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얄 블러드-177화 (178/226)

2화

다이애나 로즈는 굉장한 능력을 지닌 헌터였다.

에너지 소모가 커서 전투 지속력이 부족하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그래도 공격력 자체는 나름 준수했다.

물론 그녀는 딜러가 아니라, 버퍼일 때 진가를 발휘했다.

광범위 강화와 보호, 거기다 부수적이긴 해도 꽤 괜찮은 치유 효과까지.

대규모 전투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헌터가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다이애나에게는 명확한 한계점이 있었다.

“애초부터 그 팀에 하자가 있다면?”

그녀의 역할은 어디까지나 버퍼와 힐러.

직접 몬스터와 맞서 싸워야 할 동료들의 기본 능력치에 따라서 스킬의 위력이 천차만별이었다.

최정예 공략대에서는 극강의 힘을 발휘하지만, 지리멸렬한 연합군뿐인 지금은?

온갖 버프를 걸어 줘도 제대로 싸우지 못하면 말짱 꽝이었다.

기세가 잔뜩 올랐으나, 이미 연합군은 너무 큰 피해를 본 상태였다.

게다가 척 봐도 수준이 그렇게 높아 보이지 않았다.

블라드 유진은 다이애나가 고용한 운전기사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전선에 문제가 있었나?”

“예? 네, 그렇습니다.”

그가 갑자기 말을 걸 줄 몰랐던 운전기사는 흠칫 놀라며 대답했다.

스카이 랜치 공항에서부터 대략 35km를 운행하는 동안, 단 한 번도 대화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좀 더 자세히.”

“최근 버틀러에서 대규모 전투가 있었습니다. 아마 주요 전력이 그쪽으로 빠졌을 겁니다.”

“그래서 이곳이 형편없었던 거로군.”

“형편없다기보단 적이 워낙 강해서 그런 거 아닐까요?”

“다이애나 로즈가 왔는데도 밀어내지 못하는 걸 보면, 답이 딱 나오는데.”

“…….”

담담하게 뿜어진 독설에 운전기사는 머쓱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고 말았다.

사실 그가 그렇다면 그냥 그런 거였다.

비공식이긴 해도 유진은 세계 최강의 헌터로 칭송받고 있지 않았던가.

“태구.”

“나 불렀음?”

“저기 가서 좀 도와줘라.”

“내가 왜 그래야 함?”

“이미지 쌓기? 여기서 계속 살 거 아닌가?”

“으음. 잠만 고민 좀.”

그의 요청에 태구는 귀찮은 듯한 이모티콘을 띄우며 거절하려 했다.

하지만 이내 자신의 처지를 자각한 모양이었다.

녀석은 마계에서 자신을 버리는 패로 쓰려 하자, 냅다 반기를 든 몬스터였다.

백작급과 최상급 마족 사이의 능력을 지녔으니, 대충 남작급은 되는 듯했다.

물론 마계에는 그런 작위가 없어서 블라드 유진이 대충 붙인 이름이었다.

어쨌든 태구는 마계와 철천지원수가 되고 말았다.

이제 돌이킬 수 없으니, 무조건 지구에서 살아가야만 했다.

녀석에게 엘칸 차원으로 이동할 능력 따위는 없었으니까.

유진은 태구의 고민에 방점을 찍어 주었다.

“헌터들에게 적으로 오해받지 않으려면, 유명해지는 수밖에 없지. 친근한 이미지로 말이야.”

“오! 유명 좋음. 친구 좋음.”

“그러니까 토 달지 말고 나가.”

“그래! 가즈아!”

단순 무식해 보이지만, 태구는 꽤 똑똑한 녀석이었다.

그러니 지구에서 살아갈 마음을 먹은 거겠지.

녀석은 곧장 전선으로 나아가며 몸집을 점점 키우기 시작했다.

이제껏 단 한 번도 보여 주지 않았던 진면모였다.

쿠구구구구!

“느그 아직도 마계 빨고 자빠짐? 개쌉 미개하누. 이거나 처먹으셈!”

십폭마귀의 육신은 대성체급 최종 보스보다도 좀 더 거대했다.

더불어 움직임 또한 훨씬 빨랐다.

본체로 변신한 태구는 얼굴에 큼지막한 주먹 모양 이모티콘을 띄우며, 냅다 펀치를 내질렀다.

“캬아아악!”

장벽을 부수며 대가리를 들이밀었던 수각류 공룡 형상의 상대는 괴성과 함께 아가리를 쫙 벌렸다.

“킹받는 펀치!”

콰아아아앙!

놈의 입에서 보랏빛 무언가가 번득이는 순간, 태구의 주먹이 작렬했다.

