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얄 블러드-179화 (180/226)

4화

고작 2주 남짓한 기간 동안, 블라드 유진이 주파한 거리는 160km에 달했다.

피츠버그에서 클리블랜드까지 일직선으로 꿰뚫어 버린 것이다.

마크 밀러가 언급했던 애슈터뷸라는 들르지도 않았다.

그뿐이랴, 그는 클리블랜드의 미궁 군체를 정화한 것도 모자라 쭉쭉 서진(西進)해 들어갔다.

오늘 그가 도착한 곳은 털리도(Toledo).

디트로이트에서 남서쪽으로 80km 정도 떨어진 공업 도시였다.

이곳에는 클리블랜드보다 더욱 거대한 미궁 군체가 있었다.

태구는 옹기종기 모인 대성체 미궁들을 가리키며 고개를 갸웃했다.

“형아, 저거 좀 이상함. 내 미궁처럼 바뀌려고 하고 있음.”

“어디서 본 듯한 느낌인데……. 마드리드였나?”

마드리드의 군체는 미궁의 거리가 극도로 가까워져서, 내부가 서로 연결된 형태였다.

털리도 또한 그와 비슷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었다.

스페인에서 본 것과 다른 점은 전부 성장한 대성체 미궁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거였다.

조만간 뭔가 사건이 터져도 터질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근데 왜 안 감?”

“영 못 따라오는군.”

“아, 쟤들? 큰소리 떵떵 치더니, 빌빌대고 있네.”

유진과 태구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는 연합군이 차근차근 채우고 있었다.

처음에는 기세 좋게 달려들어서 몬스터들을 정리하더니, 어느 순간부터 진군은 지지부진해졌다.

연합군의 역량을 넘어서는 일이었으니까.

지금껏 쭉쭉 밀리기만 하던 전선을 300km나 올렸는데, 무너지지 않을 수는 없었다.

사실상 이만큼 버틴 것만 해도 대단한 거였다.

물론 다이애나 로즈가 없었다면, 클리블랜드까지도 따라오지 못했겠지만.

“조금 기다려 주자고. 고작 며칠 사이에 저게 어떻게 되지는 않겠지.”

“난 상관없음.”

“오랜만에 다이애나 만나러 가든지.”

“우움…….”

그가 저 멀리 보이는 연합군을 향해서 고갯짓하자, 녀석은 작게 신음을 흘렸다.

항상 잘 챙겨 주는 그녀가 좋긴 했지만, 만날 때마다 숙제를 내줬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크레파스를 몽당연필처럼 쥔 태구는 빈칸 채우기를 하고 있었으니까.

“숙제 다 못 해서 못 감.”

“못 한 게 아니라, 안 한 거겠지.”

“형아가 자꾸 방해했잖음!”

“충분한 시간을 준 것 같은데. 지금도 그렇고.”

“화, 화장실이 어디 있더라?”

“마기 먹고 사는 놈이 배설을? 농담이 지나치군.”

“……형아, 너무함.”

슬그머니 자리를 뜨려던 녀석은 시무룩한 이모티콘을 띄우며 주저앉았다.

대기하는 동안 꼼짝없이 다이애나가 내준 숙제를 해야 할 판이었다.

하지만 태구는 운을 타고난 몬스터였다.

쿠구구구!

문득 털리도에서 기묘한 소음이 들려오는 게 아닌가.

묵직한 파장이 몰려와 두 사람이 있던 자리를 휩쓸고 지나갔다.

“몬가……. 몬가! 시작되고 있음!”

“숙제 같은 걸 할 때가 아니네. 일어나.”

“아싸! 개꿀.”

피식 미소를 지은 유진은 털리도의 미궁 군체로 접근해 보았다.

굉음은 미궁 군체의 중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원흉을 알 수는 없었으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건 확실했다.

뿜어져 나오는 마기의 질이 확 달라졌으니까.

“더 맛있는 게 나오고 있음. 근데 이거……. 대성체급이 아닌데?”

“확실히 한두 단계 높아 보이는군.”

둘은 마기에 민감한 존재라, 미궁의 수준을 어느 정도 꿰뚫어 볼 수 있었다.

털리도의 군체는 대규모급이었다.

드라코 도무스나 실렌스 테라처럼 특별한 이름이 붙을 만큼 말이다.

“저런 식으로 대규모 미궁이 만들어지는 건가. 그럼 네가 있던 곳은 어땠지?”

“모과?”

