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치이익!
“으윽!”
앨런 후버는 신음을 흘리며 주춤주춤 물러나고 말았다.
난데없이 꽤 강한 열기가 훅 치고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2m가 넘는 덩치의 검붉은 괴인이 머리를 들이밀고 있었다.
얼굴에는 왠지 깜찍한 이모티콘이 떠올라 있었지만, 놀랄 수밖에 없었던 건 사실이었다.
마치 용암을 연상케 하는 몸뚱이의 위압감은 상당했으니까.
에루티를 본 블라드 유진은 눈을 가늘게 뜨며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그 열기 좀 어떻게 하라고 했지?”
“아, 미안. 이거 흥분하면 나도 모르게 튀어나옴.”
그의 한마디에 열기는 확 사그라졌다.
녀석이 몸을 검은색으로 물들이면서, 마그마 부분의 노출도를 줄인 결과였다.
“또 뭐야?”
“나 저기 가도 됨?”
유진의 질문에 에루티는 기대 가득한 이모티콘을 띄워 올리며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곳은 호텔에 딸린 야외 수영장.
아마 이 녀석이 저곳에 뛰어든다면, 물이 부글부글 끓어오를 터였다.
‘지금은 열 방출을 줄였으니, 그나마 괜찮으려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긴 했지만, 당장은 에루티를 내보낼 수가 없었다.
기자들이 달려들면 곤란해질 테니까.
게다가 용암을 물속에 넣어도 되나 싶었다.
“온도가 낮아져도 괜찮나?”
“상관없음. 몸이 좀 뻑적지근할 수도 있는데, 열이야 그냥 올리면 되니까.”
“그렇군. 근데 지금은 안 돼.”
“아! 왜 안 됨?”
“네가 나가면 더 시끄러워져. 이 아저씨가 바깥의 기자들 치우면 그때 들어가.”
그가 앨런 후버를 가리키며 말하자, 에루티의 똘망똘망한 눈망울이 휙휙 돌아갔다.
앨런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애 같은 목소리와 말투로 나불대고 있었지만, 외형은 무시무시한 몬스터가 아니었던가.
아니, 얼굴의 이모티콘은 좀 귀엽긴 했다.
물론 용암으로 이루어진 육신은 압도적인 위압감을 뿜어내고 있었지만.
텁!
“아조시, 저 인간들 언제 내쫓아 줄 거임?”
“으으! 이, 이것 좀 놓고…….”
에루티에게 붙들린 앨런 후버의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생각보다 녀석의 악력이 워낙 강해서 셔츠가 다 뜯겨 나갈 뻔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녀석은 영어를 알아듣지 못했기에, 손에 힘을 풀 생각이 전혀 없었다.
결국 누군가가 중재를 해 줘야 했다.
“그만 놔 줘. 그러다 죽겠다.”
“아, 인간인 걸 깜빡했네. 형아들은 잡을 수조차 없던데.”
본인은 잘못이 없다는 걸 어필하려는 듯, 에루티는 양손을 쫙 펴 보였다.
물론 궁색한 변명이라, 유진에게는 씨알도 안 먹혔지만.
“업무 이야기 중이다. 괜히 방해하지 말고 엔세데스한테 가 있어. 에루티.”
“용 형아는 술 마신다고 바쁨. 그리고 나 이제 이름 바꿀 거임.”
“이름을 바꿔?”
“마계 새끼들이 지어 준 거라 싫음.”
“뭐로 할 건데?”
“음……. 태구?”
에루티는 몇 달간 교류가 있었던 꼬마의 이름을 사용하기로 한 모양이었다.
녀석이 성명을 뭐로 하든 그는 별 감흥이 없었다.
“이름은 알아서 하고, 조용히 찌그러져 있어. 방해하면 마즈단 클랜에 던져 버린다.”
“으엑! 알았음.”
이제 태구가 된 십폭마귀는 시무룩한 이모티콘을 띄우며 바닥에 쭈그려 앉았다.
검지로 마그마를 분출하여 바닥에 그림을 그리는 걸 보니, 어지간히도 삐친 모양이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유진은 씁쓸하게 입맛을 다시고 있던 앨런 후버를 돌아보았다.
“어디까지 이야기했지?”
“새로운 계약을 하자는 내용이었습니다. 해안선 확장 작전에 관한 것으로…….”
“그 전에 정산할 것이 남지 않았나?”
“예? 10억 달러라면 이미 보냈습니다만. 완전 면세 처리까지 해서 말이죠.”
“나는 지금 돈 따위를 말하는 게 아니야.”
“아! 토지 말씀이시군요.”
