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전화를 건 사람은 스페인으로 돌아간 루시아였다.
그녀는 미궁 성장 사건으로 인해 한창 전투를 벌이고 있을 터.
한가롭게 안부나 전하려고 전화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왠지 불길함을 느낀 유진은 얼른 통화 버튼을 눌러 보았다.
“어.”
―유진 님?
통화 버튼을 누르자마자 왠지 다급한 루시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말해.”
―미국은 좀 어떠신가요?
“개판이긴 한데, 얼추 안정되어 가고 있어.”
미 연합군이 거의 궤멸 상태라, 그가 해 줄 수 있는 건 그리 많지 않았다.
기껏 미궁을 정화해 봤자, 분화하는 대성체에 의하여 다시 빼앗길 게 뻔하니까.
전선은 뒤로 밀렸지만, 블라드 유진의 눈에는 꽤 안정적으로 보인 모양이었다.
사실 인간들이 땅을 얼마나 얻든 상관없었으니, 이런 반응이 나온 것이다.
―그럼 에스파냐에 와 주실 수 있나요?
“가는 거야 문제가 없는데, 그냥은 움직이지 않아.”
―물론 잘 알죠. 아주 확실한 계약 조건을 준비해 두고 있습니다.
“호오? 요즘 내 관심사를 아나 보군?”
―다이애나하고는 종종 연락하고 있거든요. 사실 오늘도 미리 알아보고 전화한 거예요.
문득 고개를 들자, 막사 입구에 다이애나 로즈가 서 있었다.
나가려다 말고 서서 그를 지켜본 이유는 루시아의 목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리라.
그녀는 싱긋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차피 연합군은 시간이 필요해요. 저와의 계약은 신경 쓰지 마시고, 뜻대로 하셔도 됩니다.”
“들었지?”
―네, 그럼 언제까지 오실 수 있으세요? 최대한 빠르면 좋을 것 같습니다.
녹턴을 타고 간다면, 이동 시간이야 얼마 걸리지 않을 터였다.
그러려면 태구는 미국에 놓고 가야 했다.
유령 군마의 등에 탈 수 있는 존재는 지금까지 레니뿐이었으니까.
“일단 알았어.”
―그럼 기다리고 있을게요.
뚝.
유진은 전화를 끊자마자 막사 입구로 발걸음을 옮겼다.
다이애나 로즈는 자연스럽게 그런 그를 뒤따랐다.
두 사람은 막사 앞에 나란히 서서 연합군 주둔지 안쪽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태구가 병사들과 어울려 놀고 있었다.
그렇게 영어 공부를 하기 싫어하더니만, 의외로 실전 대화에 거부감은 없는 듯했다.
아마도 병사들의 태도가 대단히 우호적이라서, 꽤 자신감이 붙은 모양이었다.
“그와아앙! 퉷!”
치이이익!
녀석은 병맥주를 통째로 입 속에 집어넣더니, 이내 완전히 녹은 유리 덩어리를 뱉어 냈다.
그 모습을 본 병사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태구가 유리를 엿가락처럼 늘여서 갖고 노는 퍼포먼스를 보여 주었기 때문이었다.
“와하하! 죽여주네. 나 이런 거 처음 봐!”
“이봐, 라바맨! 한 잔 더 하자고.”
급기야 살짝 술에 취한 병사들은 녀석과 어깨동무까지 하며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전선을 지키는 슈퍼히어로이자, 전우로 인식하는 모양이었다.
“친화력이 대단하네요. 저 정도로 잘 섞일 줄은 몰랐어요.”
“편견이 없다는 게 더 의외인데.”
“그러게요. 데뷔가 너무 화려해서 그런가?”
유진과 다이애나는 이 상황을 신기하게 쳐다보면서 대화를 나눴다.
하지만 언제까지 저러고 노는 걸 놔둘 수는 없었다.
태구에게 할 말이 있었던 휴식 중인 병사들에게 다가갔다.
두 사람이 접근하자, 조금 흥이 올랐던 저녁 식사 분위기는 금세 가라앉고 말았다.
아무래도 너무 거물이 나타나서 그런 느낌이었다.
“뭐임? 한창 좋았는데.”
블라드 유진을 발견한 태구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걸었다.
“멀리 갈 일이 생겼다.”
“나도 가야 함?”
“아니, 너는 여기서 다이애나를 돕는 편이 낫겠어. 당장 우리가 빠지면, 전선이 무너질 테니까.”
“용 형아도 가는 거임?”
“아마도 그럴 거야.”
“그래도 횽아들 없으면 의미가 없잖음.”