“너도 저렇게 군체를 만들어 경쟁했냐고 묻는 거다.”

“아뉘. 나는 처음부터 대규모급이었음.”

“그럼 군체에 관해서 따로 아는 건 없나?”

“아, 저거? 그냥 서열 결정전 하는 거임.”

재차 묻자 태구는 그제야 제대로 된 정보를 내놓았다.

피의 권능을 일으킨 그는 녀석의 전신을 강하게 옭아매었다.

블라드 유진의 격이 월등히 높았기에, 이런 식의 압박이 가능했다.

“으으으! 아, 알았음. 제대로 말함. 진짜! 레알!”

“말장난하지 말고 전부 토해 내.”

“우리도 마족들처럼 서열이 있음. 남의 마기를 빼앗아서 성장하면, 귀족이 될 수도 있으니까.”

마족은 몬스터보다 평균적인 전투력이 높았다.

하지만 등급에 따라서는 우열이 바뀌기도 했다.

태구만 보더라도 최상급 마족보다 강한 녀석이었으니까.

몬스터도 마족의 서열 결정전 시기에 맞물려 비슷한 행위를 하는 모양이었다.

“물론 몬스터는 좀 더 시도 때도 없음.”

“마족은 안 그렇단 말인가?”

“걔들은 마계 원로회의 제어를 받기 때문에, 평시에는 못 싸움. 하지만 우린 상관없음.”

“딱히 지금이 서열 결정전 시기는 아니란 뜻이군?”

“아뉘. 거의 임박한 거로 알고 있음. 근데 정확한 날짜까지는 모름. 확정 나기 전에 손절 쳐서.”

“그래?”

마계가 어떻게 굴러가는지 잘 모르는 상태에서 태구의 존재는 꽤 귀중했다.

녀석을 통해서 놈들의 전략을 예측할 수도 있을 테니까.

어쨌든 지금은 대규모로 성장 중인 미궁 군체에 집중할 때였다.

‘갑자기 레니가 생각나네.’

마드리드의 미궁 군체에서 만난 레니는 일반적인 몬스터와 사뭇 달랐다.

마기를 다루기는 하는데, 그렇게 적대적이진 않았다.

마치 태구처럼 말이다.

‘마계의 체제에 반대하는 놈들이 의외로 많을지도 모르겠군.’

어딜 가나 반골은 존재하는 법이었다.

뱀파이어 사회에도 그런 이들은 꽤 있었으니까.

잠깐 발걸음을 멈췄던 블라드 유진은 이내 미궁 군체 속으로 몸을 던졌다.

* * *

“또? 또 확장되었다고?”

“예, 그렇습니다. 위성 사진을 대조해 보니, 대성체급 미궁 다섯 개가 정화된 거로 확인됩니다.”

“하, 하루 만에?”

“정확하게는 20시간 걸렸습니다.”

“정말이지 돌아 버리겠군.”

마크 밀러는 얼마 남지 않은 머리칼을 쥐어뜯으며 고개를 푹 숙였다.

손으로 직접 뽑지 않더라도 탈모가 몇 배는 가속화될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만큼 마크 사령관이 받는 스트레스는 엄청났다.

하루하루 넘을 수 없는 4차원의 벽을 대면하고 있었으니까.

처음에는 호기롭게 달려들었지만, 연합군의 한계는 명확했다.

다이애나 로즈의 능력 또한 무한이 아닌 데다가, 이토록 숨 가쁘게 진격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거기다 털리도는 미지의 영역이었다.

이미 블라드 유진과 태구는 예전 전선을 넘어선 지 오래였다.

마크 밀러뿐만 아니라, 모든 연합군 사령관이 밟아 보지 못한 땅.

벌써 거기까지 진격했다니, 눈으로 직접 보고도 믿기지 않았다.

“너무 가볍게 생각했다.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

“경계 지역까지 장벽을 건설하는 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중요하지 않은 지역은 과감하게 포기하는 것이…….”

“포기?”

부관의 의견에 마크 사령관은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이전에 건설되었던 전초 기지나 장벽 등에 의해서, 지역의 중요도에는 분명한 차이가 존재했다.

오하이오주는 자원이 풍부하고 각종 제조업 공장이 지어진 데다가, 농경지로서의 활용도도 높았다.

미궁을 정화하는 족족 각종 이익을 볼 수 있는 땅이었다.

전초 기지가 없다고 그런 곳들을 포기한다?

“있을 수 없는 일이지.”

