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부서지지……. 않았다?”
놀랍게도 미궁의 핵에는 별다른 상흔조차 남지 않았다.
천계도살검에 직격당했음에도 말이다.
그저 강력한 힘에 저 멀리 튕겨 나가기만 했을 뿐.
검은 구체가 온전하다는 사실을 알아챈 유진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도무지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그러자 멀찍이 떨어져서 술만 퍼마시던 엔세데스가 호기심 어린 표정을 지으며 다가왔다.
“오호? 그걸 맞고도 멀쩡하다고? 대체 뭐로 만들어졌는지 궁금하군.”
꿀꺽! 꿀꺽! 챙!
남은 버번위스키를 한꺼번에 들이켠 화룡왕은 병을 아무렇게나 던져 버렸다.
그러더니 빠른 속도로 되돌아오던 미궁의 핵을 단번에 잡아챘다.
탁! 기기기긱!
“허? 요놈 봐라?”
레드 드래곤의 완력으로도 구체의 움직임을 완벽하게 멈추는 건 불가능했다.
그 놀라운 결과에 화룡왕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헛웃음을 흘렸다.
어지간히도 어이가 없었던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내가 좀 도와줘야 할 거 같은데, 그렇지 않나?”
“굳이 그럴 필요까지 있겠나 싶군. 몇 번 더 패면 부서지지 않을까?”
“흠집도 안 났잖아.”
“이런 데 개입해도 되는 건가. 괜히 긁어 부스럼이 될 듯한 느낌이라서.”
“그냥 물건 좀 박살 내는 건 괜찮아. 그런 거로 로드가 따라올 정도면, 차원 여행 못 하지. 흐흐!”
엔세데스의 눈에는 기묘한 오기가 서려 있었다.
한시라도 빨리 미궁의 핵을 갈라서 내부를 확인해 보고 싶은 열망.
드래곤의 극단적인 호기심이 제대로 발동한 듯했다.
쿠구구구구!
눈빛이 바뀌자마자 화룡왕의 전신에서 형언할 수 없는 압력이 쏟아져 나왔다.
억누르고 있었던 힘을 개방하기 시작한 것이다.
마치 저녁 무렵 내리쬐는 햇빛을 보는 듯, 엔세데스의 주변은 주황색 연무로 가득 들어차 있었다.
화염은 아니지만 강력한 불의 기운이 풀려나와 공기를 달구는 중이었다.
푸쉬이이이!
이윽고 미궁의 핵에서 반응이 오기 시작했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구체의 표면이 조금씩 이지러진 것이다.
“충분하겠군. 자, 받아!”
화룡왕은 붉게 변한 미궁의 핵을 허공으로 던져 올렸다.
그러자 블라드 유진은 기다렸다는 듯이 천계도살검을 휘둘렀다.
스핏! 푸쉭―!
이번에는 귀청을 찢을 듯한 날카로운 소음이 발생하지 않았다.
마치 부드러운 무언가가 썰리는 것처럼 미약한 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투둑! 치이익!
이윽고 반으로 갈라진 미궁의 핵이 바닥에 떨어졌다.
엔세데스가 주입한 열기가 아직 남은 모양인지, 두 개의 반구는 주변의 물체를 마구 녹였다.
마치 자체적으로 마그마를 생성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호오! 이렇게 생겨 먹었구나?”
“뭐가 어떻길래? 설명 좀 해 봐.”
“음……. 간단히 말하자면, 이건 마족의 뼈를 압축시킨 거야. 이 주먹만 한 구슬에 수백 마리 분량이 들어 있지.”
“그렇게까지 압축하는 게 가능한 건가?”
“마기로 밀도를 극한까지 올렸어. 그러니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자를 수가 없었던 거지. 그 도축용 칼인지 뭔지로도 말이야.”
“천계도살검이다.”
“아, 어쨌든 뭔가를 반갈죽 하는 건 똑같잖아. 아무튼 이 또라이 같은 경도의 이유는 알았는데, 핵심 기능의 발동 원리는 모르겠군. 쪼개진 탓에 기능을 잃었거든. 게다가 불의 마나가 내부를 태웠고. 좀 더 정밀한 연구가 필요한 듯한데…….”
화룡왕은 쭈그려 앉아 턱을 괸 채, 미궁의 핵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하지만 당장 결과를 도출해 낼 수는 없었다.
벌써 실렌스 테라가 무너질 기미를 보였기 때문이었다.
쿠구구구구!
“이건 나가서 확인해 봐야겠네. 앗! 뜨뜨뜨!”