“잘 지내던데, 뭐.”
“그건 또 그럼. 형아보단 내가 사교성이 뛰어나지.”
장난스러운 녀석의 대답에 그의 한쪽 눈썹이 살짝 들렸으나, 뭐라고 하지는 않았다.
그게 사실이긴 했으니까.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아. 스페인 쪽 일만 해결하면, 다시 돌아올 거야.”
“알았음!”
태구가 수락하자, 다이애나 로즈의 얼굴이 밝아졌다.
녀석이 있다면 전선을 유지하는 것뿐만 아니라, 빼앗긴 땅 일부를 되찾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진척 속도는 엄청나게 느릴 테고, 태구가 그만한 힘을 써 줄지는 의문이었지만.
“안심하고 다녀오셔도 되겠네요.”
“그래. 수고해.”
“네, 마음 써 주셔서 고맙습니다.”
“…….”
유진은 꾸벅 인사하는 다이애나를 뒤로한 채, 곧장 엔세데스를 찾았다.
다소 전격적이지만, 이제 스페인으로 떠날 시간이었다.
* * *
블라드 유진은 곧장 스페인으로 날아가지 않았다.
태평양을 건너서 일단 한국에 들른 다음, 레니를 데리고 갈 요량이었다.
그런데 귀국하자마자 조낙범 변호사와 흑룡이 그를 찾았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대부님.”
“그러네. 사업은 잘돼 가나?”
“예! 전선이 점점 뚜렷해지면서, 경계 지역 시장도 활성화하기 시작했습니다. 미궁 성장 덕분에 몬스터의 수효가 많아져서 의외로 호황입니다.”
흑룡 정진수는 90도로 허리를 접으며 사업 현황을 보고했다.
하지만 고작 이런 일로 진 연합체의 수장이 서울로 올라올 필요는 없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눈치챈 그는 조낙범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무슨 일이지?”
“그게……. 분쟁이 생겼습니다.”
“분쟁? 한국에 진 연합체를 위협할만한 단체가 있나?”
“자잘한 조직은 존재하지만, 저희와 싸울 만큼 크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무슨 분쟁이 있을 수 있지?”
“정부 조직하고의 마찰입니다. 정확하게는 헌터 협회지요.”
“그래? 자세히 이야기해 봐.”
협회와 진 연합체간의 마찰은 유진의 관심을 끌기 충분한 주제였다.
목소리를 가다듬은 조낙범은 서류 가방에서 몇 장의 빳빳한 종이를 꺼냈다.
관측 장비의 화면을 그대로 촬영한 듯한 사진이었다.
“여기 작은 원이 보이십니까?”
조 변호사가 가리킨 곳은 오염 지대 한복판이었다.
원래라면 시커먼 마기의 구름으로 뒤덮여 있어야 하지만, 명확한 경계의 원이 존재했다.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에 블라드 유진은 눈을 가늘게 떴다.
“림일국의 능력인가 보군.”
“정확하십니다.”
“그자는 진 연합체에서 보호하고 있지 않나?”
“그렇습니다만, 최근 행보가 조금 바뀌었습니다. 계속 받기만 할 수는 없다며 저희를 돕겠다더군요.”
“그래서?”
“그분의 장기를 살려, 오염 지역 내에 쉼터를 만들었습니다. 거기서 보급품을 비롯한 각종 생존에 필요한 아이템을 팔고 있지요.”
“나름 괜찮은 아이디어로군. 근데 헌터 협회에서 뭐라 하던가?”
“가격이 너무 높고, 허가받지 않은 활동이라는 명목으로 제재를 시작했습니다.”
헌터 협회의 명분은 너무나도 허술하고 설득력이 없었다.
높은 가격이야 그렇다 쳐도 오염 지대의 노점상에 대체 무슨 허가란 말인가.
경계 지역 시장은 신고도 하지 않고 마구 세워지는 판국인데.
거기까지만 듣고도 그는 진 연합체가 뭘 요청하려는지 알 수 있었다.
“협회의 압력을 해소해 달라는 말이로군.”
“그렇습니다.”
“어려운 건 아닌데, 굳이 그럴 필요는 없어.”
“예?”
“어차피 림일국은 내가 데려갈 거거든.”
“아…….”
“하지만 협회에 경고 정도는 해 두지.”
“감사합니다.”
“둘은 그 녀석이나 내 앞에 데려와. 스페인으로 가는 전세기도 알아보고. 비용은 상관없어.”
“옙!”
조낙범의 말에 따르면, 최근 협회의 단속이 심해진 모양이었다.
