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얄 블러드-181화 (182/226)

6화

전선에서 오랫동안 활약한 만큼, 다이애나 로즈는 미국 내에 다양한 인맥이 있었다.

특히 연합군, 정계, 헌터계는 그녀의 말에 거의 껌뻑 죽는 상황이었다.

고작 신임 최고 사령관의 항변은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설사 마크 밀러의 말이 옳다고 해도 아무 상관도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그녀가 전선에 복귀한다는데, 뭐가 문제겠는가.

게다가 다이애나는 블라드 유진과의 계약을 직접 따낸 당사자였다.

연합군 최고 사령관 정도야 얼마든지 갈아 치워 줄 용의가 있었다.

“거의 실각이라고 하는 걸 보면, 아직 경질되지는 않은 모양이로군.”

“일단은 발령 대기 상태예요. 아마 버지니아 전선에서 합참 의장이 이쪽으로 올 겁니다.”

합동 참모 본부는 피츠버그 소재였지만, 의장은 남부 전선을 전전하고 있었다.

거기도 개판 오 분 전이라, 병력을 이끌고 지원 나간 것이다.

그러다 보니 북부 전선의 전력이 기존의 영토도 소화하지 못할 만큼 줄어들고 말았다.

“이런 상황인데도 욕심을 부리다니, 정말 이해할 수가 없네요.”

다이애나 로즈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고는 아직 시동을 끄지 않은 헬리콥터를 가리켰다.

“더 진행하는 건 의미가 없을 것 같아요. 당분간 안정화할 때까지는 남부 전선으로 가시죠.”

“흠…….”

그녀의 제안은 당연한 거였다.

미국 내 모든 전선에 통용되도록 계약했으니까.

하지만 유진은 별로 내키지 않는 듯했다.

“왜 그러세요? 혹시 다른 일이 있다면…….”

“특별히 할 일은 없어. 널 보니 영기를 제멋대로 써 버린 녀석이 떠올라서 말이야.”

“아! 죄송해요. 그때는 워낙 상황이 좋지 않아서, 무슨 물건인지도 모르고 사용했네요.”

“일단 아이템을 꺼낸 순간 영기는 소모돼. 네가 대자연의 비약을 마시지 않았어도 결과는 똑같았을 거야.”

“그런 거였나요?”

“그 녀석이 일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한 번 살펴봐야겠어.”

“알겠습니다. 그럼 잉글우드로 가시죠. 제가 모시겠습니다.”

투두두두두!

다섯 대의 헬리콥터는 이내 동쪽으로 쭉쭉 날아가기 시작했다.

모두가 탑승하기에는 기체가 너무 좁아서 태구는 혼자 다른 헬기에 타야만 했다.

“아, 왜 나만 혼자임?”

* * *

뉴욕 인근을 떠돌며 영기 수집에 열을 올리던 엔세데스는 잉글우드 저택으로 돌아온 상태였다.

“흐흐! 이 정도면 아이템 하나는 충분히 소환할 수 있는 양이로군. 영기 추출이 이토록 어렵다니, 대체 땅덩이가 왜 이래?”

의외로 영지는 지구 곳곳에 다수 존재했다.

하지만 엘칸 차원과는 달리, 너무 단단하게 뭉쳐 있어서 정제에 난항을 겪었다.

레드 드래곤의 수장인 엔세데스 조차도 쉽사리 풀어내지 못할 만큼 말이다.

유진이 자리를 비운 두 달간 수집한 영기는 고작 아이템 하나를 꺼낼 수준이었다.

“이번에는 뭘 꺼내 볼까?”

아공간에는 온갖 다양한 아이템이 들어 있었다.

화룡왕이 직접 제작한 것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엘칸 차원에서 수집한 물건이었다.

그중에는 엔세데스에게 이로운 아이템이 즐비할 터였다.

“대기 중의 마나가 너무 적어서 활동하기 영 불편했지. 이참에 마나 집적 마법진이나 만들어? 그러려면 마정석하고 미스릴이 필요한데.”

