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얄 블러드-185화 (186/226)

10화

블라드 유진이 그린 선은 코르시카섬과 사르데냐섬, 시칠리아섬을 목표로 그어졌다.

더불어 프랑스의 서부, 모로코, 아일랜드까지 쭉쭉 범위를 넓혔다.

급기야는 벨기에와 네덜란드까지도 올라갔다.

“이, 이게 다 뭡니까?”

“뭐긴 뭐야. 당신들이 세운 작전의 범위를 확대하는 거지.”

“예?”

“어차피 요지는 이거 아닌가? 땅을 확보하고, 해당 국가의 국민에게 판다.”

“…….”

루시아와 하비에르는 살짝 충격받은 표정이었다.

따지자면 포르투갈을 수복하여 재원을 마련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이렇게까지 대규모로 시행할 줄은 몰랐을 뿐이지.

물론 사실상 능력이 없어서 그런 거기도 했다.

요즘 시대에 누가 이만한 땅을 확보할 수 있겠는가.

다들 자국 영토를 지키는 것만 해도 벅찰 지경인데.

“이걸 저희에게 해 주시겠다고요?”

잠시 상상 속에서 허우적거리다가 현실로 돌아온 루시아는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만약 저 계획이 가능하다고 해도 그건 스페인의 힘으로 행한 것이 아니었다.

아마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만 얻을 수 있으리라.

“대신 확실하게 내 영지를 지켜야 한다는 조건으로.”

한 번 개발된 영지는 계속해서 영기를 뿜어내게 되어 있었다.

일정 이상의 에너지가 모이면, 그때부터는 엔세데스가 쭉 돌면서 날름날름 가져가기만 하면 된다.

뉴욕주에 해 놓은 것도 바로 그런 식의 조치였다.

하지만 영지가 다시 오염 지대로 바뀌게 되었을 때는 원점 회귀가 되고 말았다.

그 땅을 되찾는다고 해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이는 영기가 마기에 밀려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에 일어난 현상이었다.

그런 참사를 막으려면 인간들이 전선을 잘 유지해 줘야만 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막아 내겠습니다.”

루시아는 결의에 찬 눈빛으로 씩씩하게 대답했다.

사실 그녀가 아니었다면, 스페인에 이런 혜택을 줄 이유가 없었다.

땅이라면 러시아를 비롯한 북유럽 국가를 방문해도 얼마든지 받을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그는 지금껏 루시아가 보여 준 신뢰 때문에, 스페인을 택했다.

그녀라면 다이애나 로즈처럼 충실히 전선을 지킬 테니까.

“그럼 시작해 볼까?”

간단하게 계약을 마친 유진은 벌떡 일어나 마드리드 왕궁을 나섰다.

스페인의 위기를 해결하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려면, 일정이 그리 여유롭지 않았다.

* * *

“역시 유럽의 몬스터에게도 먹히는구나! 커흠!”

무의식적으로 소리를 질렀던 림일국은 헛기침하며 주변 눈치를 보았다.

자신과 함께하는 사람들이 워낙 거물이라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기 때문이었다.

엔세데스와 레니는 진 연합체 내부에서 특별히 대우하기에, 더욱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일행은 림일국이 뭘 하든 별달리 신경 쓰는 기색이 아니었다.

각자 자기 일에만 집중할 뿐이었다.

화룡왕은 오자마자 술판을 벌였으며, 레니와 녹턴은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천진난만하게 놀았다.

그러다 림일국이 펼쳐 놓은 마기 축출 역장을 벗어나기도 했다.

미리 아군 지정을 해 놓았기에, 경계를 마음껏 넘을 수 있었던 것이었다.

“어엇! 거기 넘어가시면 안 됩니다!”

당황한 목소리로 소리쳤지만, 레니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걱정과는 달리, 둘은 시커먼 구름 속을 자유자재로 돌아다녔다.

마기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모습에 림일국은 머쓱한 얼굴로 뒷머리를 긁었다.

“뭘 그렇게 긴장하나? 와서 한잔 들게.”

“수, 술을 마시면 역장 제어가 안 되어서…….”

“에잉. 그런 것도 못 하나? 별로 쓸모가 없군.”

“예?”

엔세데스와 잠깐 이야기를 나눈 림일국은 어이없는 표정을 짓고 말았다.

마치 음주 운전을 못 한다고 욕을 들어먹은 듯한 느낌이었다.

화룡왕이 대충 손을 흔들자, 림일국은 머쓱하게 웃으며 발걸음을 돌렸다.