헌터 조직들이 이끄는 경계 지역 시장에 외압이 개입하려는 움직임이 커졌다.
영토 팽창이 멈추고 팔아먹을 땅이 없어진 이후, 거의 즉시 벌어진 일이었다.
진 연합체에서는 정부가 다른 방식으로 조세 수입을 늘리려 한다고 파악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경계 지역 시장은 돈세탁과 탈세의 온상이 될 수밖에 없었으니까.
문제는 한국의 암흑가를 주름잡은 진 연합체가 유진의 휘하에 있다는 거였다.
사태를 파악한 그는 곧장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조지. 당장 튀어 오도록.”
미궁 전략부장은 호출한 지 고작 30분 만에 도착했다.
헌터 협회는 아마 미국으로 떠난 블라드 유진이 돌아오기를 오매불망 기다렸을 것이다.
그는 멈춰 버린 영토 확장을 가능케 할 원동력이었으니까.
“오, 오셨습니까? 그간 별고 없으셨는지요.”
“그래.”
“하하! 한데, 저는 무슨 일로 부르셨을까요?”
“요즘 좀 짜증 나는 이야기가 들리더라고.”
“예?”
“림일국 알지.”
“…….”
“손 떼.”
마지막 두 글자는 마치 낙인처럼 조지훈의 가슴에 박혀 들었다.
한국 헌터계에서 유진의 말은 곧 법이나 다름없었다.
아니, 미국조차도 설설 기는 판국에 무슨 깜냥이 있어서 그의 말을 거역하겠는가.
하지만 림일국의 마기 축출 능력은 굉장히 좋은 사업 거리였다.
그걸 잘만 활용한다면, 전선을 돌면서 엄청난 수익을 벌어들일 수 있을 것이다.
진 연합체와는 달리, 합법적으로 말이다.
그래서 그런지 조지훈의 입에서는 즉각 대답이 튀어나오지 않았다.
블라드 유진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자리를 비운 동안 간이 좀 커졌나? 정신 못 차리는군.”
“아, 아닙니다!”
“지금 획책하는 짓거리 다 취소해. 제대로 알아들은 거 맞아?”
“정확히 어디서 어디까지를 취소하라는 말씀이신지요.”
“역시 말귀를 못 알아듣네. 예전에는 안 하다가 갑자기 시작한 거 있잖아. 조세 수입 늘리려고.”
“예…….”
“개성 인근에서 왕창 벌었잖아? 그걸로 부족한가?”
“그, 그럴 리가요.”
물론 정부는 매년 막대한 자금을 지출하고 있었다.
전선을 유지하고 군 병력을 유지하는 데만 해도 많은 돈이 들었으니까.
최근에는 전선이 길어지면서 지출이 대폭 늘기도 했고.
아마 그래서 더더욱 국가사업이나 조세 수입에 열을 올리는지도 몰랐다.
왜 저렇게 혈안인지는 이해가 갔지만, 그렇다고 귀찮게 주변을 기웃거리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
“다른 방법을 쓰도록.”
“예, 알겠습니다.”
“가 봐.”
“그……. 조만간 방문해도 될는지요.”
“아니, 당분간 한국에 없을 거야. 다시 나갈 거거든.”
단호한 대답에 조지훈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물러났다.
그의 힘으로 말미암아 영토 확장을 재개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헛된 꿈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미궁 전략부장을 내보낸 블라드 유진은 집에서 조용히 시간을 보냈다.
정웅철이 관리를 잘한 모양인지, 사람이 살지 않음에도 저택은 매우 깨끗했다.
역시 진 연합체의 비인가 헌터들은 하수인이 아님에도 굉장히 충성스러웠다.
흡족한 미소를 지은 그는 커피를 한 잔 내리고는 오랜만에 선베드에 누웠다.
따사로운 햇살이 내리쬐는 정원, 고요한 숲속에서 불어오는 바람.
루시아의 요청만 아니면, 그냥 몇 주쯤 이렇게 여유를 만끽하고 싶었다.
‘내 일생에서 가장 만족스러운 때를 꼽으라면, 지금이려나?’
암울했던 중세 암흑기를 떠올린 유진은 피식 미소를 지으며 태블릿 PC를 세웠다.
최근 그는 OTT를 통해서 다양한 영상 콘텐츠를 즐기고 있었다.
어떨 때는 책보다 나은 점이 있어서 요즘은 이 맛에 푹 빠진 상태였다.
그런데 문득 그런 블라드 유진의 몸 위로 시커먼 무언가가 불쑥 나타났다.
쉬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