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얄 블러드-184화 (185/226)

9화

―주인!

“오랜만이군. 내 기척을 느끼고 찾아온 건가?”

―웅.

유진의 품에 안긴 흑발 소녀의 정체는 개성 전선을 지키고 있던 레니였다.

꽤 오랫동안 떨어져 있었음에도 그녀와의 연결은 여전히 끈끈했다.

레니는 평소에 별로 말이 없는 편이었지만, 오늘은 재잘재잘 잘도 떠들어 댔다.

한국에 혼자 남겨져서 꽤 외로웠던 모양이었다.

이러다가 전선에서 있었던 일을 전부 풀어낼 기세라, 그는 적당한 시점에서 딱 끊었다.

“이제 혼자 있을 필요 없어. 스페인으로 갈 거니까.”

―스페인?

“림일국이 도착하는 대로 떠날 예정이다.”

―루시아를 보러 가는 거야?

“응.”

―동생 좋아. 무조건 갈래.

어째서 관계가 이리되었는지는 몰라도, 뱀파이어의 관점에서 별로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블라드 유진도 생긴 건 20대 초반이지만, 수천 년을 살아오지 않았던가.

그는 레니를 옆에 앉히고, 태블릿 PC의 화면이 잘 보이도록 허공에 띄웠다.

뭔가를 틀어 주자, 한동안 시끄럽던 레니의 입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둘은 한동안 다양한 영상 콘텐츠를 즐기며 시간을 보냈다.

‘역시 인간들이 이런 건 참 잘해.’

* * *

진 연합체는 고작 하루가 지나기도 전에 림일국을 데려오고, 전세기까지 준비해 주었다.

역시 일 처리 하나는 한창 말 잘 듣던 헌터 협회 못지않았다.

수뇌부가 죄다 유진의 하수인이다 보니, 거의 한 몸처럼 움직이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시, 신발 벗어야 하나요?”

림일국은 바닥에 깔린 푹신한 카펫 앞에서 어쩔 줄을 모르고 서 있었다.

일반 여객기는 물론이고, 초호화 전세기를 처음 타 봤을 테니 얼 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하물며 수십 년을 고립 상태로 살아온 자가 아니었던가.

당황할 법도 하지만, 승무원들은 전혀 내색하지 않고 친절하게 안내해 주었다.

돈을 들이붓다시피 했는데, 이 정도 서비스는 당연한 거였다.

“어떤 놈이 시시한 장난을 쳤나 했네. 한데, 진짜 모르는 거였나?”

“바닥이 너무 부드러워 보여서 말이죠. 그냥 집에서처럼 벗어야 하는 줄 알았습니다.”

“뭐, 그럴 수 있지. 그러고 보니, 억양 빼고는 한국말이 꽤 익숙해졌군.”

“뒤처지지 않으려고 열심히 연습했습니다. 하하!”

혈성쇄혼술로 정신 지배를 당한 하수인이라, 유진은 림일국의 심리를 정확히 알 수 있었다.

현대 문물을 단기간에 너무 많이 접하다 보니, 하루하루가 고난의 연속이었다.

이자뿐만 아니라, 북한에서 구조했던 사람들 모두가 그랬다.

아마 한국이 별천지처럼 느껴졌으리라.

피식 미소를 지은 그는 의자에 몸을 기대며 커피를 한 잔 주문했다.

그런데 문득 상당히 거슬리는 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꼬르륵.

블라드 유진은 어처구니없는 눈빛으로 림일국을 쳐다보았다.

“식사도 안 하고 왔나?”

“아, 예. 하도 시급한 일이라고 해서 쉬지 않고 달려왔습니다.”

“승무원 불러서 뭐라도 먹어. 눈치 보지 말고.”

어차피 전세기에 탄 사람이라고 해 봐야 넷뿐이었다.

타인의 시선 따위야 신경 쓸 필요조차 없었다.

그의 말뜻을 알아들은 모양인지, 림일국은 승무원에게 식사를 요구했다.

양이 생각보다 어마어마하게 많다는 게 문제였지만.

“그걸 다 먹게? 굉장한 대식가로군.”

복도를 가득 채운 카트 행렬에 와인을 마시던 엔세데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림일국의 먹성은 드래곤조차도 놀라게 한 모양이었다.

유진은 손을 팔랑팔랑 흔들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놔둬. 어차피 여기서 밥 먹을 사람은 쟤뿐이니까.”

“야, 나도 안주 필요하거든?”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아닌가?”

“그래도 풍미를 위해서는 꼭 필요한 게 있다고.”

