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형아. 레알 이건 아닌 듯.”
“시끄러워. 벌이다.”
마그마 테러를 저질러 놓고 나갔던 태구는 금방 유진에게 붙잡혀 왔다.
녀석은 다이애나 로즈와 함께 책상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태구에게 주어진 벌칙은 바로 영어 공부였다.
‘정신 연령이 애니까, 그에 걸맞은 벌을 줘야지.’
인간 대부분은 머릿속에 뭔가를 집어넣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특히 어릴수록 더 놀고 싶은 법이었다.
물론 몇몇 비상한 놈들은 제외하고 말이다.
태구도 평범한 범주에서 그리 벗어나지 않는 듯했다.
새로운 언어 습득에 난항을 겪는 걸 보면 말이다.
“뭘 어디서부터 가르쳐야 할지 모르겠네요. 교육은 처음이라…….”
“잘할 생각하지 말고 그냥 주입식으로 해. 고통스러운 게 목적이니까.”
“미안해요. 태구 씨, 이건 벌칙이라.”
시무룩한 이모티콘을 얼굴에 띄운 녀석은 다이애나가 준 단어 목록을 외우기 시작했다.
이따금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말이다.
흡족한 표정으로 녀석을 바라보던 유진은 막사 입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살짝 얼빠진 표정의 중년 남자가 서 있었다.
배가 많이 나온 거로 봐서 헌터는 아닌 듯했다.
“날 찾아온 이유는?”
“아, 통성명부터 해야겠군요. 연합군 최고 사령관 마크 밀러입니다.”
그는 자연스럽게 간이 의자 쪽으로 걸어가며 고갯짓했다.
마크 사령관은 고개를 끄덕이며 착석했다.
“정말 고맙습니다. 이렇게 전격적으로 참전하실 줄은 상상도 못 했군요. 아마 지원이 없었다면, 큰 피해를 봤을 겁니다.”
“인사는 이쪽에 해. 그녀와의 계약으로 돕게 된 거니.”
“물론 다이애나 로즈 님께도 감사를 표해야지요.”
마크 밀러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눈인사를 건넸다.
태구를 감독하던 다이애나는 괜찮다며 손을 들어 보였다.
“그나저나 다른 대답만 들은 것 같군. 난 이유를 물었는데.”
“첫 번째 목적은 감사 인사고, 두 번째는 논의를 위해섭니다.”
“무슨 논의?”
“그야 앞으로의 계획을……. 전선에 꽤 오랫동안 머무르신다고 들었는데요.”
“그렇긴 하지. 근데 계획이라고 해 봐야 별거 없어. 그냥 쭉 밀고 들어갈 테니, 장벽이나 잘 만들면 돼.”
“하지만 여길 좀 보십시오. 진격 방향은 애슈터뷸라까지 올라가서 클리블랜드로 들어가는 식이 되어야 합니다.”
“왜지?”
“전초 기지가 있던 장소니까요. 아마 훨씬 방어가 수월할…….”
“됐다.”
블라드 유진은 지도를 손으로 짚어 가며 열정적으로 설명하던 마크 사령관의 말을 끊었다.
동선이 너무 길고 비효율적이었으니까.
하잘것없는 전력인 연합군이나 펼칠 법한 작전이었다.
“난 그럴 생각 없어.”
“후일은 생각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이러면 방어에 가담한 연합군의 희생만 커질 겁니다.”
“뭐가 문제지?”
“예?”
“지금까지 꾸역꾸역 버텼을 때의 희생이 훨씬 클 거 같은데. 다소 손실이 있더라도 한방에 끝을 내는 게 좋지 않나?”
그의 무감정한 대답에 마크 사령관은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듣고 보니 블라드 유진의 말이 구구절절 옳았기 때문이었다.
마른침을 꿀꺽 삼킨 마크 밀러는 진중한 눈빛으로 질문했다.
“제가 뭘 준비하면 되겠습니까?”
“장벽 블록이나 가져와. 뒤는 책임 안 져 주니까.”
“자원은 충분합니다. 밀 수 없으니, 궁지에 몰린 것처럼 보였을 뿐이죠.”
마크는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답했다.
우회로를 생각했던 조금 전과는 사뭇 다른 태도였다.
아무래도 그가 사령관의 자존심을 건드린 모양이었다.
“그래. 두고 보자고.”
새하얗게 웃은 유진은 손을 털레털레 흔들었다.
할 말 끝났으니, 가라는 의미였다.
입을 꾹 다물며 불편한 심기를 살짝 내비친 마크 밀러는 곧장 발길을 돌렸다.
