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마치 양서류의 알처럼 투명한 막에 둘러싸인 검붉은 덩어리.
짙은 마기를 뿜어내는 걸 보니, 이것이 바로 폭주마인 팔란스를 만든 원흉인 모양이었다.
주변 성체 미궁의 보스들을 흡수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이게 본체라면 얼른 처리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렇죠. 언제 증식해서 아까 같은 괴물이 될지도 모르잖아요.”
헌터들은 불안한 눈빛으로 알 덩어리를 바라보았다.
콜 해리스는 블라드 유진을 힐끔거리더니,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처치 메시지가 뜨지 않았으니……. 처리합시다.”
공략대장의 허락이 떨어지자, 대원들은 반색하며 알 덩어리로 달려들었다.
활약에 따라서 경험치 산정이 되긴 하지만, 막타도 무시할 수 없는 업적이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욕망에 사로잡힌 눈으로 알 덩어리에 공격을 퍼부었다.
“별로 한 건 없지만, 이런 거라도 챙겨야지. 안 그래?”
“여기까지 버티고 살아남은 것만 해도 충분한 역할을 한 거야. 블라드 유진, 저 사람도 그 이상은 기대 안 한다고 했잖아?”
어떤 이는 그가 한 말을 인용하며 합리화에 나서기도 했다.
한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알 덩어리가 헌터들의 무기에 갈라진 것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그 이후에 벌어진 일은 예상을 한참이나 벗어난 것이었다.
파바바박! 콰아앙!
충격을 받은 콩알탄처럼 번쩍이는 불꽃이 연쇄 작용을 하더니, 이내 대폭발로 이어졌다.
괜히 막타 욕심을 부리던 여섯 명의 대원들은 쏟아져나온 화염에 그대로 노출되었다.
“저, 저런!”
“어서 힐러들을 투입해!”
번―쩍!
각종 회복과 보호 스킬이 날아들었지만, 불길에 휩싸인 헌터들이 돌아오는 일은 없었다.
그저 시커먼 잿더미만이 남았을 뿐.
“아…….”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질렀던 콜 해리스는 이내 낮은 탄성을 힘겹게 내뱉었다.
헌터들이 욕심을 부린 건 사실이지만, 명령을 내린 건 자신이 아니었던가.
괜스레 블라드 유진이 서 있는 쪽으로 시선이 옮겨졌다.
하지만 그는 헌터들이 자신을 쳐다보든 말든 홀로그램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대규모 미궁의 중간 보스 ‘폭주마인 팔란스’ 처치!]
[최대 기여자에게 보상이 주어집니다.]
‘이번에도 별로로군.’
유진의 손에 들린 것은 춘천 전선을 지킬 때도 얻었던 S급 에너지 코어였다.
등급이 높기는 해도 그에게는 별 필요가 없는 물건이었다.
장비 아이템을 제작하거나 각종 산업에 쓰이는 것 외에는 그다지 의미가 없었으니까.
물론 인간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것이지만.
‘조영준한테 던져 주면 되겠군.’
S급 에너지 코어를 복주머니에 갈무리한 블라드 유진은 망설임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죽은 헌터들과 침울한 공략대의 분위기는 안중에도 없는 모습이었다.
당연히 이럴 줄 알았던 다이애나 로즈는 멍한 얼굴의 콜 해리스에게 작은 조언을 남겼다.
“어차피 신경도 안 쓰실 테니, 걱정하지 말고 임무에만 충실하세요.”
“예?”
“막타 노린 거로 문제는 없을 거란 말이에요.”
그녀의 한마디 덕분인지, 근심이 가득했던 공략대장의 얼굴이 살짝 펴졌다.
하지만 그 후로 덧붙은 다이애나의 말에 콜의 표정은 다시 굳고 말았다.
“아, 대원들의 원성까지 막아 주지는 못할 거예요. 통솔력에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잘 처신하라는 의미입니다.”
“…….”
주변에서 은근히 부추기기는 했지만, 결정을 내린 건 공략대장인 자신이 아닌가.