“치즈나 몇 조각 주워 먹는 주제에.”

“와! 그런 의미에서 본좌에게 치즈 좀 갖다 줄 수 있겠나? 치즈가 들어간 제품이면, 아무거나 다 괜찮네.”

그와 티격태격하던 화룡왕은 승무원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자연스럽게 안주를 주문했다.

“금방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잘생긴 청년이 말을 걸자, 단아한 인상의 여승무원이 얼굴을 살짝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폴리모프한 엔세데스는 마치 CG처럼 생겼으니, 저런 반응이 나올 만도 했다.

“인간한테는 관심도 없으면서 괜히 방심(芳心) 흔들지 마라.”

“어험! 이런 것도 유희의 일환이니라. 이래라저래라하지 말도록.”

화룡왕의 뻔뻔한 대답에 블라드 유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가는 동안 심심하지 않도록 영화나 보려던 찰나였다.

―츄릅!

림일국이 게걸스럽게 음식을 먹어 치우는 것만큼 거슬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 보니, 레니가 큼지막한 롤리팝을 핥아 먹고 있었다.

“그건 어디서 얻었니?”

―저 동생들이 줬어. 원래는 안 예뻤는데, 이제 예뻐짐.

여기서 그녀가 말하는 동생들이란, 열심히 서빙 중인 승무원들을 뜻했다.

유진은 이번 여정이 쉽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왠지 레니가 조용한 태구처럼 느껴졌다.

‘못 본 사이에 애들이 좀 이상해졌네.’

전세기는 곧장 마드리드의 바라하스 국제 공항으로 날아갔다.

장장 13시간 30분이나 소요되는 장거리 비행이었지만, 지루한 것 빼고는 나름 괜찮았다.

림일국의 먹성 또한 초반에만 반짝했으니까.

착륙 직전에 본 스페인 중심부의 전경은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한창 확장 사업이 벌어질 때만 해도 마드리드는 활기를 띠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가 미궁 군체를 정화한 직후로 돌아간 상태였다.

블라드 유진이 확보했던 마드리드와 북동부의 땅만 남은 듯했다.

“심각하군.”

“전선이 거의 다 작살난 것 같은데? 이제 보니 한국하고 미국은 강군이었네.”

인간들에게 별 관심이 없던 엔세데스조차도 차이를 알 수 있을 만큼, 스페인군은 약해 보였다.

그렇다고 훈련이나 실전이 부족한 오합지졸은 아니었다.

저들 대부분은 프랑스 전선에서 활약한 임시 정부 출신이었으니까.

그저 성장한 미궁을 감당하기에 스페인 정부의 역량이 부족했을 뿐이었다.

나라를 빼앗겼다 다시 얻었으니, 재정이 불안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거기다 몬스터의 침공이 거세지면, 조금씩 무너질 수밖에.

“어서 오세요. 유진 님.”

공항에 내리자마자 일행을 반긴 건, 루시아와 스페인의 대통령 하비에르 마틴 사파테로였다.

전황이 좋지 않았지만, 두 사람의 표정은 밝은 편이었다.

그 유명한 블라드 유진이 입국했는데, 뭐가 문제겠냐는 듯한 반응이었다.

특히 하비에르 대통령은 경호원도 무시한 채 달려와 거의 절을 하듯 인사를 올렸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는 대충 손만 흔들어 주고 지나쳐, 루시아와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공항에는 상당한 인파가 있었으나, 가까이 다가올 수는 없었다.

소총을 든 대통령 경호원들이 출국장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역부족이었나 보군.”

“네, 저 혼자서는 도무지…….”

미궁 성장 사건은 전 세계적으로 인간들의 영토를 축소하는 결과를 낳았다.

당연히 스페인 또한 그런 흐름을 피해 갈 수가 없었다.

루시아라는 걸출한 인물이 있음에도 국력이 너무도 약했기 때문이었다.

미궁을 공략할 헌터들은 물론이고, 전선을 유지할 현대 무기 또한 극도로 부족했다.

게다가 더욱 심각한 문제까지 불거지고 말았다.

“교황청이 힐러 공급을 공식적으로 끊었습니다.”

“그건 처음 듣는 이야기인데, 왜 그런 거지?”

“블라드 유진 님의 힘으로 영토를 회복했다는 이유일 겁니다. 대외적인 명목은 힐러 부족이지만요.”

“치졸하군. 안드레아 교황이라면, 그럴 만해서 놀랍지는 않네.”

“계속 대화 요청을 하고 있긴 합니다만.”