십폭마귀라는 이름에 걸맞게 펀치가 닿자마자 대폭발을 일으켰다.

치이이익!

“그와아아……!”

더불어 박살 난 태구의 팔을 타고 불줄기와 함께 마그마가 쏘아졌다.

고온의 용융된 암석이 아가리로 마구 쏟아져 들어오자, 수각류 공룡은 소리를 다 지르지도 못하고 뒤로 넘어갔다.

다이애나 로즈의 온갖 버프를 받고도 물리칠 수 없었던 놈을 단 한 방에 거꾸러뜨린 것이다.

“이예에에에!”

쿵!

태구는 팔을 좌우로 쫙 펼치며 보란 듯이 슬라이딩했다.

무슨 축구 선수들의 골 세리머니 같은 느낌이었다.

게다가 녀석의 얼굴에는 폭죽이 터지는 듯한 형태의 이모티콘이 요란하게 떠올라 있었다.

그러자 일순간 침묵에 잠겼던 연합군 측에서 거대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저, 저놈 뭐야! 우리 편인가?”

“보면 모르겠어? 저 괴물 놈을 한 방에 쓰러트렸잖아. 그리고 저걸 보라고.”

“재미도 없는 축구 경기 같은 느낌이군. 그래도 센스 있는데?”

“풋볼이든 사커든 뭔 상관이야. 지금 당장 이기기만 하면 됐지. 으와아아! 거기 빨간 친구! 한 방 더 갈기라고!”

헌터와 군인들이 자신을 응원하자, 태구의 전신에 검은 부분이 거의 없어졌다.

마치 흥분이라도 한 듯, 마그마를 분출하며 육신의 온도를 더욱 높인 것이다.

녀석은 비칠비칠 일어난 상대를 검지로 가리켰다.

그러고는 엄지로 목을 긋는 게 아닌가.

스윽.

그야말로 전통적인 살인 예고 퍼포먼스였다.

“와아아아!”

“쇼맨십 죽인다!”

그러자 환호성은 더욱 커졌다.

이제 연합군은 아예 공격할 생각도 하지 않고, 태구의 활약을 지켜보기만 했다.

무슨 격투 경기를 구경하는 것처럼 말이다.

녀석은 모두의 기대에 부응하듯 오른팔을 붕붕 돌리며 전선으로 다가갔다.

마침 무너진 장벽 너머에는 아까 그 대성체급 최종 보스가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한 방 제대로 먹었지만, 놈의 전의는 아직 죽지 않은 듯했다.

“푸쉬이이이!”

수각류 공룡은 입에서 보랏빛 연기를 마구 뿜어내며 시뻘건 안광을 빛냈다.

[‘지옥에서 돌아온 티렉스’가 죽음의 연무를 시전합니다.]

[독무에 닿은 생명체는 숨을 쉬지 않더라도 30초 안에 중독됩니다.]

[매초 사망 확률이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가는 맹독입니다.]

헌터들의 눈앞에는 티렉스의 스킬 효과 설명이 떠올랐다.

하지만 같은 몬스터인 태구에게 홀로그램이 보일 리가 없었다.

녀석은 보라색 연기가 제대로 풀려나오기도 전에 재차 주먹을 날릴 뿐이었다.

“개킹받는 펀치!”

쉬익! 쿠화아아아앙!

이번에는 전보다 폭발력이 훨씬 더 큰 느낌이었다.

스킬 명칭이 괴상하긴 했지만, 위력 하나만큼은 흥행 보증 수표였다.

굉음과 함께 불줄기가 쏘아지자, 태구는 왼손으로 티렉스의 머리통을 움켜쥐었다.

그러고는 물고문을 시작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팔에서 쏟아져 나온 마그마를 티렉스의 아가리에 처넣은 것이다.

끊임없이 계속.

치이이익!

“꾸르륵! 꾸아악!”

버둥거리던 티렉스는 이내 힘없이 축 늘어졌다.

태구의 완벽한 승리였다.

티렉스를 장벽 너머에 아무렇게나 던져 버린 녀석은 양팔을 번쩍 들며 연합군을 돌아보았다.

마치 승리한 격투기 선수가 관중들을 향해서 인사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 장면을 가만히 지켜보던 블라드 유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 태구란 꼬맹이의 취향이 대체 어땠길래, 저놈을 저렇게 만든 거야?”

* * *

태구는 연합군 내에서 일약 스타가 되었다.

지금까지 녀석에 관한 기사는 조금씩 나오던 중이었다.

펜트하우스에 침투했던 NBC 기자가 바로 그 시초였다.

독특한 능력을 지닌 헌터일 거라는 내용부터, 블라드 유진이 키우는 애완 몬스터일 거라는 추측까지.

