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인종 차별을 당한 림일국이 스페인 헌터들에게 소소한 복수를 하고 있을 무렵.
블라드 유진과 루시아는 대성체 미궁을 쭉쭉 공략하고 있었다.
하나하나가 거의 대규모급에 해당되어, 예전처럼 어마어마한 속도를 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전 세계가 몸살을 앓고 있는 상황에서 그래도 이 정도면, 최고로 빠른 수준이었다.
“반응이 꽤 빠르군.”
“그러게요. 저렇게 빠릿빠릿한 사람들이 아닐 텐데, 유진 님이 오셔서 각성이라도 한 모양입니다.”
스페인 헌터들은 미궁이 정화되자마자 마기 축출 역장을 벗어났다.
그런 움직임을 감지하자, 루시아는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거듭된 패배로 인하여 그들은 상당히 위축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말이 통하지도 않는 림일국과 트러블이 생겼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스페인 헌터들의 몬스터 웨이브 차단 작전은 다소 힘겨워 보였다.
하지만 레니가 뛰어들어 활약하자, 전황은 급격하게 좋아졌다.
처치 곤란한 몬스터를 그녀가 잡아 주니, 적은 병력으로도 후속 조치를 할 수 있었다.
“충분하네. 계속 진행해도 되겠어.”
“네, 가시죠.”
잠시 후방을 살피던 유진은 작게 주억거리며 발길을 돌렸다.
림일국과 레니를 활용한 웨이브 차단 작전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쏟아져 나오는 족족 조져 버리니까, 몬스터들은 대군을 형성하지 못했다.
그래서 적은 병력으로도 충분히 막을 수 있었고 말이다.
이게 다 림일국의 마기 축출 덕분에 실행 가능한 작전이었다.
‘데려오길 잘했군.’
이윽고 두 사람은 다음 대성체 미궁을 정화하기 시작했다.
공략 속도를 보아하니, 아마 오늘 후속 조치 중인 인원들이 쉴 시간 따위는 없을 것 같았다.
* * *
“흐어억! 허억! 우웩!”
“끄어어…….”
연속으로 몬스터 웨이브를 막아 낸 스페인 헌터들은 한계까지 몰린 상태였다.
하루 만에 같은 작전을 무려 네 번이나 했으니, 헛구역질이 나올 만도 했다.
게다가 저들은 원래 마기 축출 역장 안에서 틈틈이 휴식을 취하도록 예정되어 있었다.
인원을 절반으로 나눠서 교대할 수 있게 말이다.
하지만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림일국은 스페인 헌터들의 입장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지친 상태에서 마기에 고스란히 노출되어야만 했다.
“흐억! 도, 도저히 못 버티겠어. 제발 살려 줘!”
“이러다가는 다아아 죽어!”
그들은 역장 바로 앞에 무릎을 꿇은 채, 힘없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어떤 이들은 나뭇가지에 흰 셔츠를 걸고 흔들기까지 했다.
예전보다 마기가 강해진 탓에 버티기가 더욱 어려운 모양이었다.
하지만 어두컴컴한 마기 축출 역장 내부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흠……. 이제 들여보내 줄까?”
림일국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그런 스페인 헌터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만하면 복수는 충분히 한 것 같았다.
그런데 덜컥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앙심을 품은 저들이 들어와서 보복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었다.
자신들을 쫓아내지 못하게 압박하면, 크게 곤란해질 터였다.
림일국의 전투 능력은 정말이지 보잘것없었으니까.
그래서 유진이 레니와 엔세데스까지 붙여 주지 않았던가.
“스읍. 그래도 저렇게 놔두면 다 죽을 거야. 미워도 아군인데 그럴 수는 없지.”
마음이 약해진 림일국은 역장을 열어 주었다.
그러자 미궁이 정화되고 남은 마기의 찌꺼기가 헌터들과 함께 마구 쏟아져 들어왔다.
“흡!”
하지만 림일국의 몸에서 터져 나온 빛이 마기를 완벽하게 밀어냈다.
스페인 헌터들은 드디어 숨을 좀 돌릴 수 있었다.
“허억! 헉! 사, 살았다.”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경험이었어.”
마기 축출 역장에 빈틈이 없다는 걸 확인한 림일국은 그들을 힐끔 돌아보았다.
혹여나 인질을 잡는 등의 헛짓거리를 할 수가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탈진한 헌터들은 하나같이 바닥에 널브러져 가쁘게 숨을 몰아쉬기만 할 뿐이었다.
