었다.

“묻겠다.”

“예, 하교하십시오.”

“마계와의 소통이 가능한가?”

“고위 마족은 몰라도 저희는 아무런 정보도 받을 수가 없습니다. 특별한 방법을 쓰지 않으면, 차원을 넘는 건 불가하니까요.”

“쓸모없군.”

“다만……. 새로 분화한 최종 보스 개체에 접근하여 간접적인 정보를 획득할 수는 있습니다.”

“그래?”

시큰둥하던 그의 표정은 마지막 대답에 슬쩍 펴졌다.

굳이 이놈들을 달고 다닐 필요 없이 활용할 방안이 있었으니까.

“좋아. 주종 계약을 맺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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