성급하게 집어 들던 엔세데스는 손을 파닥거리며 두 개의 반구로 저글링을 시작했다.
유진이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보자, 화룡왕은 멋쩍게 입을 삐죽거리며 미궁의 핵을 품속에 집어넣었다.
“되게 경멸하는 눈빛이다? 장난도 못 치냐?”
“레드 드래곤이 화상 입는 소리 하고 있네.”
“그게 무슨 말인데?”
“헛소리라는 뜻이다.”
“알면서 그냥 물어본 건데, 그걸 또 곧이곧대로 말하냐?”
“쓸데없는 소리 할 거면 입 다물고 저거나 데려와. 마계에서 버려진 녀석이라, 금방 거둘 수 있을 테니.”
“이건 미궁의 핵을 연구하는 대가로 해 주는 거야. 날 마음대로 부릴 수 있단 착각하지 말라고.”
“한 적 없으니까, 얼른 가.”
“예이. 예이. 거, 되게 매몰차네.”
엔세데스는 구시렁거리면서 허공에 몸을 띄웠다.
목표는 정신없이 도망 다니는 중인 십폭마귀 에루티였다.
녀석은 미궁의 핵이 파괴된 줄도 모르고 저 멀리 이동한 상태였다.
쉬이이익!
“야! 끝났어. 멈춰!”
“어케 이리 빨리 끝남? 그거 되게 안 부서질 텐데.”
“형님들이 다 박살 냈으니까, 괜히 헛걸음하지 말고 이리 와.”
“믿어도 됨?”
“안 믿으면 어쩔 건데?”
“처음 본 인간을 어떻게 믿음?”
“인간 아니니까 믿어라. 좀!”
“오! 그럼 믿어야지.”
설득력 따위는 조금도 없었지만, 의외로 에루티는 곧장 도주를 멈췄다.
대체 뭐가 저 녀석을 이해시킨 건지는 몰라도 어쨌든 잘된 일이었다.
번거롭게 추격전을 벌이지 않아도 되었으니까.
“몇 살인데, 형이라 함?”
“몇 만 년은 거뜬히 넘으니까 그딴 질문은 하지 마라.”
“앗! 그럼 인정. 형아. 이제 우리 밖으로 나가는 거임?”
“그래. 명색이 귀족하고 맞먹는 수준인데, 뭐 어디 쓸 데가 있겠지.”
“나 쓸모 많음! 엄청 쎔! 여기 온 인간 놈들 다 불태워 버렸음. 언젠가부터는 안 들어왔지만.”
얼굴에 의기양양한 이모티콘을 띄운 에루티는 양손으로 허리를 짚으며 우쭐한 몸짓을 했다.
“되게 귀찮은 놈을 주워 온 거 같은데.”
엔세데스는 찜찜한 표정으로 그런 녀석을 돌아보았다.
이윽고 미궁 붕괴 현상이 지척까지 다다랐다.
쿠구구구구! 번―쩍!
순간적으로 터진 불빛과 함께 공략대는 미궁 밖으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거대한 육각 기둥은 조각조각 나뉘어서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그와 동시에 주변을 가득 채우고 있던 마기의 구름이 엄청난 속도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더 이상 이 지역에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고 수 킬로미터 밖으로 밀려난 것이다.
드라코 도무스를 정화했을 때와 비슷한 현상이었다.
“오! 오오! 처음 맡아 봤던 냄새와 똑같음. 태구랑 만났을 때 말이야.”
태구는 에루티에게 한국어를 가르쳐 준 녀석이었다.
시원한 바다 내음을 즐기던 녀석은 어리둥절한 이모티콘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공략대원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에루티는 발그레한 볼 터치를 만들더니,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누가 이렇게 많이 쳐다보는 거 처음임. 헤헤.”
“거기 있지 말고 이리 와.”
“알았음.”
녀석은 쿵쿵거리며 걸어와서 유진과 엔세데스의 앞에 섰다.
말을 꽤 잘 듣는 걸 보니, 자신을 해방해 준 사람이 누군지 아는 모양이었다.
“너 어차피 끈 떨어진 연이잖아?”
“그게 뭐임?”
“아니, 이제 갈 데 없잖아. 마계하고는 끝장났는데, 지구에는 연고가 없고.”
“맞음. 태구가 죽어서 나는 친구도 없음. 쌉 왕따임.”
“그럼 이 형들이 데리고 다녀 줄 테니까, 계약 하나 하자.”