‘호승심이라……. 재밌네.’
떠나는 사령관의 뒷모습을 해먹에 누워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는 피식 미소를 지었다.
반면에 막사를 나서서 일정 거리 이상 떨어진 마크는 마치 불도그처럼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저자 혼자서 다 해 먹었다는 소리를 들을 수는 없지. 안 그런가?”
“물론입니다. 어떻게 할까요?”
“별동대 구성해서 기회를 봐. 탈환 작전으로 간다.”
“예.”
부관들과 논의를 마친 마크 밀러는 블라드 유진의 막사를 힐끔 돌아보았다.
저 허여멀건 녀석이 전공을 독차지하게 둘 수는 없다는 듯이 말이다.
* * *
유진의 작전은 다음 날 곧바로 시작되었다.
버틀러로 지원을 나갔던 헌터들이 되돌아오기도 전이었다.
그가 태구와 함께 장벽을 넘으려 하자, 곧바로 연합군의 제지가 들어왔다.
이미 승인을 받은 사안이라 일부러 모습을 감추지 않았는데, 시작부터 일이 꼬이려 했다.
물론 블라드 유진은 인간들이 앞길을 막든 말든 조금도 개의치 않았지만.
“어어? 멈추지 않으면, 발포합니다.”
“해 봐.”
그는 자신을 겨눈 총구를 무시하며 무너진 장벽을 건너 버렸다.
막무가내로 밀고 들어가는 데도 연합군은 막을 수가 없었다.
전날 엄청난 활약을 펼쳤던 태구가 유진과 함께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네가 도움이 되기도 하는구나.”
“나 이제 인기 많음. 형아보다 훨씬 좋을걸?”
“네까짓 게?”
“나는 이미지가 친근함. 형아는 음……. 싸가지 없다던데.”
“대체 뭘 본 거냐?”
“인터넷에 형아 글 많음.”
“그것도 금지해야 하나.”
“대체 왜 그럼? 나 어제 영어 공부 열심히 했음.”
“앞으로 매일 시킬 거야.”
“아, 그건 노 인정. 차라리 인터넷 금지가 낫겠네.”
블라드 유진은 태구와 티격태격하며 짙은 마기의 구름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거침없는 발언을 해 대는 녀석 덕분에, 그는 최근 신선한 자극을 자주 받고 있었다.
솔직히 어떤 정신 나간 자가 유진에게 장난을 걸어 대겠는가.
겁도 없이.
만약 있다면 엔세데스뿐일 터였다.
화룡왕은 술만 퍼마시면 의외로 조용한 놈이라, 사실상 까불까불하는 건 태구뿐이었다.
얼굴에 희한한 이모티콘을 띄우는 게 나름 귀여워서 그는 녀석을 꽤 많이 봐주었다.
방금처럼 농담도 나눌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한편, 같은 시각 연합군 진지에는 비상이 걸렸다.
VIP가 난데없이 장벽을 넘었기 때문이었다.
장벽을 지키던 병사들은 곧장 사령부에 무전을 보냈다.
치직! 치지직!
“블라드 유진과 라바맨(Lavaman)이 오염 지대로 진입했습니다.”
―막았어야지! 그걸 그냥 통과시켜?
“힘으로 밀고 들어온 통에……. 죄송합니다.”
―젠장, 아직 준비도 안 됐는데. 금방 갈 테니, 관측 장비 전개해.
“예, 알겠습니다.”
무전기로 분노한 상관의 목소리가 들리자, 연합군은 군기가 바짝 든 채로 황급히 움직였다.
철컥! 드드드득!
어제의 공격으로 반파되었던 관측 장비가 다시금 장벽 위에 세워졌다.
이것은 오염 지대의 내부를 2.5km까지 꿰뚫어 볼 수 있는 생산직 헌터들의 역작이었다.
버튼을 조작하여 마기 속의 상황을 화면에 띄웠지만, 유진과 태구로 보이는 인형은 전혀 없었다.
그저 중소형 몬스터들만 드문드문 보일 뿐이었다.
“관측되나?”
“아무것도 안 보입니다.”
“이쪽 방향 맞아? 각도 틀면서 다시 봐.”
“알겠습니다.”
기잉!
연합군 병사가 좌우로 관측 장비를 움직이자, 이상한 흔적이 발견되었다.
마치 고열에 녹은 듯한 몬스터 사체가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게 아닌가.
관측 장비를 통해 그 사실을 확인한 병사가 크게 소리 질렀다.
“몬스터 사체 발견!”