“소용없겠지. 쓸데없으니 그만둬. 당분간 우리가 여기에 머무르는 수밖에 없겠군.”

“감사합니다. 유진 님.”

교황청 이야기를 하며 수심이 가득했던 루시아의 얼굴은 어느새 한 떨기 꽃처럼 활짝 피어 있었다.

세계 최고의 헌터가 함께하는데, 뭐가 두렵겠는가.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녀의 머릿속은 복잡하기만 했다.

유진이 언제고 스페인에 머무를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가장 효율 좋은 방편을 찾아보았습니다.”

“그래? 미리 준비해 뒀다니, 나쁘지 않군.”

“별로 자신은 없지만, 일단 마드리드 왕궁으로 가시죠.”

스페인 왕실이 몰살하며, 왕궁은 대통령이 사용하고 있었다.

이제는 대통령 관저라고 불러야 마땅하지만, 여전히 명칭은 왕궁이었다.

어쨌거나 일행은 수백 명의 호위에 둘러싸여 바라하스 국제 공항을 나섰다.

* * *

마드리드 왕궁으로 이동한 일행은 곧장 현안 회의에 들어갔다.

“다이애나에게 듣기로는 특별한 땅을 찾아다니신다던데 그게 사실인가요?”

“맞아.”

“그렇다면 저희는 얼마든지 토지를 내어 드릴 수 있습니다. 무슨 수를 쓰든 필요한 땅을 구해 드리지요.”

“영토 할양이라도 할 기세로군.”

“대상이 유진 님이라면, 못할 것도 없지요. 게다가 어차피 확장된 미궁에 빼앗길 땅 아닙니까?”

“마음에 드네. 그렇게 넓은 면적이 필요하지는 않을 거야. 좀 파헤쳐야 해서 다른 용도로는 못 쓴다는 게 문제지.”

“얼마든지 사용하셔도 괜찮습니다.”

루시아와 하비에르 대통령은 협상에 매우 적극적이었다.

사실 스페인은 잃을 게 없는 상황이라, 조건을 내걸 것도 없었다.

그냥 전선을 지키게만 해 줘도 감지덕지였으니까.

하지만 이후의 일을 생각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미궁을 정화해 주긴 할 건데 말이야. 군대 수준을 보니, 기껏 확보한 땅도 못 지키겠더군.”

“……정확하게 보셨습니다. 현재의 축소된 전선을 유지할 국방비마저도 부족한 실정입니다.”

“그럼 우리가 다시 돌아왔을 때, 영지가 없을 수도 있겠네.”

“아마도 그럴 가능성이 큽니다. 그래서 마련한 방안이 있긴 한데, 마음에 드실지는 모르겠습니다.”

“일단 풀어놔 봐.”

루시아가 물러나며 슬쩍 눈짓하자, 하비에르 대통령이 헛기침하며 지도를 펼쳤다.

작전의 개요는 간단했다.

포르투갈의 영토를 확보해서 팔아먹자는 꽤 획기적인 방식이었다.

세계 곳곳으로 빠진 포르투갈 자본을 빨아들여서 스페인군을 강화하는 식이었다.

이베리아반도 서쪽만 완전히 정화할 수 있다면, 포르투갈은 미궁의 위협에서 거의 벗어날 수 있었다.

스페인에 돈을 갖다 바칠 충분한 이유가 생기는 것이다.

“나쁘지 않긴 한데……. 고작 그 정도로 스페인군을 무장할 수 있겠나?”

“아마 지금보다는 훨씬 나아질 거로 예상합니다.”

“병사들에게 무기만 쥐여준다고 끝이 아니야. 뿔뿔이 흩어진 헌터들도 데리고 와야지. 분화한 미궁 방어는 병력만으로 절대 안 돼.”

“이게 확실한 방안이 되지는 않겠군요. 예산상 둘 중 하나가 미흡하거나, 이도 저도 아니게 될 확률이 높습니다.”

블라드 유진의 지적에 하비에르 대통령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작전을 준비하며 따져 봤을 때, 이미 루시아가 말한 바가 있었다.

이 정도 갖고는 턱도 없을 거라고 말이다.

한데, 극도로 침울해진 분위기를 뒤집어엎은 발언이 튀어나왔다.

바로 유진의 입에서 말이다.

“그럼 다 팔자고.”

“예?”

상당히 뜬금없는 말이라, 회의실에 모인 사람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이윽고 그는 하비에르가 펼쳐 둔 지도 위에 선을 쭉쭉 그었다.

거침없이 질주한 펜은 시커멓게 칠해진 오염 지대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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