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연합군 최고 사령관의 막사로 들어온 사람은 다이애나 로즈였다.
그녀는 평소와 달리 얼굴이 차갑게 굳어 있었다.
아무래도 마크 밀러와 부관이 하는 말을 얼추 들었으리라.
사령관은 뜨끔한 모양이었지만, 금방 표정을 정리하고 아무렇지 않은 듯 인사를 건넸다.
“하하! 반갑습니다. 여기까진 어쩐 일이십니까?”
“결단을 내릴 때가 된 것 같아서요. 그런데 이미 사태 파악은 하고 계신 듯하군요.”
“갑자기 결단이라면 어떤 종류의?”
“당연히 역량이 되지 않는 만큼의 땅을 버리고, 적당한 곳에서 장벽을 건설하자는 거지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입술에 몇 차례 경련을 일으킨 마크 밀러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자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다이애나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녀의 반응은 더욱 냉랭할 뿐이었다.
“그건 사령관님의 아집이죠. 아무리 민간인을 갈아 넣어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예요.”
“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도움만 있다면요?”
“좋아요. 뭘 어떻게 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거죠?”
“블라드 유진에게 공략 진행을 늦춰 달라고 하십시오. 그리고 전선의 쾌거를 홍보하는 영상을 찍는 겁니다.”
“헌터들을 모으기 위해서요?”
“이기고 있다는 이야기가 돌면, 한 입 하려는 자들이 몰려들겠지요.”
사령관의 대답에 다이애나 로즈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뭐 이런 미친 족속이 다 있냐는 듯한 눈빛이었다.
하지만 마크 밀러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제가 하는 말이 이상하게 들릴 수는 있습니다. 이만한 희생을 치러야 하는 일인가 싶지요. 하지만 저곳에는 우리 미국인들의 미래가 걸려 있습니다. 반드시 확보해야 해요!”
사령관이 가리킨 곳은 오하이오주 지도의 한복판이었다.
그곳에는 유진과 태구가 휩쓸고 지나간 경로가 비교적 정확하게 표시되어 있었다.
하지만 저 지역을 모두 집어삼키는 건 무리였다.
전선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다이애나 로즈가 판단하기에는 그랬다.
지금은 예전의 전선을 회복하는 것만 해도 연합군이 몸살을 앓을 지경이었다.
현실을 직시하지 않으면, 이곳저곳에서 문제가 터져 나올 것이다.
그녀는 전선 한쪽이 무너졌을 때의 결과를 매우 잘 알고 있었다.
과거에도 방어선에 구멍이 뚫리는 바람에 속절없이 후퇴할 수밖에 없지 않았던가.
“싫은데요.”
“힘을 보태 주셔서……. 예?”
마크 밀러는 다이애나에 관해서 꽤 잘 알고 있었다.
전선에 헌신적인 그녀는 항상 연합군의 선택을 존중해 왔다.
다소 무리가 있는 작전이라도 언제나 힘을 보태 준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 튀어나온 대답은 거절도 아닌, ‘싫다’였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말 그대로예요. 유진 님께 부탁하는 건 물론이고, 홍보 영상을 찍는 것도 싫어요. 안 할 겁니다.”
“이 작전에 우리 미국의 미래가 걸려 있는데도요?”
“훗! 당신의 미래겠죠. 타인의 목숨을 담보로 감성 팔지 마세요. 역겨우니까.”
“그게 무슨…….”
“더불어 민간인을 동원하려는 기미가 조금이라도 보이면, 곧바로 언론에 폭로해 버릴 거예요.”
“제아무리 당신이라고 해도 군의 기밀을 빼낼 수는 없을 겁니다.”
“이 사안은 공익 제보라, 아무 상관 없어요. 민간인 동원이 언제부터 합법이었나요?”
“…….”
다이애나 로즈가 쉴 새 없이 몰아붙이자, 결국에 마크 밀러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더 이상 반박할 내용이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전선의 장미꽃이라 불리며 명망 높은 그녀였기에, 함부로 구속할 수도 없었다.
물론 S급 헌터인 다이애나를 제압하는 것부터가 넘을 수 없는 큰 산이었다.
“인정에 호소하는 건 끝났습니다. 그러려면 최소한 정의는 갖추셨어야죠.”
그녀는 마지막 한 마디를 남기고 막사를 나가 버렸다.
마크 밀러는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지도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어떻게 할까요?”