화룡왕의 제안에 녀석은 얼굴 면적의 반 이상이나 차지하는 눈을 만들더니, 양손을 번쩍 들었다.
왠지 되게 환영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오잉?”
“노예 계약 같은 건 아니고, 배신하지 말고 우호적으로 지내자는 뭐 그런 거야.”
“클랜에 넣어 주는 거임?”
“그건 뭔데?”
“마족들이 파벌 이루는 걸 클랜이라 함.”
“오! 그래. 바로 그런 거야.”
“이예에!”
엔세데스는 곧장 에루티와 언령으로 계약을 맺었다.
물론 십폭마귀는 상하 관계를 극도로 혐오했다.
명령에 충실히 따랐음에도 버리는 카드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언령 계약은 동등한 위치에서 진행되었다.
말하자면 드래곤의 강력한 권능에 의하여 친구를 맺게 된 것이다.
결단코 배신할 수 없는 관계 말이다.
물론 에루티는 마계의 클랜 시스템과 비슷하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이예에! 나도 이제 클랜이 생겼음! 보통 클랜 마스터는 마왕이 맡는데, 우린 누가 마왕임?”
“딱히 리더는 없어. 그냥 우리 둘 다라고 하자. 괜찮지?”
“알았음. 형아.”
파닥거리며 기뻐하는 녀석의 모습에 유진과 엔세데스는 무심코 서로를 쳐다보았다.
생각보다 너무 이상한 놈이 걸려든 것 같은 느낌이었다.
“잘 데려온 거 맞겠지?”
“난 몰라. 네가 주워 오라 했어.”
“…….”
화룡왕이 냅다 발뺌했지만, 뭐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먼저 십폭마귀 에루티를 회유하자고 한 건 유진이었으니까.
* * *
실렌스 테라를 정화하고 나자, 미국 헌터계는 발칵 뒤집혔다.
십 년이 넘도록 접근조차 불가했던 대규모 미궁이 돌파되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B급 헌터가 절반이 넘는 공략대로 깨부수다니, 솔직히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덕분에 각종 매체는 블라드 유진이라는 인물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의 공략과 다른 점이라고는 딱 그 한 사람밖에 없었으니까.
“인터뷰 요청이 빗발치고 있습니다. 여론이 너무 거칠어서 한 번쯤 얼굴을 비추긴 해야 할 것 같습니다만…….”
유진의 객실로 찾아온 앨런 후버는 손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말꼬리를 흐렸다.
이곳까지 올라오느라, 상당한 곤욕을 치른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머무는 호텔 로비는 기자들로 가득 들어차 있었으니까.
펜트하우스 스위트룸을 빌리지 않았다면, 객실까지도 인파가 들이쳤을 터였다.
그나마 이곳은 출입구가 따로 되어 있어 외부인 차단이 손쉬워서 다행이었다.
아마 와처스 길드원들이 올라오는 통로에서 취재 공세를 막아 내고 있을 것이다.
“굳이?”
커피 향을 즐기던 블라드 유진은 앨런을 힐끔 쳐다보며 말했다.
그러자 앨런 후버는 어색하게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그, 그냥 가볍게 해 본 말이었습니다. 너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럼 안 해. 시끄러우니까 저놈들 좀 치워 줬으면 좋겠는데.”
“어떻게든 정리하겠습니다. 한데, 혹시 다음 계획을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갑자기 무슨 계획?”
“예! 특별히 정해진 게 없다면, 저희 와처스 길드와 함께 해안선 확장 작전을 해 보시는 건 어떠신지요.”
“나름의 묘수가 있나 보군.”
“그렇습니다. 잠깐 설명을 해 드려도 될까요?”
“해 봐.”
그의 허락이 떨어지자, 앨런은 얼굴을 활짝 펴며 태블릿 PC에 화면을 띄웠다.
이름은 거창했지만, 사실 별거 없는 작전이었다.
해안가를 우선으로 정리해 나가는 안전지대 확장 방법이었다.
이러면 내륙으로 치고 나가는 것보다 상대적으로 안정적일 터였다.
바다에는 미궁이 생성되지 않으니까.
꽤 획기적인 방식이었으나, 한계가 없지는 않았다.
일단 그 해안가 지역을 확보하는 것 자체가 가장 큰 난관이었다.
‘속 보이는군.’
피식 미소를 지은 유진은 앨런 후버를 재미있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오묘한 시선을 느낀 앨런은 어색한 미소를 짓고 말았다.
왠지 자신의 내면이 속속들이 다 까발려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횽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