“그래.”
“그게 아직 면적을 얼마나 줄 건지에 관해서는 논의가 필요…….”
실렌스 테라를 정화하는 단기 계약은 10억 달러와 저택, 원하는 토지를 제공하기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앨런이 말한 것처럼 세부적인 면적에 관해서는 아무런 조항이 없었다.
여기서 대충 뭉개도 대응하기 어렵다는 이야기였다.
저택이랍시고 아무거나 던져 준다고 해도 말이다.
물론 그건 미국 측이 갑일 경우에 할 수 있는 횡포였다.
“저택은 최상급으로, 토지는 내가 고른다. 땅은 일정 기간 임대만 해줘도 괜찮아.”
“예? 그게 정말입니까?”
토지 소유권을 넘기는 것과 단순 임대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이 정도라면, 계약을 이행하는 미국에서도 부담이 훨씬 덜할 터였다.
반면에 유진과 엔세데스는 그곳의 영기를 빨아내는 게 목적이었다.
굳이 토지를 소유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노림수를 꿰뚫어 본 그는 마치 선심 쓰는 척 한발 물러나는 모습을 보였다.
“당연히 무상 임대의 형식이 되어야겠지?”
“그렇다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앨런 후버는 환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입가에 냉소를 머금은 블라드 유진이 턱짓으로 호텔 아래를 가리켰다.
“그럼 저것들이나 얼른 정리해. 땅 보러 가게.”
* * *
투두두두두!
유진과 엔세데스는 헬리콥터를 타고 뉴욕 인근을 돌아보는 중이었다.
롱아일랜드와 필라델피아 등지에는 괜찮은 영지가 꽤 있었다.
그러나 절반 이상이 도심지라 본격적으로 영기 추출을 하는 건 어려웠다.
땅을 온통 파헤쳐야 하는데, 건물을 올린 토지를 내어 줄 주인이 어디 있겠는가.
결국에 외곽 지역을 임대하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았다.
“워낙 땅덩이가 넓다 보니, 영지도 충분히 있네. 역시 빨강 사기 맵이야.”
엔세데스는 마치 마트에서 물건을 사듯이 원하는 토지를 쏙쏙 골랐다.
그러고는 뒷일을 부탁한다며 헬리콥터에서 뛰어내렸다.
“나중에 연락 해에에에에……!”
엔진 소음에 묻힌 화룡왕의 목소리를 듣고 있던 앨런 후버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말았다.
동료가 장비도 없이 헬기에서 뛰어내렸는데, 블라드 유진은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당연하다는 듯 끄덕이기까지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존재들이었다.
“저긴 문제없는 거지?”
“어차피 국유지라, 땅 좀 판다고 문제가 될 건 없습니다. 보안관의 오해를 살 수도 있지만, 그건 저희가 알아서 해야죠.”
“그럼 이제 다음 목적지로 가자고.”
“예, 그러시죠.”
헬리콥터는 이내 뉴욕 방면으로 방향을 틀었다.
맨처음 와처스 길드는 유진에게 어퍼 이스트 사이드의 아파트를 제안했다.
이곳은 맨해튼 최고 부촌에 해당하는 지역이었으니까.
인프라가 잘 깔려 있었고, 주변에 즐길 거리도 많았다.
하지만 유진에게는 별반 필요도 없는 것이었다.
그는 한적하고 넓은 부지를 선호했다.
그래서 뉴저지 잉글우드 내부에 지어진 큼지막한 빈 저택이 바로 두 번째 제안이었다.
“근방에서 이만큼 넓은 땅은 아마 없을 겁니다. 숲 말고는요.”
“나름 괜찮긴 하네. 엔세데스가 작업하는 곳과 그리 멀지도 않고.”
“여기로 하시겠습니까?”
“근데 좀 상태가 안 좋군.”
“비워진 지 오래되어서 그렇습니다. 최대한 빠르게 수리할 테지만, 몇 주간은 펜트하우스에 계셔야 합니다.”
“그래.”
어차피 미국에는 꽤 오랫동안 머무를 예정이었다.
영기 추출 작업에 시간이 걸리는 데다가, 온 김에 이쪽 헌터계도 겸사겸사 둘러보려 했으니까.
기분 좋으면 대성체 미궁 몇 개를 정화해 줄 용의도 있었다.
일이 끝난 뒤, 호텔로 돌아올 때는 차를 이용했다.
길이 좀 막혔지만, 미궁 사태 이전보다는 인구 밀도가 낮아서 그럭저럭 다닐 만한 수준이었다.
