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폭뢰장.”
“이름은 괜찮군.”
“번역하면 얼추 그런 이름일 거야. 그러고 보니, 너 지금 장갑 안 끼고 있지 않나?”
블라드 유진은 혈거인의 심장이라는 엄심갑과 카모플라쥬 롱코트를 착용하고 있었다.
롱코트의 방어력은 미약하지만, 혈거인의 심장은 충격 흡수에 공격 무효화 옵션까지 달린 양품이었다.
그러나 그 외의 방어구는 딱히 걸치지 않았다.
엄심갑 또한 가슴만 보호해 주기 때문에, 다른 부위의 방어구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물론 그의 눈에 차지 않는 물건은 거들떠보지도 않을 테지만.
“그렇긴 한데…….”
“그럼 이건 매우 괜찮은 선택이지.”
“일단 성능이 어떤지부터 들어 보는 게 좋겠네. 혹시 뭐 특별한 기능이 있나?”
“그냥 이걸로 해.”
큐우우우웅!
엔세데스는 대뜸 팔을 옆으로 쭉 뻗었다.
그러자 허공에 시커먼 음영이 나타나더니, 그곳에서 하늘색 장갑 한 켤레가 모습을 드러냈다.
“성능을 알려 달라니까, 이게 무슨 짓이지?”
유진은 불쾌한 표정으로 허공의 음영을 향해 턱짓했다.
아무래도 영기가 한정되어 있다 보니, 좀 더 신중하게 선택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화룡왕은 자신만만한 얼굴이었다.
“아, 글쎄 일단 한번 보시라니까? 츄라이. 츄라이.”
왠지 장사치 같은 말투는 덤이었다.
<아이템 정보>
명칭 : 폭뢰장(爆雷掌)
등급 : EX
내구도 : EX
효과 : 뇌전 저항 30%, 반사 확률 20%, 반사 시 폭뢰의 구 생성, 매우 높은 방어력
실버 드래곤 카이류시아드가 제작한 마법 장갑. 공격 반사에 성공하면, 주변을 감싸는 뇌전 방어막이 생성됨.
아이템 정보를 확인한 블라드 유진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딱 좋은 옵션의 아이템인데다가, 디자인도 꽤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폭뢰장을 착용해 보았다.
차르르륵!
처음에는 다소 큰 것 같던 장갑이 저절로 줄어들며 손에 맞게 변했다.
게다가 예전에 쓰던 이무기의 수투보다 훨씬 착용감이 좋았다.
“거 봐. 괜찮지?”
“안목 좋군.”
“어차피 지금 가진 영기로는 이 정도가 최대야. 애초에 더 강력한 아티팩트는 꺼낼 수도 없다고.”
엔세데스의 말에 동의한 유진은 슬쩍 잉글우드 숲을 돌아보았다.
영기 추출을 시도한 모양인지, 바닥 이곳저곳이 심각하게 파헤쳐져 있었다.
“대략 얼마나 진행됐지?”
“지난번에 봐 뒀던 곳은 다 돌았어. 여긴 마지막이야.”
“그런데도 고작 아이템 하나를 소환하는 정도밖에 안 되나?”
“워낙 영기의 순도가 낮아서 어쩔 수 없었어. 그래도 미국은 이곳저곳에 꽤 퍼져 있더군. 게다가 중요한 정보가 있지.”
“그게 뭔데?”
“여긴 엘칸 차원보다 영기 회복 속도가 빨라. 희한하지 않아?”
“그렇다면…….”
“기간이 도래할 때마다 한 바퀴씩 돌아 주면, 화수분처럼 계속 모을 수 있다는 말씀. 물론 영원하지는 않겠지만.”
“땅을 다시 돌려주지 말고, 영구 임대나 아예 매입하는 쪽이 낫다는 건가.”
“바로 그거야. 물론 꼭 뉴욕주일 필요는 없어. 여긴 너무 띄엄띄엄 있어서 이동 시간이 좀 필요하거든.”
“더 좋은 장소를 찾으면, 거길 아예 사자는 거로군.”
“맞아. 이해가 빠르네.”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풍부한 영기 공급원이 있다면, 화룡왕은 지구에서 좀 더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을 테니까.
폭뢰장보다 훨씬 좋은 아이템을 제공하는 것도 가능하리라.
그러고 영기가 남으면 마나 집적 마법진인지 뭔지를 만들어도 되고.
“그럼 너도 따라나서. 버지니아주에 가면, 쓸 만한 땅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일단 여기부터 정리하고. 아깝잖아.”
“그래. 그러든지.”
엔세데스가 잉글우드의 영기를 추출하는 동안, 유진과 태구는 저택에 머무르며 휴식을 취했다.
