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얄 블러드-175화 (176/226)

25화

치이이이익!

“으에에에?”

난데없이 들이닥친 무언가에 얼굴을 적중당한 태구는 휘청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공교롭게도 코앞에서 터진 건 냉각 스킬이었다.

십폭마귀는 강력한 열기를 내포한 몬스터라, 급락하는 온도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물에 들어가는 거야 괜찮았지만, 영하 100도가 넘는 극저온엔 취약했다.

화르르륵!

태구는 안면의 온도를 낮추는 스킬에 대항하기 위해서 시뻘건 불길을 일으켰다.

녀석의 전신에서 화염이 쏟아져 나오자, 냉각 스킬은 금세 힘을 잃고 사라져 버렸다.

피부를 뚫고 침입한 냉기는 가셨지만, 한 번 끓어오른 분노는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았다.

더군다나 호의적인 마음으로 다가가지 않았던가.

호의로 접근했다가 기습을 당하자, 배신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물론 정신 연령이 다소 낮은 태구의 입장에서 말이다.

“나 화남. 너 이제 뒤짐.”

얼굴에 화난 표정의 이모티콘을 띄워 올린 녀석은 방출하던 열기를 한순간에 거둬들였다.

그러더니 기이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끼이이이―!

심상치 않은 소음에 침입자는 양손을 내저으며 뭐라고 지껄여 댔다.

“이, 이건 실수였습니다. 저는 헌터가 아니라, NBC의 기자 루이스 콘티예요! 폭력을 가하면 당신에게 좋지 않은 일이 생길……. 오! 맙소사.”

그자는 본인의 신분을 밝히며 태구를 진정시키려 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녀석은 영어를 전혀 알아듣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시뻘겋게 달아오른 태구의 몸에서 굉음과 함께 무시무시한 충격파가 터져 나왔다.

콰아아앙! 콰과과광!

녀석은 무지막지한 연쇄 폭발을 일으키며 주변을 초토화했다.

태구가 어째서 십폭마귀라고 불리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휘이잉!

“으아아아!”

대폭발에 휘말렸지만, 루이스 콘티는 아직 살아 있었다.

충격파가 몸에 먼저 닿아 운 좋게 건물 밖으로 튕겨 나갔기 때문이었다.

그자는 반대편 건물에 매달려서 간신히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물론 당분간은 말이다.

“오! 아직 안 뒤짐? 운빨 지리누.”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오자, 루이스는 기대 가득한 눈으로 뒤돌아보았다.

하지만 태구의 얼굴에는 여전히 화난 이모티콘이 떠올라 있었다.

녀석은 멈출 생각이 없는지, 붉은빛을 뿜으며 기이한 소리를 발생시켰다.

끼이이이―!

다시금 무시무시한 연쇄 폭발을 일으켜 루이스 콘티가 매달린 건물을 날려 버릴 작정이었다.

“으아아! 사, 살려 줘!”

루이스가 비명을 질러 댔으나, 저 괴상한 소음은 끊어지지 않았다.

게다가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기까지 했다.

팔에 힘을 주며 재차 돌아보자, 어느새 코앞까지 날아든 태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놀랍게도 녀석은 수십 미터 거리의 건물을 건너뛰어 지척까지 다가온 상태였다.

이렇게 가까이서 연쇄 폭발이 일어난다면, 아까와 같은 행운은 루이스 콘티에게 존재할 수가 없었다.

분명 이번에는 강력한 폭발과 화염이 충격파보다 먼저 들이닥칠 테니까.

“흐어어어!”

루이스는 축축하게 젖은 바지를 내려다보며 눈물 콧물을 줄줄 흘렸지만, 몸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어느 순간 괴소음조차도 완전히 사라졌다.

대신에 살짝 격앙된 느낌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 하냐?”

* * *

태구와 루이스는 박살 난 발코니에 꿇어앉았다.

그런 두 녀석의 앞에는 은발의 남자가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루이스 콘티를 구한 건 바로 블라드 유진이었다.

물론 고작 사람 목숨을 살리자고 호텔 꼭대기까지 날아오른 건 아니었다.

그저 이 사고뭉치 몬스터 녀석의 헛짓거리를 막기 위함이었다.

다행히 태구는 그를 보자마자 진정 상태로 돌아왔다.

녀석은 이내 눈물을 뚝뚝 흘리는 이모티콘을 띄우더니, 억울하다며 항변했다.

“난 레알 잘못 없음! 이 새끼가 먼저 선빵 친 거임!”

“알았으니까 조용히 말해.”

“이놈이 선빵.”

유진이 이마를 짚으며 으르렁거리자, 태구는 속삭이는 듯한 음성으로 말했다.