“어느 쪽이지?”
“레이저로 방향 지시합니다. 거리는……. 1.55마일!”
“잠깐만. 그러면 최대 관측 거리잖아?”
“그렇습니다.”
“그 외에는 없어?”
“예.”
“빌어먹을! 이래서야 별동대를 붙일 수도 없겠군.”
병사들은 연합군 사령부로 무전을 보냈다.
원래 계획은 헌터들로 구성된 별동대가 블라드 유진을 몰래 뒤따르는 거였다.
미궁 정화에 가담한 흔적을 남기기 위해서였다.
제아무리 세계 최강의 헌터라 해도 실수는 있기 마련.
별동대가 그를 구원할 상황이 나올 가능성은 충분했다.
만약 유진을 위기에서 구한다면, 다시금 연합군은 정부와 국민의 신뢰를 받을 수 있었다.
물론 지금도 지원과 믿음은 여전히 든든했다.
헌터 길드들이 이익을 좇아 대거 빠진 뒤에는 매우 힘들어졌지만.
사실상 이번 작전은 신임 최고 사령관의 업적 쌓기에 지나지 않았다.
상황이 어쨌거나 명령은 명령.
연합군 병사들은 각자 맡은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다.
“별동대 도착했습니다. 어디로 가면 됩니까?”
부랴부랴 차를 타고 온 헌터들이 장벽 위로 올라왔다.
관측 장비에 붙어 있던 병사들은 곧장 위치를 알려 주었다.
“일단 방향은 이쪽입니다. 하지만 이건 20분 전의 위치라, 이후의 행적은 알 수 없습니다.”
“들어가서 확인해 보는 수밖에 없군요.”
별동대장은 생명 유지 장치가 달린 헬멧을 쓰면서 대원들을 돌아보았다.
“시간이 없으니, 곧바로 출격한다. 레펠 강하!”
“강하!”
즈이이잉!
그들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줄을 잡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거의 장벽을 달려 내려가는 수준이었다.
지면에 다다른 별동대는 미리 봐 두었던 위치로 빠르게 다가갔다.
2.5km는 상당한 거리지만, 헌터들에게는 가뿐한 수준이었다.
1분도 채 지나지 않아서 목표 지점에 도착한 별동대는 주변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어제 한 차례 웨이브가 있었던 터라, 중간에 만난 몬스터는 없었다.
“몬스터 사체입니다.”
“운이 좋은 게 아니었군. 라바맨이 다 처리해서 마주치지 않은 거였어.”
“어떻게 할까요?”
“흔적을 따라서 이동한다.”
“예.”
유진과 태구의 뒤를 쫓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여기저기에 몬스터 사체가 즐비했으니까.
게다가 미국의 새로운 슈퍼히어로 라바맨이 친히 용암을 이곳저곳에 흘려 둔 상태였다.
별동대는 매캐한 냄새를 맡으며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고작 몇 미터를 가기도 전에 그들은 바짝 얼어붙고 말았다.
멀리서부터 심상치 않은 굉음과 진동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쿠구구구구!
“이게 무슨 소리지?”
“설마 몬스터 웨이브가 또 오는 건 아니겠지요?”
“어제 그렇게 죽였는데, 다시 올 리가 있나? 그놈들도 몬스터 생산에 시간이 걸린다고.”
“그럼 이 굉음은 뭘까요? 아무리 들어도 발소리 같은데요.”
“혹시 모르니, 일단 속도를 늦춰 보자고.”
“예.”
헌터들은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조심조심 이동했다.
가시거리가 고작 수십 미터밖에 되지 않았기에, 불안감은 갈수록 증폭될 수밖에 없었다.
마치 헨젤과 그레텔처럼 몬스터 사체를 따라서 걸어가던 별동대는 어느 순간 우뚝 멈춰 서야만 했다.
좁았던 시야가 한순간에 탁 트이며 폭풍이 불어 닥쳤기 때문이었다.
쿠후우웅!
“으윽!”
헌터들은 강력한 바람을 견디기 위해서 자세를 최대한 낮췄다.
어떤 녀석은 바닥에 아예 몸을 붙여 버리기까지 했다.
서 있겠다며 억지로 버티느니, 차라리 이편이 훨씬 편했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일진광풍이 잦아들자, 별동대는 그제야 고개를 들 수 있었다.
“아…….”
시야를 회복한 그들은 낮은 신음을 흘리고 말았다.
별동대의 앞에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규모의 몬스터 웨이브가 펼쳐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홀리몰리!”
“후, 후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