며칠 뒤, 미국 헌터 협회에 방문했던 다이애나 로즈가 돌아올 때까지 평화로운 일상이 이어졌다.
물론 항상 조용한 것만은 아니었다.
콰앙!
“으악! 이 멍청한 놈아! 파라고 했지. 터트리면 어떡해?”
“어차피 결과는 똑같지 않음?”
“그럼 영기가 훼손되잖아! 내가 이 나이 먹고 괜히 삽질하는 줄 알아?”
“아, 쏘리.”
오늘도 잉글우드 숲속에서는 화룡왕과 태구가 아웅다웅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럴 때마다 주민 신고가 들어가서 경찰관들이 저택에 찾아오곤 했다.
물론 혈성쇄혼술을 시전한 유진에 의해서 곧장 돌아가긴 했지만.
‘무진장 시끄럽고 손 많이 가는 놈들인 건 확실하네.’
꼭 필요하지만 않았어도, 그의 성격상 둘 다 내쫓아 버렸을 것만 같았다.
콰아앙!
숲속에서 재차 폭음이 들려오자, 블라드 유진은 책을 내려놓고 이어플러그를 꽂았다.
이럴 때는 예민한 뱀파이어의 감각이 저주스러울 정도였다.
“조용히 좀 살자. 이 멍청이들아.”
저놈들과 함께 있자니, 왠지 바보 바이러스에 감염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 * *
잉글우드의 영지를 정리한 뒤, 일행은 곧장 버지니아의 남부 전선으로 날아갔다.
전황이 좋지 않다더니, 로아노크 전선은 그야말로 초토화되어 있었다.
연합군은 동쪽의 도시 린치버그까지 무려 60km나 후퇴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극렬했던 전투 탓에 헌터들의 수효는 극단적으로 줄어든 상태.
사령관들이 우수수 죽어 지휘권도 정립이 안되었는데, 몬스터 웨이브는 또 시작될 조짐을 보였다.
이대로는 방어는커녕 전선을 물리는 것도 제대로 못 하고 궤멸할 지경이었다.
합참 의장이 자리를 비우자마자 터진 사건이라, 연합군은 그야말로 혼란에 빠져 있었다.
“일단은 저것들을 막는 게 우선이겠군.”
“네…….”
다이애나 로즈는 참담한 심정을 감추지 못했지만, 지금은 감상에 젖어 있을 때가 아니었다.
혹시나 해서 세워 둔 예비 전선은 린치버그가 마지막이었다.
여기가 뚫리면 리치먼드는 그대로 날아가는 거였고, 곧장 워싱턴 D.C.까지 쭉 밀릴 터.
이번에는 정말로 급했던 모양인지, 그녀는 먼저 태구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도와줄 수 있어?”
“아, 다이애나 부탁이면 쌉가능임.”
“고마워.”
짧게 감사를 표한 다이애나는 곧바로 전선으로 달려갔다.
린치버그 장벽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위태로웠다.
쿠웅! 쿠우우웅!
연신 굉음이 들려오는 걸 보면, 벽 너머의 몬스터들이 온 힘을 다해 부닥치는 모양이었다.
“형아, 나 들어감.”
“오늘따라 되게 행동이 빠르다? 다이애나의 부탁 때문인가.”
“그런 거도 있는데, 이제 나 슈퍼히어로임. 이미지 관리해야 함.”
“허…….”
뜻밖의 대답에 유진은 헛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뉴욕주에 있을 때, 태구는 시도 때도 없이 자신에 관한 뉴스를 검색했다.
눈에 띄는 활약상 때문인지, 미국 언론은 녀석을 주목하고 있었다.
오하이오주 전선을 지나서 털리도까지 쭉쭉 서진할 때도 태구의 모습만은 아주 잘 보였으니까.
녀석은 하루하루 높아져 가는 인기에 취한 상태였다.
뉴스 기사와 댓글을 읽으려고, 그렇게 싫어하던 영어 공부도 열심히 할 만큼.
“저놈 저거 적응 되게 빠르네.”
엔세데스는 고작 두 달만에 딴판으로 변한 태구를 신기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화룡왕은 그새 연합군 보급 창고를 털어서 온갖 술을 잔뜩 가지고 왔다.
메이커스 마크라는 버번위스키의 뚜껑을 따고 향을 음미하더니, 이내 병째로 벌컥벌컥 들이켰다.
“크으! 이거 좋구나.”
“그런데 넌 어째 변화가 없군.”
“수만 년을 산 존재에게 변화라니. 예끼! 큰일 날 소릴!”
엔세데스는 유진을 향해서 대뜸 호통을 쳤다.
