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얄 블러드-172화 (173/226)

22화

대규모 미궁의 최종 보스는 전형적으로 매우 거대했다.

실렌스 테라 또한 드라코 도무스의 삼두마룡과 비슷할 확률이 높았다.

하지만 공략대의 눈앞에 나타난 최종 보스는 별로 크지 않았다.

2m가량 되는 신장에 몸뚱이가 좌우로 살짝 넓어 보이는 검붉은 괴인.

조금 의아했지만, 저 녀석이 바로 실렌스 테라의 최종 보스였다.

이 근방에서 출몰하는 폭탄마인보다 머리 두 개는 작은 느낌이었다.

만약 무리에 섞여 있었다면, 최종 보스인지 모르고 지나쳤을 공산이 컸다.

공략대원들은 홀로그램 글귀를 확인하고서야 놈의 정체를 알아보았으니까.

물론 블라드 유진은 이미 상대의 존재를 감지하고 있었지만.

[대규모 미궁의 최종 보스 ‘십폭마귀(十爆魔鬼) 에루티’가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십폭마귀 에루티’가 미궁 성장으로 인해 마족의 심장을 얻었습니다.]

[대상의 격이 높아집니다.]

중간 보스였던 폭주마인 팔란스와 마찬가지로 이 녀석 또한 한 단계 이상 성장한 모양이었다.

“마족의 심장이라니, 일단 단어부터가 심상치 않네요.”

다이애나 로즈는 불안한 눈빛으로 에루티를 관찰했다.

외형은 폭탄마인과 거의 비슷했지만,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었다.

뿜어져 나오는 마기의 강도가 차원이 달랐다.

놈의 존재를 인식한 이후로는 구분하지 못할 리는 없었다.

‘일반적인 마족과는 달라. 최상급을 뛰어넘었다.’

블라드 유진은 안테리오르 타워에서 하위 마족들과 접촉한 적이 있었다.

십폭마귀 에루티가 뿜어낸 마기의 질은 그때 만났던 최상급 마족보다 짙고 선명했다.

쿵! 쿠궁!

아니나 다를까, 에루티의 주변에는 큼지막한 덩치의 폭탄마인들이 바글바글했다.

지금까지 보아 왔던 녀석들과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거대했다.

못해도 폭주마인 팔란스의 절반 정도는 되는 느낌이었다.

“잠깐만, 우리 역할이 부하 몬스터를 맡는 거 아니었나?”

“근데 저놈들은 너무……. 큰 거 같은데?”

“그러게. 이거 제대로 상대할 수 있으려나 의문이로군.”

부하 몬스터들의 위용에 공략대원들은 걱정스러운 목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

여기까지 오는 데만 해도 4할에 가까운 전력을 잃었고, 게다가 극도로 지친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최종 보스가 더 상대하기 편해 보이네.”

“우리가 저걸 맡으면 안 되나?”

판단력이 흐려진 모양인지, 몇몇 헌터들이 헛소리를 해 댔다.

그러나 쓸데없는 규탄을 벌이다 한 방 먹은 일로 인해, 지금은 자성의 목소리가 훨씬 컸다.

“개소리 지껄이지 마. 명색이 최종 보스인데, 작다고 약할 리가 있겠냐?”

“대갈통 안 굴러가면, 제발 좀 닥치고 있어. 쪽팔리게 하지 말고.”

“어디서 이런 병신 같은 것들이 기어 나온 거야?”

그러자 곳곳에서 들려오던 잡소리는 쏙 들어가고 이내 침묵만이 감돌았다.

이제 콜 해리스의 결단만 남은 상황이었다.

아니, 사실상 전투는 유진이 움직여야 시작되는 거였다.

공략대장은 그에게 슬그머니 다가와서 넌지시 의중을 물었다.

“언제 시작하실지…….”

“시간 끈다고 좋을 건 없겠지.”

“예, 갈수록 지치기만 할 겁니다.”

“그럼 부하 몬스터부터 끌어내.”

“알겠습니다.”

마치 부하라도 된 것처럼 살짝 고개를 숙인 콜 해리스는 굳은 얼굴로 뒤돌아섰다.

“저도 저쪽을 지원하러 가 볼게요.”

다이애나 또한 자신의 할 일을 찾아 힐러 진형 쪽으로 이동했다.

그녀가 없다면 공략대는 부하 몬스터의 절반도 상대하지 못하는 상황이었으니까.

대원들의 진형 설정을 마친 콜 해리스는 이윽고 공격 명령을 내렸다.

“우리가 맡은 건 부하 몬스터입니다. 말살이 아니라, 유인 및 봉쇄가 목표라는 걸 명심하십시오. 원거리 딜러 공격 개시.”