현재까지 모은 영기로는 둘 중 하나밖에 소환할 수가 없었다.

나머지 재료도 지구에는 없는 것이라, 부지런히 영기를 모아야만 했다.

화룡왕은 곧장 저택을 나서더니, 잉글우드 숲속을 거닐었다.

애초에 이곳을 추천한 건 꽤 괜찮은 수준의 영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주변을 돌면서 영기의 양과 위치를 측정하던 엔세데스는 적당한 장소에 자리를 잡았다.

츠츠츠츠츠!

그러고는 마나를 끌어 올려 자연과의 소통을 개시했다.

영지를 살살 달래서 에너지의 결속을 느슨하게 만들고, 영기를 쭉 뽑아내는 방식.

미세한 마나 콘트롤과 반신에 달하는 격이 없다면, 시도조차 하지 못할 고난도의 기술이었다.

하지만 화룡왕은 마치 숨 쉬듯이 자연스럽게 영기를 추출해 냈다.

물론 속도는 그리 빠르지 않았지만.

“으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한참을 움직이지 않던 엔세데스가 움찔거리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러더니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이 정도면 휴대용 마법진 하나는 만들 수 있겠어. 확장은 나중에 하고 일단 불편한 것부터 해소하자.”

충분한 양의 영기를 모았는지, 화룡왕은 곧장 다른 작업에 착수하려 했다.

이제 아공간을 열어서 마정석과 미스릴을 꺼낼 작정이었다.

그런데 문득 그런 엔세데스의 감각에 이상한 기척이 감지되었다.

스슥.

“뭐지? 여기에 사람이 있을 리는 없는데.”

화룡왕은 이 일대에 미약한 결계를 펼쳐 둔 상태였다.

외부인이 멋모르고 접근하면, 자연스럽게 숲 밖으로 인도하는 형식이었다.

하지만 웬일인지, 꽤 큼직한 덩치의 인형이 잉글우드를 가로질러서 이쪽으로 직진해 오고 있었다.

미간을 좁힌 화룡왕은 아공간 개방을 멈춘 채, 은근히 마나를 끌어 올렸다.

지구로 온 이후부터 마나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당장 죽을 정도는 아니었다.

대기 중의 희박한 마나 농도에 관해서는 미리 대비해 두고 있었으니까.

마나 집적 마법진을 제작하려는 것도 그 일환이었다.

인간 따위를 쫓아내는 것쯤이야 간단한 마법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엔세데스는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흔들리는 수풀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쏙!

그런데 수림을 뚫고 튀어나온 건 예상과는 전혀 다른 얼굴이었다.

“형아! 용 형아!”

밝은 목소리로 아는 체하는 검붉은 몸뚱이의 정체는 태구였다.

녀석은 함박웃음을 짓는 이모티콘을 띄우며 양손을 흔들어 댔다.

마법을 시전하려던 화룡왕은 김빠진 표정으로 손을 내렸다.

“에이, 뭔가 했네. 근데 네가 왜 거기서 나와?”

“오면 안 됨? 여기도 우리 집이라며.”

“아니, 그건 그렇긴 한데……. 지금쯤 전선에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다른 데로 옮기면서 집에 잠깐 들른 거임.”

“아, 그런 거였어? 난 또 날 감시하러 온 줄……. 잠깐만, 이 녀석이 여기에 있다는 건?”

피식 미소를 지으며 태구를 반기던 엔세데스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뒷덜미를 타고 흐르는 기괴한 감각에 소름이 돋았기 때문이었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홱 돌리자, 나무에 기댄 은발의 미남자가 눈에 딱 들어왔다.

태구에게 정신이 팔린 사이, 블라드 유진의 접근을 눈치채지 못한 것이다.

화룡왕은 자못 당황한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어, 언제 왔나?”

“조금 전.”

“그래? 전선은 잘 진압됐고?”

“물론이지. 네 일은 어때?”

“내 일? 무슨 일? 난 그냥 놀고먹는 식충이인데.”

“영기 말이다. 음. 이거…….”