온갖 낚시성 삼류 기사들이 온라인을 장악하고 있었는데, 오늘부터는 분위기가 달라졌다.

전선을 지키는 슈퍼히어로가 되어 버린 것이다.

덕분에 녀석은 종일 들뜬 마음으로 막사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이예쓰! 이미지 좋아졌으.”

“정신 사납다. 가만히 좀 있어.”

“형아도 인정? 활약 쌉 인정?”

“가만히 안 있으면, 북극해에 처넣어 버린다.”

“와! 거기가 어딤?”

“말을 말자.”

유진이 핀잔을 주자, 태구는 시무룩한 이모티콘을 띄우더니 몸의 형태를 변형하기 시작했다.

녀석은 TV 모양으로 변하더니, 대전 액션 게임의 화면을 흉내 냈다.

정말이지 못 말리는 놈이었다.

“나름 데뷔전인데, 조금 즐거워해도 이해해 주세요. 그래도 귀엽잖아요.”

다이애나 로즈는 그런 녀석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살포시 미소 지었다.

그러자 태구가 원래 모습으로 되돌아오더니, 파닥거리며 다시 막사 내부를 뛰어다녔다.

“형아보다 얘가 더 착함.”

“나는 안 착하니까, 그딴 소리 아무 소용 없어.”

“인성 터졌누.”

“정신 건강에 안 좋을 거 같으니까, 이놈 좀 치워 주겠어?”

유진은 혀를 끌끌 차며 다이애나를 바라보았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녀석은 그녀를 꽤 잘 따랐다.

본능적으로 자신에게 우호적인 사람을 알아챈 듯했다.

“같이 산책이라도 하고 올까요?”

“그러든지.”

“네, 안 그래도 전선 소개를 좀 해 주고 싶었거든요. 유진 님도 함께 가실래요?”

“정신 공격을 너무 당했더니, 좀 쉬고 싶군.”

“그럼 우리 둘만 다녀올게요.”

“그래.”

다이애나 로즈는 살짝 아쉬운 모양이었다.

그래도 태구를 데리고 나가는 일을 자처해 주었다.

덕분에 블라드 유진은 조용한 휴식을 맛볼 수 있었다.

“여기서 구한 커피는 영 질이 좋지 않네. 연합군 내에 물자가 부족해서 그런가?”

원두의 보관 방법이 잘못된 모양인지, 오늘따라 냄새가 좀 별로였다.

사실 커피 향은 그대로인데, 태구 때문에 신경이 예민해져서 그렇게 느껴졌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계약 조건을 좀 더 강압적으로 해도 될 걸 그랬어. 어차피 무력은 내가 훨씬 우위에 있는데 말이야.’

하지만 한 번 맺은 계약을 지금 와서 무를 순 없는 노릇이었다.

정신 사납겠지만, 적응하고 살아야지 어쩌겠는가.

여차하면 자체 교육을 좀 해도 되고 말이다.

어쨌거나 그는 오랜만에 생긴 고요함을 만끽하고 싶었다.

“음. 훨씬 나아. 역시나 마음가짐의 문제였어.”

다시금 커피 향을 맡자, 이전과 전혀 다른 구수함이 느껴졌다.

저 검붉은 몬스터 녀석이 커피 맛을 떨어뜨린 게 확실했다.

블라드 유진은 연신 머그잔을 들었다 놓으며 조용히 책장을 넘겼다.

깨어난 뒤로 꽤 오랫동안 독서를 즐겼는데, 아직도 읽을거리는 산더미처럼 남아 있었다.

교황청 지하에 봉인되어 있던 시절만 1천 년이니 그럴 만도 했다.

하지만 해먹에 누워 책을 읽으려던 중, 누군가가 그의 평화로운 취미를 방해했다.

“험험! 으어억!”

굵직한 헛기침 소리와 함께 막사 안으로 들어오던 자는 대뜸 괴성을 내질렀다.

치이익! 우당탕!

시뻘건 무언가를 밟은 남자가 깜짝 놀라며 자빠지다가, 막사 내부의 집기를 와르르 무너뜨린 것이다.

고무 타는 냄새가 나는 걸 보니, 유진은 상황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밖으로 나가던 태구가 입구에 마그마를 뿌려 놓고 간 모양이었다.

“이 자식이?”

미간을 좁힌 그는 해먹에서 벌떡 일어나 막사를 나서려 했다.

그러자 넘어졌던 중년 남자를 따라온 군인들이 그런 블라드 유진의 앞을 막으려 했다.

“자,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너희는 나중에.”

하지만 이미 암흑화를 시전한 그를 붙잡을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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