대단한 집중력이 필요한 건 아니지만, 역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술을 마실 수가 없었다.

자는 것 외의 심신 미약 상태에서는 역장이 깨지고 말 테니까.

“별 희한한 것들이 쌓여 있군.”

림일국은 마치 기관총 포대처럼 생긴 곳을 거닐었다.

구멍 난 곳은 없는지 주변을 한 바퀴 크게 도는데, 문득 스페인 헌터들과 마주쳤다.

이들은 정화된 지역을 진공하기 위한 병력이었다.

미궁이 정화되자마자 달려들어서 몬스터 군단이 만들어지기 전에 처치하는 것이다.

이러면 적은 병력으로도 매우 큰 효과를 볼 수 있었다.

헌터들은 지금도 뛰쳐나갈 준비를 해 둔 상태였다.

그런데 그들 중 몇몇이 크게 소리를 질러 댔다.

“뭐라는 거야?”

스페인어를 알아들을 리가 만무했기에, 가볍게 무시하려 했다.

한데, 그들의 억양과 기세가 사뭇 심상치 않았다.

아무래도 자신을 질책하는 느낌이라, 림일국은 일단 한발 물러나며 양손을 펼쳤다.

만국 공통의 아무런 의도가 없다는 제스처였다.

하지만 잔뜩 예민해져 있던 스페인 헌터들에게는 전혀 먹히지 않은 듯했다.

“어어? 이 사람들이 왜 이래?”

림일국은 따따부따 쏘아붙이며 다가오는 헌터들을 피해서 뒷걸음질 쳤다.

그러나 그들의 움직임은 생각보다 더욱 빨랐다.

쉬익―!

다짜고짜 내뻗은 칼날은 무시무시한 속도로 날아들다가 중간에서 딱 멈췄다.

“으하하하!”

“와하하하!”

큼지막한 환도를 휘두르던 녀석이 웃자, 주변의 헌터들이 왁자지껄하게 폭소를 터트렸다.

림일국은 얼빠진 표정으로 서 있다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얘네 문화가 원래 이런 건가? 되게 이상하네. 이거.”

왠지 불쾌하게 느껴지는 웃음소리에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하지만 굳이 저들과 마찰을 일으킬 마음이 없었다.

이곳은 마드리드 남서쪽의 톨레도 인근.

잠깐 탈환한 곳이긴 해도 몬스터가 우글거리는 적진이었으니까.

한데, 문득 누군가의 목소리가 림일국의 지척에서 들려왔다.

“미개한 놈들이로군.”

“히엑? 어, 언제 오셨어요? 기척도 안 느껴졌는데.”

“이 몸이 너에게 들키는 게 이상한 거다. 그러니 신경 쓰지 말도록.”

“아……. 예.”

뭔가 내용이 좀 이상했지만, 림일국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에게 말을 건 사람이 바로 엔세데스였기 때문이었다.

“근데 저쪽에 계시지 않으셨습니까?”

화룡왕은 저 멀리 앉아서 술이나 퍼마시고 있었다.

분명 방금까지 그랬는데, 어느새 지척까지 다가와 있다니.

도무지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알 거 없고. 통역이 필요한 것 같은 시점이로군. 내가 좀 도와주지.”

“갑자기 통역이요?”

“저놈들의 말이 궁금하지 않나?”

“어……. 그렇긴 하네요?”

“그럼 즐거운 대화 나누라고.”

턱.

피식 미소를 지은 엔세데스는 림일국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았다.

그러자 놀랍게도 스페인 헌터들의 말이 귀에 쏙쏙 들어오는 게 아닌가.

지금까지는 알아들을 수 없는 소음에 불과했는데,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내게 무기를 휘두른 이유가 뭐지?”

“뭐야? 이 녀석 에스파냐어를 할 줄 알잖아. 그런데 왜 지금까지 못 알아듣는 척했어?”

질문을 던지자 환도로 공격했던 헌터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반문했다.

이토록 자연스러운 자국어가 동양의 조막만 한 청년의 입에서 흘러나올 줄은 몰랐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놀란 것도 잠시, 그자는 오른손을 들어 보이더니 가까이 다가와 꽤 친근하게 말을 걸어왔다.

“자네가 밟고 있던 게 우리 개인 물품이었어. 게다가 시야를 가리기까지 했지.”

생각해 보니, 이상이 없나 싶어서 돌아보던 차에 무심코 밟은 무언가가 있었다.

기관총 포대의 모래주머니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작은 가방을 모아 둔 거였다니.