쉬익―! 퍼버벙!

원거리 딜러 진형에서 쏘아 낸 스킬들이 갖가지 빛을 뿜어내며 터져 나왔다.

시각 효과는 꽤 화려했지만, 유진이 겪었던 공략대 중에 단연 지금의 화력이 가장 약했다.

그래도 부하 몬스터들의 이목을 끄는 데는 큰 문제가 없었다.

아무리 미미한 공격이라도 계속 맞다 보면 빡칠 수밖에 없을 테니까.

쿠구구구구궁!

놈들은 공략대를 향해서 우르르 몰려와 반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다행히 폭주마인과 비슷한 능력을 갖춘 모양인지, 냅다 폭발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덕분에 그가 최종 보스와 일대일로 겨룰 무대가 생겨났다.

스이잉!

소수혈인을 뽑아 든 블라드 유진은 여유로운 발걸음으로 상대를 향해 접근했다.

최상급 마족보다 뛰어난 녀석임은 확실하나, 그게 뭐 어쨌단 말인가.

그는 이미 공작급을 골로 보낸 전적이 있는 존재였다.

하지만 유진은 섣불리 출수하지 못했다.

십폭마귀 에루티는 가만히 서서 그저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으니까.

‘왜 아무런 반응도 없지?’

뭔가 함정이 펼쳐져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그의 예리한 감각에 그런 것들이 걸리지 않을 리는 없었다.

블라드 유진은 잠깐 머뭇거리며 일부러 빈틈을 노출해 보았다.

쿠궁!

굉음이 들려오는 쪽으로 무심코 시선을 옮긴 척, 고개를 홱 돌려 버린 것이다.

하나, 그럼에도 에루티는 마치 휴대 전화 이모티콘처럼 생긴 얼굴만 좌우로 까딱거렸다.

그러더니 대뜸 기계음 같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게 아닌가.

“응. 나 안 싸움.”

“뭐지? 이건 마족어가 아닌데?”

“바깥의 동태를 확인하면서 좀 익힘. 나는 여기 오래 있었음.”

“그렇다고 한국어를 하는 건 좀 아니지 않나?”

“이 근방에 한국 사람 많았음. 이미 다 뒈졌지만.”

“허…….”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았으나, 그는 오랜만에 꽤 당황하는 중이었다.

대규모 미궁의 최종 보스, 그것도 한 단계 성장하여 마족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 존재가 이딴 태도라니.

솔직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일단은 대화가 통하는 것 같아서, 몇 마디 말을 붙여 보기로 했다.

“왜 안 싸우겠다는 거지?”

“그 비열한 새끼들이 먼저 나 버렸음. 그래서 나도 일 안 함. 이거, 그 뭐라더라? 어……. 태엄, 태엄이라고 했음. 나도 그거 할거임.”

“태업이겠지. 말을 대체 누구한테 배운 거야?”

“이 근방에서 제일 오래 살아남은 애한테 배움. 태구 진짜 착함. 내가 도와줬는데, 몇 달 안 있어서 더 착해짐.”

“더 착해졌다는 게 무슨 소리지?”

에루티는 대답 대신 부하 몬스터 중 하나를 가리켰다.

아마 죽어가는 아이가 마기에 오염되어 몬스터로 변했다는 의미 같았다.

어쨌거나 이 녀석은 정말로 싸울 생각이 없는 듯했다.

그을음을 이용하여 얼굴에 이상한 표정을 만들어 내기만 할 뿐이었다.

붉은 바탕에 검은색 그림이 움직이자, 생동감 넘치는 이모티콘 같았다.

“만약 내가 싸움을 건다면?”

“응. 안 싸움. 근데 왜 그럼?”

“난 이 땅에서 대규모 미궁을 없앨 거니까.”

“그딴 거 하는데 왜 싸움?”

“호오? 뭔가 다른 방법이라도 있나 보지?”

“그냥 이거 부수면 됨. 그럼 미궁 사라짐.”

쑤욱!

에루티는 자신의 몸속에 손을 집어넣더니, 시커먼 무언가를 꺼냈다.

반질반질한 광택이 도는 검은 구체였다.

“이게 뭐지?”

“미궁의 핵임. 최종 보스가 죽으면 자연 파괴되어서 미궁이 닫힘.”

“그런 방식이었군.”

약간 경멸하는 표정으로 미궁의 핵을 바라보던 녀석은 대뜸 손을 파닥거렸다.

그러자 튕겨 나간 검은 구체가 에루티의 손을 따라 부리나케 움직였다.

마치 최종 보스의 몸에서 떨어지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아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걸 그냥 파괴할 수 있게 해 준다고?”