부관이 조심스럽게 묻자, 사령관은 이를 부득부득 갈며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포기……. 해야겠군.”
전선 재조정이 이루어진 순간, 역시나 언론은 마크 밀러의 자질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최고 사령관에서 경질되는 일은 없었다.
막대한 명성만 얻지 못했을 뿐이지, 대충 업혀 가는 일은 성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마크의 내심을 알아챘던 다이애나 로즈는 사안을 이대로 묻어 두지 않으려 했다.
분노에 가득 찬 그녀는 다른 방식으로 싸움을 준비한 것이다.
본인이 지닌 강력한 무기를 꺼내 듦으로써.
* * *
[대규모 미궁의 최종 보스 ‘파괴승 혈불(血佛)’ 처치!]
[보상이 주어집니다.]
“흠…….”
털리도의 미궁 군체를 박살 낸 블라드 유진은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예상했던 대로 군체의 내부는 보스들의 무한 경쟁 상태였다.
더불어 미궁은 대성체에서 한 단계 진화하고야 말았다.
새로운 대규모 미궁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보상은 평범한 대성체급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가 보상을 탐탁지 않게 쳐다보자, 태구가 어깨 너머로 고개를 삐죽 내밀며 중얼거렸다.
“왜 그럼?”
“일은 일대로 하고, 별반 이득은 못 봤으니까. 적어도 괜찮은 아이템 하나쯤은 나올 줄 알았는데.”
“그래도 그 정도면 좋은 거 아님?”
“그렇긴 하지.”
대규모급 최종 보스를 쓰러뜨리면서 얻은 건 SS급 동반자 강화석이었다.
재한국 러시아 대사가 보상으로 주었던 것과 완벽하게 똑같은 물건.
일반적인 대성체급에서 나왔다면 환영할 만했으나, 대규모급이 줄 만한 아이템은 아니었다.
물론 녹턴이 승급하면, 좋은 점이 있을 터였다.
비행 속도가 빨라지고 전투력도 증대될 테니까.
하지만 아쉬움이 남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일단 생겼으니 쓰긴 해야겠군. 녹턴.”
“이히힝!”
자신에게 강화석을 사용할 거라는 사실을 아는 모양인지, 녹턴은 평소보다 기분 좋은 울음소리를 냈다.
기묘한 색으로 반짝이는 조약돌을 녀석의 몸에 대자, 오색찬란한 빛줄기가 터져 나왔다.
번―쩍! 츠츠츠츠츠!
[동반자 ‘부케팔로스의 영령(녹턴)’이 승급했습니다.]
[동반자에게 새로운 능력이 생성되었습니다.]
<동반자 정보>
명칭 : 부케팔로스의 영령(녹턴)
등급 : SS+
효과 : 비행, 화염 방사, 은신
스킬 : 잉걸불 발자국
스킬 : 화염 질주
녹턴이 불길에 휩싸인 채로 허공을 질주함. 평소의 세 배 속도. 화염 범위 내에 잉걸불 발자국 효과 시전. 일주일 1회 사용 한정.
‘나쁘지 않네.’
홀로그램을 확인한 그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녹턴이 얻은 화염 질주라는 스킬이 꽤 괜찮아 보였기 때문이었다.
잉걸불 발자국의 효과 범위가 그토록 넓다면, 나름 쓸 만한 위력일 테니까.
게다가 유진도 얻은 게 아예 없지는 않았다.
“이제 2,000레벨인가.”
수많은 미궁을 깡그리 밀어 버리던 와중에 그의 레벨은 3이나 올랐다.
이는 대성체급 미궁이 성장하면서 더 많은 경험치를 제공했기 때문이었다.
특히나 방금 잡은 파괴승 혈불 덕분에 딱 2천 레벨을 찍을 수 있게 되었다.
뭐 그렇다고 크나큰 변화가 있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상징적인 의미는 있었다.
EX급 최대치의 3분의 1지점을 돌파하게 된 거니까.
쿠구구구구!
이윽고 미궁이 소멸하자, 블라드 유진과 태구는 도시 중앙에 불쑥 나타났다.
털리도에는 을씨년스러운 분위기가 흘렀다.
사람이 아무도 없는 데다가, 몬스터만 가득한 도시가 된 탓이었다.
이곳은 이제 연합군 병력이 알아서 처리하게 놔두고, 다음 목표로 향할 차례였다.