목소리가 작아진 만큼 결백을 어필하려는 몸동작은 커질 수밖에 없었다.

그는 알았다며 손을 휘저어 녀석을 진정시킨 다음, 루이스 콘티를 돌아보며 말했다.

“무단 침입에 공격 및 객실 파괴까지. 상당한 놈이로군.”

“그게 대체 무슨 소립니까? 오히려 피해자는 접니다. 물론 몰래 사진을 찍으려고 지붕에 올라가긴 했지만, 여기까지 들어올 마음은 없었다고요. 저 괴물 때문에 놀라서 떨어진 거니까, 저한테는 책임 없습니다!”

태구가 공격 의사를 내비치지 않자, 루이스는 되레 의기양양해졌다.

블라드 유진과 같은 유명 인사라면, NBC의 기자 신분이 먹히리라고 여기는 듯했다.

셀럽들은 일이 커지는 걸 원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그자의 생각과는 달리, 그는 인간들이 뭐라고 지껄이건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존재였다.

“방금……. 뭐라고 했나?”

“게다가 펜트하우스를 날려 버린 건 저놈이지 제가 아닙니다. 당장 풀어 주지 않으면, 당신이 몬스터를 키우고 있다는 뉴스가 방영될 겁니다.”

루이스 콘티는 어느새 몸을 일으킨 채, 짐을 주섬주섬 챙기고 있었다.

NBC의 위세를 이용한 협박이 제대로 먹혔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자는 유진의 곁을 지나쳐 출입문으로 당당하게 걸어 나가려 했다.

하지만 루이스는 자신의 의지를 관철할 수가 없었다.

콰직!

누군가가 반파된 문을 완전히 쪼개 버리며, 출입구를 떡하니 막았기 때문이었다.

놀랍게도 그자는 방금 루이스 콘티가 지나쳤던 블라드 유진이었다.

깜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지만, 그는 여전히 태구의 옆에 가만히 서 있었다.

“이, 이게 대체 어찌 된…….”

“별 정신 나간 놈을 다 보겠군. 미쳐서 공포를 느끼지도 못하는 건가?”

스윽.

어느새 루이스의 목에는 시뻘건 칼날이 드리워져 있었다.

출입문을 부수고 들어온 유진이 소리도 없이 소수혈인을 들이민 것이다.

루이스 콘티가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짓고 있을 무렵, 출입구를 통과하는 인원은 점점 많아졌다.

블라드 유진과 똑같이 생긴 자들이 수십이나 들어오더니, 객실과 발코니를 가득 채웠다.

DK에게서 복사해 온 분신 생성 스킬, 천군압쇄가 펼쳐진 것이다.

애초부터 도망칠 가능성 따위는 존재치 않았다.

기자와 헌터를 겸업하는 루이스였지만, 대항할 수는 없었다.

아마 그의 분신과 일대일로 싸워도 순식간에 제압당할 테니까.

“뭔가 착각하는 모양인데.”

“히익!”

유진의 목소리가 지척에서 들려오자, 루이스 콘티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놈의 턱을 움켜쥔 그는 질끈 감은 눈을 억지로 뜨게 했다.

그러고는 스산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깟 방송국이 뭐 어쨌다고? 거기도 이렇게 만들어 줄까?”

“아, 아닙니다.”

“저 녀석이 뭘 어쨌든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원인 제공은 네놈이 했거든. 몬스터인 걸 알았으면, 접근하지 말았어야지.”

“으으…….”

“이 일은 확실하게 갚아 주마. 그거 내놔.”

블라드 유진은 루이스의 짐을 통째로 빼앗았다.

그러고는 놈의 엉덩이를 툭 차서 계단 쪽으로 밀어냈다.

가벼운 발차기였으나, 결과는 상당했다.

루이스 콘티의 몸이 쭉 밀려나더니 층계 아래로 굴러떨어진 것이다.

우당탕!

“으어억!”

한바탕 데굴데굴 구른 그자는 허겁지겁 일어나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러다 잠깐 앨런 후버와 마주치고 말았다.

순간적으로 상대의 정체를 알아보았지만, 겁에 질린 루이스는 허둥지둥 호텔을 벗어날 뿐이었다.

앨런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계단을 돌아보며 유진에게 말을 걸었다.

“저 사람 뭐죠?”

“NBC의 기자 루이스 콘티라고 하더군.”

“설마 기자가 이 사달을 낸 건 아니겠지요?”

그는 상황을 간략하게 요약해 주었다.

대충 저자가 냉각 스킬을 쏴서 태구가 빡쳤다는 내용이었다.

그런 다음 앨런 후버를 향해서 불편한 느낌의 한 마디를 툭 내뱉었다.

“처사가 영 마음에 안 드는데? 이후로의 계약은 생각을 좀 해 봐야겠군.”