“응. 어차피 필요 없음. 나 이제 마계 새끼들하고 손절 칠 거임.”

녀석은 손을 마구 흔들어서 어떻게든 미궁의 핵을 떨어뜨리려 했다.

하지만 그리 쉽지만은 않은 모양이었다.

블라드 유진은 소수혈인을 휘둘러 검은 구체를 후려쳐 보았다.

쉬익! 터엉!

그러자 미궁의 핵이 저 멀리 튕겨 나가더니, 이내 에루티를 향해 스멀스멀 다가오기 시작했다.

EX급에 달한 소수혈인에 직격당했음에도 별반 타격이 없는 듯한 모습이었다.

“쉽게는 안 된다. 이 말이로군?”

“나도 저렇게 단단한 건 줄은 몰랐음. 생각해 보니 개빡치네? 저딴 걸 내 몸에 심어 뒀단 말임? 와규! 퐁듀! 포유!”

그 괴상한 현상에 녀석은 알 수 없는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슬금슬금 물러났다.

저 미궁의 핵으로부터 도망치는 듯한 모습이었다.

“좋아. 이건 내가 해결해 주지. 넌 저놈들이나 일단 막아.”

“응. 안 됨.”

“부하 몬스터인데, 왜 안 된다는 거지?”

“내가 마계 새끼들한테 반기를 든 순간부터 저것들도 말 안 들음.”

“반기를 들었는지 어떻게 알고?”

“저거 꺼냈잖슴. 그걸로 끝난 거지, 뭐.”

“그럼 물러나라는 명령부터 내려놓고 꺼냈어야지.”

“그래도 부하들이 날뛰는 건 못 막음.”

“가지가지 하네.”

유진은 작게 한숨을 쉬고는 미궁의 핵에 집중했다.

방금은 다이애나 로즈의 부담을 조금이나마 줄여 주려고 한 요청이었다.

미국 공략대를 위한 건 결단코 아니었다.

별로 관련도 없는 인간 놈들이 뒈지거나 말거나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귀찮은데, 그냥 널 죽이면 안 되나?”

“응. 그래 봐야 소용없음. 저게 몸 밖으로 나온 이상, 날 죽여도 여기에 갇히기만 할거임.”

“쯧! 괜히 일을 어렵게 만드는군.”

원래는 십폭마귀 에루티를 처치하면 그대로 끝이었다.

하지만 저 녀석이 실렌스 테라의 핵을 꺼낸 뒤부터 일이 괴상하게 꼬여 버렸다.

이제는 에루티를 죽인다고 해서 미궁이 끝나지 않는 것이다.

결국에 저 단단한 미궁의 핵을 부숴야만 사태가 종결될 터였다.

스윽.

소수혈인을 흩어 버린 블라드 유진은 피의 권능을 왕창 끌어 올렸다.

방금 구체를 후려쳤을 때, 그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저 물체의 경도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말이다.

웬만한 충격으로는 끄떡도 없을 테니, 공격 수준을 대폭 높여 볼 작정이었다.

‘제아무리 단단해도 천계도살검에는 버티지 못할 것이다.’

[EX급 스킬 ‘천계도살검(天界屠殺劍)’이 시전되었습니다.]

[‘권능 폭발’로 인해 ‘천계도살검’이 EX급 최대치의 위력으로 적용됩니다.]

[지고한 힘을 접한 주변의 몬스터들이 끝없는 공포를 느낍니다.]

츠츠츠츠츠!

블라드 유진의 손에서 뻗어 나온 거무튀튀한 기운은 날렵하게 길쭉한 형상으로 변했다.

뱀파이어 로드의 궁극 스킬, 천계도살검이 펼쳐진 것이다.

자세를 낮춘 그는 꽤 빠르게 다가오는 미궁의 핵에 정신을 집중했다.

놀랍게도 에루티는 유진이 공격하기 쉽도록 도망치는 방향을 조절하고 있었다.

아마 그만이 자신을 해방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러니 확실히 뒤를 잡았음에도 저 멀리 물러나기만 했겠지.

쉬익―!

짙은 마기의 구름을 꿰뚫으며 날아드는 미궁의 핵.

블라드 유진은 검은 구체가 지척까지 다가오기를 기다렸다가 번개처럼 검을 휘둘렀다.

스핏!

익숙한 검로를 훑으며 공간을 쪼갠 천계도살검은 눈 깜짝할 새에 목표 지점을 통과했다.

그러자 미궁의 핵이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공중으로 치솟아 올랐다.

까아아앙!

그런데 그 이후로 일어난 일은 그의 예상과 사뭇 달랐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