스윽. 움찔!
무심코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림일국의 움직임에 반응한 스페인 헌터들이 작게 꿈틀거렸다.
자신들을 또 쫓아내지는 않을까 경계하는 듯한 모양새였다.
“호오? 이놈들 제대로 쫄았구먼? 그래. 그렇단 말이지?”
림일국은 심술궂은 웃음을 흘리며 괜히 역장 쪽으로 슬쩍 이동해 보았다.
그러자 헌터들의 불안한 시선이 자동으로 따라왔다.
“으허허! 무섭지? 이놈들아.”
그들의 반응이 재미있었던 모양인지, 녀석은 역장에 붙었다 떨어지는 등 법석을 떨었다.
하지만 림일국의 참교육은 그리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왜 거기서 춤을 추고 있는 거지?”
문득 역장 밖에서 블라드 유진의 목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으헉! 대, 대부님! 어서 들어오시지요.”
난데없이 튀어나온 그의 모습에 림일국은 펄쩍 뛰며, 얼른 출입구를 만들어 주었다.
그러자 유진과 루시아가 마력 축출 역장 속으로 들어왔다.
“한데, 여긴 어쩐 일이신지……. 아직 해가 지려면 시간이 좀 남았습니다만.”
림일국은 괜히 점점 맑아지는 하늘을 힐끔거리며 말을 붙였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바닥에 널브러진 스페인 헌터들을 향하고 있었다.
“워낙 못 따라와서 무슨 일이 있나 와 봤지. 고작 네 번밖에 안 했는데 말이야.”
“그거야 저놈들이 너무 나약해서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보이기는 하네. 물론 내 예상보다 더 이른 시점에 지친 이유가 따로 있겠지.”
“…….”
블라드 유진이 정곡을 찌르자, 림일국은 잔뜩 얼어붙었다.
하수인이 된 이상, 주인인 그에게 거짓말 따위를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녀석은 곧바로 사죄했다.
“죄송합니다. 대부님.”
“됐다. 어차피 잘 쉬었어도 대성체 하나 정도 더 하는 게 한계였을 터.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
“예.”
유진은 일행과 함께 큼지막한 천막으로 향했다.
이 대형 천막은 엔세데스가 마법으로 쳐 둔 거였다.
공략이 진행되는 동안에 화룡왕과 림일국은 대기 외에 할 일이 없었으니까.
“여, 드디어 왔군. 심심해 죽는 줄 알았네.”
“그럼 따라와서 좀 거들지 그래?”
“그렇다고 일을 하고 싶다는 건 아니었어. 그냥 놀고 싶을 뿐이지. 여긴 맛있는 술도 없다고.”
스페인은 국토 전역이 마기에 뒤덮인 적이 있어서, 주류 생산이 완전히 멈춰 버렸다.
그랬기에 루시아조차도 고작 오루호 두 병밖에 구하지 못했다.
그만큼 식량 사정이 열악하기 때문이었다.
어쩔 수 없이 엔세데스는 미국에서 챙겨 온 버번위스키와 워싱턴산 와인만 주야장천 들이켰다.
딱!
“예, 여기 있습니다.”
블라드 유진이 손가락을 튕기자, 림일국이 곧장 머그잔을 내밀었다.
혈성쇄혼술로 미리 명령해 둔 덕분에 그는 앉자마자 믹스 커피 한 잔을 즐길 수 있었다.
간이 침상에 몸을 눕힌 유진은 물수건으로 얼굴을 닦고 있던 루시아에게 질문을 던졌다.
“교황청 관련해서 무슨 소식 없나?”
뜬금없이 이런 질문을 던진 이유는 최근 폰시아노로부터 연락이 끊어졌기 때문이었다.
워낙 그의 위치가 자주 바뀌다 보니, 연락하지 못할 만도 했다.
하지만 그자는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없는 번호라고 뜨는 걸 보니, 일부러 연락을 끊은 듯했다.
“저희도 잘 모르겠습니다. 국내 사정이 워낙 급하다 보니……. 지금이라도 알아보라 할까요?”
“됐어. 굳이 그럴 필요는 없을 듯하군.”
“아, 네.”
커피를 홀짝인 유진은 깊은 상념에 빠졌다.
교황을 감시하러 갔다가 혈성쇄혼술이 파훼된 DK, 교황청 내부를 감시하다가 연락이 끊긴 폰시아노.
둘의 접점은 딱 하나뿐이었다.
‘안드레아 교황.’
