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얄 블러드-176화 (177/226)

1화

“뭐 어쩌자는 거지?”

“예?”

블라드 유진의 대답에 앨런 후버는 당황한 얼굴로 되물었다.

그러자 그는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탁자 위의 서류를 바라보았다.

“난 말장난 싫어해.”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다이애나 로즈가 쓴 계약서 못 봤나?”

실렌스 테라에 관한 계약은 한 페이지가 간신히 넘어가는 수준이었다.

그야말로 간략함의 극치.

내용도 구구절절 길지 않고 필요한 것만 딱 적혀 있었다.

이미 앨런도 그녀가 가져온 구멍 숭숭 뚫린 계약서를 읽어 보았다.

만약 미국에서 저딴 식의 계약을 한다면, 뒤통수를 때려 달라는 의미와 일맥상통할 것이다.

거대 길드를 오랫동안 이끌어 온 앨런 후버로서는 용납할 수가 없었다.

“그건 너무 위험합니다. 혹시라도 있을 돌발 상황을 고려하여 안전장치를 마련해 둬야…….”

하지만 앨런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유진이 오른손을 가볍게 들며 변명을 저지했기 때문이었다.

“어떤 계약을 하든 똑같아. 너희들의 행보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아마 무사하지 못할 거다. 길드가 아니라 나라 전체를 없앨 수도 있어.”

“…….”

경제력과 군사력 등 모든 분야에서 미국은 세계 최강이었다.

미궁 사태 이후로도 크게 달라진 건 없었다.

하지만 앨런 후버는 그의 말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대규모 미궁을 두 개나 박살 낸 인물인데, 전선쯤이야 한순간에 와해할 수 있으리라.

그렇게 오염 지대가 급격히 확장되면, 국가 멸망 사태가 실현될 수도 있었다.

진심으로 말이다.

마른침을 꿀꺽 삼킨 앨런은 무의식적으로 다이애나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마치 조롱하는 듯한 눈빛으로 양손을 펼쳤다.

도와줄 의사가 없음을 표현하는 제스처였다.

“왜 아무 말도 없지? 지금쯤이면, 해답이 나와야 할 텐데.”

침묵은 블라드 유진의 감정 없는 음성이 흘러나오고 나서야 깨졌다.

“네, 조속히 계약서를 정리하여 다시 올리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다. 요점만 추려서 수기로 써.”

“예?”

“몇 글자나 된다고 그걸 다시 해 오나? 빈 종이 있으니까 쓰면 되겠네. 일단 요약부터 해 봐.”

“아, 알겠습니다. 크흠! 흠!”

씁쓸한 표정을 급히 감춘 앨런 후버는 괜히 헛기침을 몇 번 해 댔다.

호기롭게 계약서를 들이밀었던 것이 민망했던 모양이었다.

“계약의 주요 골자는 이렇습니다.”

앨런이 제시한 계약은 그가 미국의 주요 미궁을 정화하는 내용이었다.

해안가를 먼저 정리하겠다는 지난번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멕시코까지 공략 범위를 확대하고 유진에게 떨어지는 이익이 늘어났을 뿐.

“이번에는 도심지가 아닌 만큼, 원하는 땅을 선점하실 수 있을 겁니다. 임대든 명의 이전이든 말이죠.”

“내륙은 어떡할 건가.”

“그거야 차근차근…….”

“하나 염두에 둬야 할 게 있어.”

“그게 무엇인지요?”

“내가 미국에 계속 있지는 않을 거란 말이지.”

“그, 그러시군요.”

“계획이 별로 마음에 안 드는군. 너무 시간이 오래 걸려.”

그가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바라보자, 앨런은 군기가 바짝 든 목소리로 답했다.

“다시 계획을 세워 오겠습니다!”

“됐어.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네.”

“예?”

“바로 옆에 대안이 있는데, 뭐 하러 그런 번거로운 짓을 해야 하지?”

블라드 유진은 공손한 자세로 앉아 있는 다이애나 로즈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그러자 그녀는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품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제가 세워 온 계획입니다. 저와 계약해 주세요. 유진 님.”

“……!”

다이애나의 돌발 발언에 앨런 후버는 눈을 크게 치켜뜨고 말았다.

난데없이 이런 개별 행동을 할 줄은 몰랐던 모양이었다.

그녀는 앨런의 날카로운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쭉 말을 이었다.

“유진 님은 마치 아름다운 불도저 같은 분이시죠. 제가 알아본 바로는 언제나 중심 타격을 하셨어요.”