그런데 펜트하우스 직행 엘리베이터를 타려는 순간, 위에서 굉음과 함께 묵직한 충격파가 느껴졌다.
구우우우웅!
“뭐지?”
한참 위층에서 시작된 폭발인 듯, 지하까지 미치는 여파는 미미했다.
하지만 유진과 앨런 후버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방향과 거리를 따져 보니, 근원지가 펜트하우스 근처였기 때문이었다.
“이거 설마…….”
앨런은 객실에 혼자 남아 있을 한 녀석을 떠올리며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블라드 유진은 작게 혀를 차며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사고를 친 모양이군.”
“지금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면 안 될 것 같습니다만.”
“왜?”
“꼭대기에서 폭발이 일었다면, 기계가 망가졌을 수도 있습니다. 계단을 이용하시죠.”
“흠……. 난 됐으니, 넌 알아서 와.”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그는 뒤편을 향해서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그러자 유진의 그림자에서 화염 갈기로 뒤덮인 유령 군마가 불쑥 튀어나왔다.
“허억!”
녹턴과 처음 마주친 앨런 후버는 깜짝 놀라며 뒷걸음질 쳤다.
유령 군마에게서 느껴지는 열기가 태구 못지않았기 때문이었다.
두두두두!
녹턴에 올라탄 그는 주차장에서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말발굽 모양으로 찍힌 불꽃만이 주차장 바닥에 남아 일렁거렸다.
“이, 이럴 때가 아니지.”
앨런은 비상계단을 향해서 허둥지둥 달려갔다.
* * *
“아, 심심. 왕심심. 심심하당.”
펜트하우스에 혼자 남겨진 태구는 몸을 마치 슬라임처럼 늘어뜨려서 바닥을 기어 다니고 있었다.
유진이 경고한 대로 열기 방출을 최대한 억제했기에, 카펫이 타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녀석은 발코니를 빙글빙글 돌며 무료함을 달래는 중이었다.
그런데 그때 하늘에서 뭔가가 뚝 떨어져 난간에 착륙하는 게 아닌가.
“구악!”
“오잉? 너 모냥?”
그것은 전신이 시커먼 깃털로 뒤덮인 새였다.
미궁에서 나온 지 하루밖에 안 된 태구가 까마귀의 정체를 알 리가 만무했다.
난간에 접근한 녀석은 까마귀의 움직임을 따라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느새 태구의 머리는 새와 비슷한 형상으로 변한 상태였다.
“갸악!”
울음소리마저 따라 하자, 까마귀가 난간에서 내려와 주변을 맴돌았다.
똑똑한 데다가 무리 생활을 하는 동물이라, 적인지를 판가름하기 위해서 접근한 모양이었다.
푸드드득!
까마귀는 이내 홰를 치며 물러나더니, 저 멀리 날아가 태구를 관찰하기만 했다.
아무래도 동족과는 뭔가 다른 냄새를 맡기라도 한 것 같았다.
“까비, 친구 추가 할 수 있었는데.”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태구는 겸연쩍은 이모티콘을 띄우며 입맛을 다셨다.
놀란 까마귀가 호기심을 접고 건물 뒤편으로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녀석은 다시금 축 늘어져서 발코니 이곳저곳을 배회했다.
그러다가 뭔가 좋은 생각이 났는지, 얼굴에 느낌표를 생성시키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오! 그뤠. 형아가 보던 게 있었지. 나도 켜 봐야겠음.”
태구는 아마도 뉴스를 시청하던 블라드 유진을 떠올린 듯했다.
후다닥 객실 안으로 뛰어 들어가려던 녀석은 문득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처음 보는 인간이 호텔 지붕에서 살금살금 움직이다가 눈이 딱 마주쳤기 때문이었다.
물론 태구는 그을음을 이용하여 표정을 만들었기에, 실제로 시선이 얽히지는 않았다.
껌뻑껌뻑하는 눈을 만든 녀석은 정체불명의 인물에게 말을 걸었다.
“누구임?”
“으, 으악!”
그러나 대답 대신 들려온 것은 침입자의 비명이었다.
우당탕!
발을 헛디딘 그자가 발코니로 떨어져 볼썽사납게 나동그라진 것이다.
태구는 어리둥절한 이모티콘을 만들며 재차 질문을 던졌다.
침입자와 얼굴을 거의 맞댈 듯이 다가가며 말이다.
“아, 정체를 밝히셈.”
하지만 이번에도 답변을 들을 수는 없었다.
“으아아아!”
괴성을 지른 침입자가 손에서 새파란 무언가를 뿜어냈기 때문이었다.
푸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