“디트로이트로 가야겠군.”
미궁 군체는 희한하게도 인구가 밀집된 곳에 잘 생겼다.
마드리드 때도 그랬고, 클리블랜드나 털리도 또한 마찬가지였다.
웨스트 버지니아의 웨인 국유림 등, 숲만 가득한 곳에는 군체가 발생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미궁 생성이 인구 비례로 생긴다는 의심을 지울 수가 없었다.
실제 미궁 위치에 관한 연구도 그런 식의 결론을 여러 번 낸 바가 있었다.
물론 항상 그렇지는 않았지만.
털리도에서 디트로이트까지는 대략 80km 남짓.
중간에 대성체급 몇이 있긴 했지만, 크게 신경 쓸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느긋하게 움직일 마음은 전혀 없었다.
마크 밀러에게 엿을 먹여 주기로 한 이상, 하려면 제대로 할 작정이었다.
그런데 도시 북쪽으로 진출하던 무렵, 굉음을 내는 무언가가 빠르게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투두두두두!
“헬리콥터?”
털리도 시내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북상하던 다섯 기의 헬리콥터는 금방 유진과 태구를 발견했다.
미궁 군체가 정화되면서 마기가 빠른 속도로 물러났기 때문이었다.
이내 헬리콥터들은 그의 주변 평지에 하나둘 내려앉기 시작했다.
덜컹!
슬라이드 문을 열면서 내린 사람은 다이애나 로즈였다.
이미 헬기가 접근해 올 때부터 그녀의 기척을 느끼고 있었기에, 블라드 유진의 표정은 담담했다.
물론 살짝 놀랐어도 별다른 기색 변화는 없었겠지만.
다이애나는 환하게 웃으며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
“어떠셨어요?”
“의외로 보상이 다 별로더군. 대부분 쓸모없는 것들만 주더라고.”
“유진 님에게만 그런 거겠죠. 공략하면서 얻으신 걸 시장에 내놓으면, 서로 사겠다고 아우성칠걸요?”
보름 만에 만나서 그런지 그녀는 살짝 격하게 반가움을 표했다.
유진의 손을 붙잡은 채 놓아줄 줄을 몰랐다.
이윽고 다이애나 로즈는 그의 뒤에 몸을 숨긴 태구에게도 인사를 건넸다.
“안녕? 태구.”
녀석은 가려질 리가 없는데도 잔뜩 웅크린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왜 그러고 있는지 금방 눈치챈 그녀는 싱긋 미소 지으며 태구를 다독였다.
“오늘은 숙제 검사 안 할 테니까, 나와도 돼.”
“진짜임?”
“응. 약속하고 다르게 불시에 들이닥친 거잖아.”
“다이애나는 상식적임. 우리 형아는 비상식의 아이콘인데.”
그제야 녀석은 얼굴에 인사하는 이모티콘을 띄우며 양손을 번쩍 쳐들었다.
블라드 유진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자 황급히 내리긴 했지만.
“그나저나 갑자기 무슨 일이지? 한창 바쁠 텐데, 여기까지 오고 말이야.”
“전선은 당연히 눈코 뜰 새 없죠. 어마어마한 땅을 한꺼번에 확보해야 하는데요.”
“작전은 잘 되어 가나?”
“아뇨. 문제가 있어서 토벌 작업이 거의 멈췄어요. 전선을 새로 설정해야 할 정도죠.”
“심각하군. 충분히 따라올 수 있다고 들었는데.”
“여러 가지 요인 때문에, 늦어질 수밖에 없었어요. 사실 유진 님이 이렇게 빠르실 줄은 예상치 못했거든요.”
다이애나는 다양한 데이터를 토대로 유진의 진격 속도를 계산한 바 있었다.
하지만 그건 EX급이 되기 전 한국과 스페인에서의 기록이었다.
지금은 훨씬 빠른 게 당연한 일이었다.
“마크 밀러는 어쩌고 있지?”
“거의 실각한 상태예요.”
“고작 땅 좀 확보하지 못했다고 나가떨어지지는 않을 텐데. 부임한 지 얼마 안 되었다고 하지 않았나?”
“맞아요. 하지만 결정적인 실책을 범했죠.”
“그게 뭔데?”
그의 질문에 그녀는 잠깐 숨을 골랐다.
그러더니 블라드 유진의 말투를 흉내 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절 건드렸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