드라코 도무스와 마드리드의 미궁 군체 공략에서 그런 그의 성격을 엿볼 수 있었다.

다이애나 로즈의 말대로 유진은 목표 지점까지 일직선으로 뚫고 들어가는 걸 선호했다.

중간에 걸리적거리는 것들을 모조리 박살 내면서 말이다.

그때는 그의 곁에 그녀가 없었으나, 나름대로 조사를 많이 한 모양이었다.

하긴 다이애나는 블라드 유진을 줄곧 팬의 심정으로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중심 타격?”

그러나 앨런 후버는 아직도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

그녀는 그런 녀석을 힐끔 쳐다보며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재물은 일정 이상이 쌓이게 되면, 행복에 크게 기여하지 못하는 거 모르시나요? 설마 유진 님께 그깟 돈과 땅이 절실하다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겠죠?”

“…….”

“저는 과감하게 제안하겠습니다. 저와 함께한다면, 원하는 걸 훨씬 빨리 얻으실 거예요.”

확신에 찬 다이애나 로즈의 목소리에 유진의 입꼬리는 호선을 그렸다.

상당히 만족한 듯한 느낌이었다.

그는 앨런 후버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이제야 확실해졌군.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 어느 쪽인지 말이야.”

이후로 앨런은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그냥 물러나야만 했다.

자신이 완패했다는 사실을 믿지 못한 모양인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중에도 넋이 나가 있었다.

“젠장할!”

터엉!

저도 모르게 발길질을 한 앨런 후버는 비명과 함께 깨금발로 뛰어다녔다.

아무 생각 없이 통짜 쇳덩이로 이루어진 차량 차단봉을 차버렸기 때문이었다.

눈물을 찔끔 흘린 앨런은 절뚝거리며 호텔을 나섰다.

“허…….”

하지만 바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급한 마음에 대충 대 놓았던 차가 견인된 상태였으니까.

앨런은 바닥에 붙은 딱지를 보며 대리 주차를 맡기지 않은 과거의 자신을 책망했다.

* * *

달랑 한 장짜리 서류로 계약을 마친 블라드 유진은 다음날부터 곧장 전선으로 향했다.

현재 미국은 양극단만 살아 있고, 중앙의 대부분이 마기에 먹힌 상태였다.

그 말인즉, 알짜배기는 죄다 중앙에 모여 있단 사실을 뜻했다.

해안가보다 좀 더 미궁의 밀집도가 높았으니까.

“펜실베이니아주 서부는 미국에서 가장 치열한 전선입니다. 제가 한창 활동할 때만 해도 이 전선이 오하이오주에 있었는데…….”

“그간 많이 밀린 모양이군.”

“네, 지금은 전선의 기준이 피츠버그가 되었죠.”

전세기를 타고 400km를 날아온 유진과 다이애나는 전선을 돌아보는 중이었다.

장벽의 길이가 워낙 길다 보니, 무조건 차량이나 경비행기를 이용해야 했다.

혼자라면 녹턴을 타고 날아다닐 테지만, 지금은 동행이 많아서 어쩔 수 없었다.

“오! 이거 나름 재밌음.”

태구는 덜컥이는 오프로드 차량이 마음에 들었는지, 적재함에서 팔딱거리고 있었다.

녀석에게는 모든 것이 새로운 경험일 테니, 그럴 만도 했다.

뒤를 힐끔 쳐다본 유진은 피식 미소를 지으며 시선을 돌렸다.

말썽꾸러기 몬스터는 제쳐 두고, 지금은 공략에 집중할 때였다.

한국에서 이미 겪어 본 것처럼 전선 공략은 그리 간단하지 않았으니까.

“내 속도를 못 따라오면, 별로 재미없는데.”

“후훗. 유진종합건설이나 현성 건설하고는 차원이 다를 거예요. 여긴 미국이니까요.”

“얼마나 진격하든, 뒤를 받칠 수 있단 말인가?”

“아마 한계는 있을 테죠. 날이 갈수록 전선은 후퇴만을 거듭했으니까요. 그래도 자신 있습니다.”

그는 슬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차량은 앨러게니강을 지나서 연합군 주둔지로 향했다.

피츠버그에는 헌터와 미군의 연합군 주둔지가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곳에 들르지 않고, 최일선으로 이동하기를 주문했다.

형식적인 검문이 있었지만, 통과는 순식간이었다.

다이애나 로즈를 알아보자마자 차단기를 열어 주었기 때문이었다.