연합군의 신임 최고 사령관으로서 언론의 뭇매를 맞을 수도 있었다.

블라드 유진이라는 엄청난 인재와 함께하면서, 왜 멀쩡한 토지를 버려야 하냐고 말이다.

“하지만 이미 한계입니다. 벌써 웨이브가 흐르는 곳까지 생길 정도니까요.”

“지원은 언제 온다던가?”

“버지니아 쪽에도 상황이 터져서 금방은 어려울 거랍니다.”

“잠깐만! 국가에 여력이 없다면, 다른 방법을 모색하면 되지 않겠나.”

“그렇습니다만. 뭘 어떻게 하시려고…….”

“자경단을 조직하는 거야. 몬스터로부터 시민을 지킬 지원자들을 받는 거지.”

“예?”

“어차피 군수 물자는 충분해. 병력과 헌터가 모자랄 뿐.”

마크 밀러 사령관은 어디론가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전선 연합군은 헌터들과 주 방위군, 연방군 등 다양한 출신의 인원들이 합쳐진 군대였다.

PMC 활동을 하던 자들까지도 끌어모아서 조직한 상황인데, 민간인 좀 받는다고 뭐가 다르겠는가.

이것이 바로 사령관의 묘안이었다.

“……알겠네. 그렇게 홍보하고 군복 입혀서 곧바로 이쪽으로 보내.”

뚝.

누군가와 통화를 마친 마크 밀러는 걱정스러운 눈빛의 부관을 쳐다보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왜 그렇게 보나?”

“민간인을 훈련도 없이 전선에 밀어 넣었다간 지금보다 더욱 큰 문제가 생길 겁니다.”

“뭐가 문제지? 총기류 경험이 있는 자들로만 받으면 될 게 아닌가.”

“전투에 나가면 곧바로 패닉에 빠져 버릴 겁니다. 연합군 병사들도 엄청난 훈련을 거치고 투입되지 않습니까?”

전쟁에 나간 자들은 정신적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괜히 실전 투입된 군인들이 PTSD를 겪는 게 아니었다.

게다가 전선은 인세의 생지옥이라 불리는 곳이었다.

압도적 무력을 지닌 존재와의 전투가 무한히 이어지는 장소.

속성 훈련만 받은 민간인이 버틸 수는 없을 터였다.

“정화된 지역을 최대한 많이 얻으려면, 그만한 희생을 치르는 수밖에 없어. 블라드 유진, 그 사람도 말하지 않았나. 희생이 있을 거라고.”

“…….”

마크 밀러의 주장에 부관은 입을 다물고 말았다.

실제로 유진이 그런 말을 한 건 맞았다.

하지만 사령관이 해석한 것처럼 희생을 강요하자는 의미는 아니었다.

그저 두려워하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자는 뜻이었을 뿐.

그러나 부관은 도무지 반박할 수가 없었다.

마크의 뒤틀린 신념이 너무도 확고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아마 무슨 수를 써도 설득할 수 없으리라.

사령관은 반짝이는 눈빛으로 지도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지원 병력이 생길 때까지만 버티면 돼. 그동안 포상금을 걸어서 헌터들을 더 끌어모아도 되고 말이야.”

“승전보를 듣는다면, 모일 자들이 있긴 할 겁니다.”

“그러려면 우리에게 꼭 필요한 한 명이 있지.”

“예. 전선의 장미꽃이라면, 두 가지 일에 모두 도움을 주실 수 있겠죠. 상징적인 분이시니까요.”

“얼른 가서 데려오게. 이야기를 좀 나눠 봐야겠어.”

“알겠습니다.”

민간인 동원은 동의하지 못하지만, 다이애나 로즈를 홍보 목적으로 이용하는 건 찬성이었다.

예전에도 그녀는 그런 식으로 자주 활동을 해 왔으니까.

다이애나는 전선에 애착이 깊으니, 아마 거절하지는 않을 터였다.

이런 기분은 근 2주 만이었다.

모든 게 다 해결된 것 같은 산뜻한 느낌.

입꼬리를 말아 올린 마크 밀러는 곧장 담뱃불을 붙였다.

중독성 강한 연기가 폐부를 휩쓸고 지나가자, 몸이 정화되는 듯했다.

마크 밀러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서 있는 부관을 향해서 손을 팔랑팔랑 휘저었다.

얼른 명령이나 수행하라는 의미였다.

그런데 바로 그때, 막사 입구 쪽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굳이 찾으실 필요 없어요. 이미 와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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