늙수그레한 놈의 얼굴과 함께 실렌스 테라 근처에서 만난 마족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백작급 마족 루드벨은 유럽 쪽에 매우 강력한 존재가 들어와 분탕을 치는 중이라 했다.
미궁 성장 사건도 그로 인한 것이라고 말이다.
DK와 폰시아노의 연락이 끊어진 것도 얼추 비슷한 시기였다.
물론 약간의 시간 격차가 있긴 했지만.
‘사르데냐와 시칠리아를 공략할 때 한번 찔러나 봐야겠군. 그럼 뭐라도 나올 테지.’
이탈리아령이었던 두 섬을 정화한다면, 교황청에서도 뭔가 반응이 있을 터였다.
교황이 가장 걱정하는 게 바로 주변의 섬에서 날아드는 미궁의 파편이었으니까.
해외 파견 힐러의 수효를 매년 줄이는 것도 그로 인한 대응책 때문이 아니었던가.
하지만 지금은 포르투갈을 정화하여 스페인 재정을 확보하는 게 우선이었다.
유진은 술 냄새를 풀풀 날리며 간이 침상에 걸터앉은 엔세데스에게 문득 질문을 던졌다.
“좀 어때?”
“영지? 나쁘지 않아. 미국만큼 많지는 않아도 동선 짜는 게 훨씬 쉽거든. 아무 땅이나 다 얻을 수 있으니까.”
한 번 폭삭 망했다 다시 생긴 나라답게 토지를 선점한 사람은 아예 없다시피 했다.
덕분에 화룡왕은 필요한 영지를 쏙쏙 골라낼 수 있었다.
이러면 아마 미국보다 영기를 모으는 시간이 조금 더 짧을 터였다.
하지만 엔세데스의 비행 속도는 엄청났기에, 큰 차이는 없을 것이다.
마나 소모가 다소 줄어들 뿐이지.
“슬슬 정산할 때가 되지 않았나? 설마 이번에도 몰래 빼서 쓴 건 아니겠지?”
“무, 무슨 소리야. 조금도 쓰지 않았다고.”
“그럼 다행이군.”
“그래도 아이템을 소환할 수 있는 정도는 아니야. 여기는 워낙 오랫동안 오염되어 있어서 영기 회복이 더디거든.”
“좋아. 믿어 주지.”
“아니, 레알 진짜라니까? 이마에 엄지도 찍을 수 있다고!”
“대체 그딴 건 어디서 배운 거냐?”
“태구가 이러던데?”
“…….”
화룡왕의 어처구니없는 반응에 블라드 유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정신 연령 낮은 십폭마귀 놈이 여러 사람에게 나쁜 물을 들이는 것 같았다.
그는 곁에 앉은 레니의 머리칼을 쓸어 주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저런 놈처럼 되면 안 된다. 알았지?”
―웅.
* * *
한편, 교황청 성기사단 제노아 지부.
우당탕! 쿵!
“커헉!”
엄청난 힘에 밀린 성기사 하나가 벽면과 충돌하고 주르르 미끄러져 내렸다.
축 늘어져 있던 그자는 이내 힘겹게 몸을 일으키려 했다.
잠깐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난 모양이었다.
하지만 성기사는 목적을 이룰 수가 없었다.
어느새 새하얀 맨발이 다가와 흉갑을 사뿐히 지르밟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드드득!
가볍게 내리누르는 것 같은데도 두꺼운 흉갑에 깊은 발자국이 생겼다.
플레이트 아머가 찌그러지자, 성기사는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질렀다.
“크어어억!”
찢어진 철판이 밀려 들어와 가슴팍을 마구 찌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비열한 미소를 머금은 자가 어둠을 뚫고 나타났다.
고전적인 형태의 랜턴에는 새파란 불꽃이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그늘에 가려져 입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성기사는 문을 열고 들어온 자의 정체를 바로 알아보았다.
“다, 당신이 어째서 이런 괴, 괴물과 함께…….”
“말 함부로 하지 마라. 폰시아노여. 감히 우러러볼 수도 없는 분이시니.”
피를 토하며 죽어 가는 성기사의 정체는 폰시아노였다.
푸른 랜턴을 든 자는 혀를 끌끌 차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한국 파견 기사대장이 제노아에서 활동하면, 이상할 수밖에 없지. 그 빌어먹을 놈이 시켰더냐?”
쿠웅!
남자의 일갈에 폰시아노는 철퇴를 맞은 듯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는 순간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