순간적으로 림일국의 얼굴이 빨개졌다.

헌터들만 데리고 적진 깊숙이 침투해 들어온 상황인데, 기관총 포대 따위를 설치할 리가 없지 않은가.

이곳을 사수할 것도 아니고.

“아……. 미안하네.”

림일국은 자신의 실수를 깨닫자마자 곧바로 사과를 전했다.

그러자 상대 또한 겸연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니, 우리도 과도한 반응이었어. 그 점은 사과하지.”

“그래.”

악수까지 하며 서로의 오해를 푼 두 사람은 각자 자기 위치로 이동했다.

스페인 헌터는 진형으로 쏙 들어갔고, 림일국은 역장 점검을 계속한 것이다.

그런데 문득 아까 자신이 올라섰던 기관총 포대 아니, 가방 더미가 눈에 들어왔다.

혹여나 문제가 생길까 싶어서 저기로는 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기왕 시작한 점검은 제대로 끝마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무심코 그 옆을 지나치려는데, 불현듯 이상한 장면이 포착되었다.

가방의 터진 옆구리에서 모래가 쏟아져 나와 있는 게 아닌가.

림일국은 발끝으로 그것을 슬쩍 밀어 보았다.

그러자 그 아래쪽에서 수십 개의 모래주머니가 모습을 드러냈다.

가방처럼 생긴 건 하나뿐이었고, 그마저도 내부에 모래가 가득 들어 있었다.

“이런 썩어질 개간나 새끼가 어디 후라이를 까?”

녀석이 거짓부렁을 지껄였다는 사실을 알아챈 림일국은 불같이 화를 내며 돌아섰다.

그러자 비릿한 미소를 짓는 놈의 얼굴이 보였다.

“오냐. 오늘 너 죽고 나 죽자.”

림일국은 스페인 헌터들이 살벌하게 쳐다보고 있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발걸음을 옮겼다.

“쯧쯧! 쪽팔릴 짓은 안 하는 게 좋을 텐데? 촌놈 친구.”

“크크크! 눈이 째져서 앞이 보이긴 해?”

명백한 인종 차별 발언이었지만, 림일국은 의미를 명확히 알아듣지 못했다.

오랫동안 고립 생활을 한 탓이었다.

하지만 그 이면에 깔린 비웃음과 조롱을 느끼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한데, 림일국이 스페인 헌터들의 지척까지 다가선 바로 그 순간이었다.

촤학!

저 멀리 떨어져 있던 역장이 엄청난 속도로 다가오더니, 스페인 헌터들을 관통하고 지나갔다.

그러고는 정확히 림일국의 발치에서 딱 멈췄다.

역장이 사라지자 스페인 헌터들은 마기에 고스란히 노출되었다.

“으어억! 이게 뭐야. 콜록! 콜록!”

“야, 이 노란 원숭이 놈아! 이거 어떻게 했어? 당장 원래대로 돌려 놔!”

난데없는 상황에 놈들은 당황한 표정으로 마구 달려들었다.

헌터들은 마기 속에서도 오랜 기간 버틸 수 있지만, 그건 상당한 고통을 감내한 결과였다.

특히나 이곳은 성장한 대성체 미궁이 깔린 오염 지대 한복판이 아니던가.

아직 블라드 유진과 루시아의 공략이 끝나지 않았기에, 마기의 지독함은 상상을 초월했다.

게다가 전혀 대비하지 못한 상태였기에, 피해는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다.

사레가 들린 헌터들은 연속으로 기침을 쏟아 냈다.

아마 저런다고 죽지는 않을 테지만, 문제는 단순히 마기 노출로 끝나지 않았다.

저들은 아무런 보급도 없이 오염 지대에 내던져진 거나 다름없었다.

아군 인식에서 배제한 이상, 역장 안으로 들어올 수가 없었으니까.

시간이 흐를수록 굶주림과 추위와도 싸워야 할 터였다.

림일국은 그런 스페인 헌터들을 향해서 통렬하게 소리쳤다.

“여긴 내 구역이야! 내가 만든 내 세상이야. 이 새끼들아.”

물론 복수극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이윽고 굉음과 함께 목표로 한 대성체 미궁이 무너지기 시작했으니까.

“너 이 자식 두고 보자!”

마기에서 해방된 헌터들은 몬스터 웨이브를 저지하기 위해서 엉겁결에 진군을 개시했다.

“두고 보자는 사람치고 무서운 놈 없다더라.”

림일국은 그런 스페인 헌터들을 한껏 비웃으며 느긋하게 전투를 지켜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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