군인들은 그녀를 보고 경례를 붙이기도 했다.

“상당히 명망 높군.”

“아마 과거의 기억 때문일 거예요. 오하이오까지 진격했던 사람들은 저를 잊지 못하죠.”

“영광이 재현되리라고 믿는 건가?”

“물론 그때는 지금과 달랐어요. 마기가 이토록 심하지도 않았을뿐더러, 미궁 성장 사건도 없었죠.”

이제 연합군이 기대를 걸어야 하는 건 그녀가 아니라, 블라드 유진이었다.

다이애나의 시선을 느낀 그는 창밖을 쳐다보며 무심하게 말했다.

“기대한 만큼은 해. 계약했으니까.”

“알아요. 그냥 고마워서 보는 거예요.”

“안 닳으니까 마음껏 봐.”

그녀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유진의 옆모습을 응시했다.

하지만 감상 기회는 오래지 않아 끊겨 버렸다.

전선에 도착하자 운전기사가 차량을 멈춰 세웠기 때문이었다.

“다 왔습니다.”

“고마워요.”

차에서 내린 일행은 장벽의 뒷부분을 적나라하게 볼 수 있었다.

후송되는 부상병, 연신 군수 물자를 공급하는 중장비, 사방천지에 가득한 화약 냄새와 총성.

그리고 포격.

콰광!

장벽 위쪽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뚫으려는 몬스터 군단과 막으려는 연합군 간의 치열한 접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아마 미군의 힘만으로는 진작에 뚫렸을 터였다.

지금껏 피츠버그 전선을 유지하고 있는 건, 헌터들의 분투 덕분이었다.

그들이 장벽 위쪽을 돌아다니며 강력한 몬스터들을 처리해 주고 있었으니까.

물론 각개 격파도 그리 쉽지만은 않았다.

피츠버그는 몬스터 웨이브가 가장 심한 곳이었으니.

“마, 막아! 저놈 저대로 뒀다간 장벽이 무너진다!”

“구스타프, 발사!”

투두두둥!

M3A1 무반동총이 일제히 불을 뿜자, 장벽 뒤쪽으로 흰 연기와 함께 맹렬한 후폭풍이 일었다.

84mm 전용 탄이 날아가 무시무시한 폭음을 일으켰다.

더 이상 장벽에 충격이 없는 거로 보아, 몬스터의 공격을 저지하긴 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내 비명과도 같은 외침이 들려왔다.

“충격 대비!”

“뭐라도 붙잡아!”

이윽고 굉음과 함께 장벽의 상단부가 박살 나는 게 아닌가.

당연히 위에서 화력을 투사하던 자들은 순식간에 유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생산직 헌터들이 만든 장벽마저도 부숴 버릴 위력인데, 인간의 몸으로 어찌 버티겠는가.

방어력이 뛰어난 A급 탱커들은 살아남았지만, 나머지는 방금의 일격에 모조리 전사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다이애나 로즈의 표정이 다급해졌다.

“바로 오길 잘했네요. 안내는 나중에 해 드리죠.”

그녀는 곧장 차량에 설치된 무전기를 조작하더니, 결의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지금부터 A75 블록의 현장 지휘는 내가 합니다. 총공세 포메이션 가동.”

무전을 마친 다이애나가 차량 지붕에 올라서며 양팔을 좌우로 펼쳤다.

그러자 하늘색 섬광이 터져 나와 근방의 모든 아군에게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

“로, 로즈?”

“전선의 장미꽃이 돌아왔다!”

“저 개자식들에게 다시 한번 제대로 박아 주자고!”

“으아아아! 돌격!”

연합군의 사기는 극도로 치솟아 올랐다.

다이애나 로즈가 있다면, 승리할 수 있다는 믿음이 전선에 팽배했기 때문이었다.

기세가 되살아난 연합군은 대성체급 최종 보스를 향해서 공격을 퍼부었다.

원거리 딜러들도 수호의 진언을 믿고, 꽤 가까이 다가와서 스킬을 날려 댔다.

정확도를 올리기 위함이었다.

난데없이 쏟아진 강력한 반격에 장벽을 뚫고 들어온 녀석은 주춤주춤 물러나기 시작했다.

“됐다! 더 밀어붙여!”

“으아아! 이길 수 있다!”

연합군은 신이 나서 공격을 거듭했으나, 블라드 유진의 표정은 그리 좋지 못했다.

‘저거 갖고는 안 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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