“뭐, 왜?”

그가 눈을 가늘게 뜨고 중얼거리자, 엔세데스는 짐짓 태연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유진은 그런 화룡왕을 향해서 의심스러운 듯한 눈빛을 보냈다.

“왠지 딴 짓거리하다 들킨 것 같은 느낌인데?”

“그럴 리가 있나.”

“영기 얼마나 모았어? 내게 제공할 아이템 목록이나 좀 볼까?”

“그, 그건…….”

“두 달 정도 모았으면, 충분할 텐데?”

“조금만 더 뒤로 미루면 안 될까?”

“뭘?”

“갑자기 만들고 싶은 게 생겨서 말이야. 이걸 제작하면, 앞으로 굉장한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야. 영기 추출 속도가 늘어날지도 모르지.”

엔세데스의 답변은 청산유수였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처음과 똑같았다.

아무래도 화룡왕의 말을 전혀 믿지 않는 것 같았다.

“모르지?”

“그래. 가능성이 있다. 이거야.”

“그 물건을 만들면, 영기 추출 속도가 얼마나 늘어나는데?”

“늘어나긴 해.”

“그러니까 얼마나?”

“정확하지는 않아.”

“‘얼마나’라고 물었다만.”

“하, 한 1%?”

이제껏 엔세데스는 거짓말을 전혀 하지 않았다.

놀고먹는 식충이, 만들고 싶은 게 생긴 사실, 영기 추출 속도가 늘어난다는 것까지.

거짓은 단 하나도 없었다.

그저 확실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았을 뿐.

하나 이렇게까지 꼬치꼬치 캐묻는다면, 진실을 말할 수밖에 없었다.

고작 1%의 속도를 올리자고 지금껏 얻은 영기를 왕창 소모해야 한다니.

이런 멍청한 짓거리가 어디 있겠는가.

“닥치고 아이템 목록이나 내놔.”

“그래도 늘어나긴 하잖아. 일단 마법진부터 만드는 게 어때?”

“그게 뭔지는 몰라도 너에게만 이로운 거겠지. 잔말 말고 계약대로 해.”

“젠장할.”

결국에 화룡왕은 눈물을 머금고 서류를 보여 줘야만 했다.

기억을 토대로 작성한 아공간 적재 물품 목록이었다.

그래도 일은 착실하게 잘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이름만 봐서는 뭔지 알 수가 없군. 설명을 따로 넣어 줘야겠어.”

“여기 마무리만 하고 금방 만들어 줄게. 들어가서 쉬고 있어.”

“아니, 난 지금 당장 원해.”

“…….”

마지막까지 꼼수를 쓰려던 엔세데스는 곧장 저택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유진이 모든 걸 꿰뚫어 보고 단호하게 대처했기 때문이었다.

반나절이 지난 후, 그는 어마어마한 분량의 아이템 목록을 받아 볼 수 있었다.

“형아, 형아도 이거 다 외우는 거임?”

“그럴 리가. 근데 좀 많긴 하네.”

글자가 빽빽하게 적힌 서류 뭉치를 살펴보던 태구는 얼굴에 빙글빙글 돌아가는 두 개의 눈알을 띄웠다.

그만큼 아공간의 적재 물품 종류는 기절할 정도로 많았다.

재료 아이템을 빼고도 수만 종에 가까웠으니, 쓸 만한 걸 고르는 데만 해도 한세월이었다.

결국에 그는 엔세데스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다.

“뭐가 좋지?”

“어떤 종류를 원하는데?”

“무기는 필요 없고, 방어구가 조금 부실하긴 해. 이외에도 부가적인 기능이 있었으면 좋겠군.”

“예를 들면?”

“내가 보유한 아이템 중에 카이넬의 신안이라는 게 있어.”

블라드 유진은 엘칸 차원의 신전에서 얻었던 신기한 아이템을 소개해 주었다.

그러자 화룡왕은 고개를 끄덕이며 서류를 뒤적거렸다.

“지금은 이게 딱 좋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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