마치 조선 시대 선비 같은 느낌이었다.
어쨌거나 이번에도 전투에 참여하지는 않으려는 모양이었다.
가볍게 혀를 찬 그는 화룡왕을 지나쳐서 녹턴의 등에 올라탔다.
영 전황이 좋지 않아서 일찌감치 들어갈 작정이었다.
“가자.”
“푸르르! 푸르!”
블라드 유진의 명령이 떨어지자, 녹턴은 코에서 화염을 뿜어내며 투레질했다.
전장의 분위기가 녀석을 흥분시키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그래. 스킬을 얻었지. 오늘 한번 시험해 보자꾸나.”
두두두두두!
그의 의지에 응답하기라도 하듯, 녹턴은 무서운 기세로 허공을 질주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녀석의 전신이 시뻘겋게 변하더니, 평소보다 세 배는 빠른 속도로 쏘아졌다.
쿠화아아아!
두 번째 스킬, 화염 질주가 발동된 것이다.
녹턴의 신형을 따라서 공중에 붉은 선이 쫙 그어지고, 이내 좌우로 불길이 확 번져 나왔다.
잉걸불 발자국이 광범위에 적용되면서 전선을 순식간에 뒤덮었다.
“크아아아!”
“크뤠에엑!”
순간적으로 마기의 구름이 걷히며 장벽 너머의 상황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몬스터들은 한창 벽면에 몸통 박치기를 해 대고 있었다.
그런데 대뜸 불비가 쏟아지자, 놈들은 괴성을 지르며 마구 흩어졌다.
말발굽 모양의 낙인과 함께 화염은 들불처럼 퍼졌다.
화르르륵!
마치 수천 발의 네이팜 탄을 한꺼번에 터트린 것처럼 장벽 너머는 화염지옥이 되었다.
“성능은 나쁘지 않네. 일주일에 한 번밖에 쓰지 못한다는 게 아쉽지만.”
재사용 대기 시간이 더럽게 긴 것만 빼면, 매우 괜찮은 위력이었다.
그것도 피의 권능을 전혀 소모하지 않는 동반자 스킬이라, 더욱 마음에 드는 것 같았다.
한쪽 장벽을 불길로 싹 쓸어버린 유진은 곧장 북쪽으로 나아가며 요격 작전에 돌입했다.
덩치가 크고 등급이 높아 보이는 놈만 골라서 처죽이고 다니는 것이다.
이런 식의 활동으로도 전선에는 엄청난 도움이 되고 있었다.
연합군이 상대하기 힘든 몬스터가 사라지니, 헌터가 없어도 버틸 만하게 상황이 바뀌었으니까.
두두두두두!
유령 군마가 허공을 질주할 때마다 장벽 위의 병사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봤어? 저거 봤냐고! 블라드 유진이야!”
“사, 살았다!”
“믿고 있었다고! 제엔장!”
* * *
블라드 유진과 다이애나 로즈, 태구의 투입으로 인해 전선은 활기를 되찾았다.
잔여 병력이 워낙 적어서 로아노크까지 진격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린치버그를 지킬 수는 있었다.
사실상 궤멸할 뻔한 연합군에 산소 호흡기를 달아 놓은 듯한 모양새였다.
그만큼 이번 전투의 피해는 너무나도 컸다.
“아마 한동안은 진격하기 힘들 거예요. 지원군이 올 때까지는 공략을 자제해야 할 것 같습니다.”
다이애나 로즈는 침통한 목소리로 현황을 브리핑했다.
유진이 생각하기에도 이 상태에서 미궁을 정화하는 건 무리일 것 같았다.
그는 미궁이 터진 뒤의 몬스터 웨이브까지 책임 져 줄 마음이 전혀 없었으니까.
아니, 그러면 블라드 유진 혼자서 다 하는 격이 아닌가.
떠먹여 주는 것에도 한계가 있는 법.
시간이 좀 지체되더라도 연합군이 자력으로 일어서길 기다리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네 판단대로 하자고. 바쁠 건 없으니까.”
“감사합니다.”
다이애나는 살짝 처연하게 웃으며 유진의 막사에서 나가려 했다.
아마도 부상자들을 돌보려는 모양이었다.
사실 이번 패전이 뼈아플 만도 했다.
이제야 반격의 불씨가 당겨졌는데, 역량이 부족해서 전선을 밀지 못하다니.
띠디디딕!
다이애나 로즈가 막사 입구를 지나치려 할 때, 불현듯 휴대 전화가 울렸다.
스마트폰 화면을 내려다본 블라드 유진은 조금 의아한 눈빛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바쁠 텐데 무슨 일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