* * *

미국 헌터계는 그야말로 발칵 뒤집혔다.

NBC의 기자가 블라드 유진의 거처에 무단 침입하여 난동을 부렸다는 기사가 대서특필되었다.

더불어 태구도 나름의 인지도와 인기를 얻을 수 있었다.

그의 애완 몬스터인 데다가, 얼굴에 이모티콘을 띄울 수 있다는 내용이 이슈를 만든 것이다.

물론 실제로 꽤 귀여웠기에, SNS를 비롯한 각종 매체에서 녀석은 여러 번 다루어졌다.

최근 일어난 여론전에는 전부 앨런의 개입이 있었다.

“역시 인간은 채찍질을 해 줘야 일을 잘한다니까?”

NBC는 급히 사과 성명을 내고, 호텔 측에 손해 배상을 하기로 했다.

며칠 만에 돌아와 뉴스를 보고 있던 엔세데스는 어깨를 으쓱이며 중얼거렸다.

화룡왕이 유진의 거처로 복귀한 이유는 마실 술이 다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기존에 묵던 곳의 펜트하우스가 박살 났기에, 그는 다른 호텔의 스위트룸으로 방을 옮긴 상태였다.

엔세데스는 버번위스키와 브루클린 라거를 잔뜩 챙긴 뒤, 다시 영기 추출 작업을 위해 나갈 참이었다.

“아, 참 저택 받았다며? 거기가 어디라고?”

“잉글우드. 강 건너야.”

“아, 저쪽? 대충만 알면 돼. 너 찾는 거야 어렵지 않으니까.”

“날 감지할 수 있나?”

“당연히 멀면 잘 안 되지. 하지만 저놈은 웬만하면 바로 알 수 있거든.”

“확실히 그렇겠군.”

화룡왕이 가리킨 건 한창 TV에 정신이 팔려 있는 태구였다.

녀석은 존재감을 숨기는 데 미숙했기에, 어디에 있더라도 금방 찾아낼 수 있었다.

수 킬로미터 밖까지도 감지 가능할 정도였으니까.

덜컥!

술병으로 가득 찬 공간 확장 주머니를 다섯 개나 챙긴 엔세데스는 그대로 객실을 나섰다.

그런데 문을 열자마자 앨런 후버가 불쑥 튀어나오는 게 아닌가.

마침 유진을 만나러 온 모양이었다.

앨런은 화룡왕을 향해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어, 수고해. 뺀질이.”

“예?”

“못 알아들었으면 말고.”

“아……. 사, 살펴 가십시오.”

뺀질이라는 말은 한국어로 했으니, 못 알아듣는 건 당연했다.

화룡왕은 그런 앨런을 힐끔 쳐다보고는 피식 미소를 지으며 지나쳐 버렸다.

“왜 멍청하게 서 있어요? 얼른 들어가지 않고.”

뒤에서 불쑥 튀어나와 말을 건 사람은 이제 막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온 다이애나 로즈였다.

최근 소원해진 관계 탓에 따로따로 유진을 찾아온 모양이었다.

앨런 후버는 겸연쩍은 표정으로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별거 아냐, 좀 이상한 소리를 들어서.”

“어? 저분이 하신 말을 방금 이상한 소리라고 하셨네요? 얼른 가서 일러야지.”

“야야, 뭐 하는 짓이야?”

“장난도 못 쳐요? 못 본 사이에 되게 재미없는 남자가 됐네.”

“너 이런 이미지 아니었잖아. 갑자기 왜 이래?”

“그럼 이미지가 바뀌었나 보죠. 안 지나갈 거면 비켜요. 들어가게.”

다이애나의 톡 쏘는 듯한 대꾸는 마치 전시영을 보는 듯했다.

앨런은 그녀가 한국에 있으면서 쓸데없는 것만 잔뜩 배워 왔다며 투덜거렸다.

이내 두 사람은 한창 TV에 빠져 있는 태구의 곁을 지나, 블라드 유진을 찾았다.

그는 마치 화보의 한 장면처럼 발코니에서 커피를 즐기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구미가 당길 만한 제안을 들고 왔나?”

“물론입니다.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설마 다이애나 로즈가 해답은 아니겠지? 그럼 되게 실망인데.”

“그, 그럴 리가요.”

유진의 대꾸에 앨런 후버는 식은땀을 삐질 흘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다이애나가 찌릿 흘겨보며 새침한 표정을 지었다.

괜히 비슷한 시각에 와서 곤란한 상황이 연출된 것 같아 마음이 불편했다.

하지만 앨런은 이내 속내를 감추며 그의 앞에 한 장의 서류를 내밀었다.

“이것이 바로 저희의 대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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