섣부른 판단으로 여섯 명의 대원을 죽게 한 책임은 져야 할 것이다.
물론 앞으로 다가올 거대한 희생과 비교하면, 방금의 사고는 새 발의 피에 불과할 테지만.
* * *
폭주마인이 벌인 최후의 저항으로 인한 소란은 금세 잦아들었다.
공략대에 닥친 역경은 사소한 판단 실수 따위는 깡그리 잊게 할 만큼 엄청났으니까.
“비, 빌어먹을. 뭐 이런 미친 난이도가…….”
“전선이 밀려서 퇴각할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고. 역시나 대규모 미궁인가.”
콰광―!
바글바글하게 몰려들던 폭탄마인들을 처치하고 한숨을 돌리려던 순간, 측면에서 굉음이 터져 나왔다.
땅속에 숨어 있던 한 녀석이 불쑥 몸을 일으키며 폭발을 일으켰기 때문이었다.
긴장감을 극도로 끌어 올리고 있었음에도 속수무책이었다.
그만큼 공략대의 피로는 극에 달하고 있었으니까.
“더는 못 갈 것 같습니다.”
“이러다 최종 보스를 보기도 전에 다 죽을 거라고요!”
급기야 항명하는 대원들마저 생겨나기 시작했다.
콜 해리스의 판단 실수로 인해 발생한 통솔력의 저하가 도드라진 것이다.
“블라드 유진은 대체 뭘 한답니까? 맨 앞에서 걷는 것밖에 더해요?”
더군다나 그의 존재에 의문을 지닌 헌터까지 나타났다.
실제로 유진은 가장 많은 폭탄마인을 처치하는 중이었다.
혼자서 잡는 몬스터의 양이 공략대 전체와 맞먹을 정도였다.
하지만 상황을 잘 모르면, 그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수 있었다.
선두에서는 폭탄마인이 터지지 않았으니까.
물론 이는 놈들이 폭발하기 전, 모조리 도륙되었기에 벌어진 현상이었지만.
결국에 콜 해리스는 블라드 유진의 곁으로 다가와 머뭇거리며 말을 걸었다.
“저……. 염치없다는 건 알지만, 부탁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저놈들 때문인가.”
“예, 불만이 상당합니다.”
콜이 시뻘게진 얼굴로 힘겹게 대답하자, 그는 그제야 뒤를 힐끔 돌아보았다.
공략대의 피로와 공포가 극에 달했음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다들 퀭한 눈빛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거나, 선두를 노려보는 중이었으니까.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같다는 이유로?”
“그게……. 그런 오해를 하는 모양입니다.”
“주제도 모르는 놈들이군. 몬스터의 습격을 막아 달라 이거지?”
“그, 그렇습니다.”
“알겠다. 가 봐.”
유진이 귀찮은 듯 손을 휘젓자, 콜 해리스는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물러났다.
가슴을 졸이며 상황을 지켜보던 다이애나 로즈는 의외라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솔직히 그가 무시할 줄 알았기 때문이었다.
슬그머니 다가온 그녀는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져 보았다.
“정말 모든 몬스터를 다 막아 주실 건가요?”
“못 할 건 없지.”
“그렇게까지 공략대를 필요로 하시는 줄은 몰랐는데요. 미끼 역할이 나름 중요한가 보죠?”
“사실 없어도 그만이야.”
“그런데 왜 공략대장의 요청을 들어주신 건가요?”
“개소리를 찍어 누르기 위해서?”
“예?”
다이애나는 블라드 유진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강력한 무위를 보여 주면, 대원들이 환호하긴 할 것이다.
하지만 그가 원하는 결과는 나오지 않을 공산이 컸다.
스슥.
그녀가 고개를 갸웃하는 순간, 유진의 신형이 수십 개로 나뉘는 게 아닌가.
그들은 암흑화를 시전하며 마기의 구름 속으로 모습을 감추어 버렸다.
퍼벅―! 콰직!
이윽고 공략대 근처에는 수많은 폭탄마인의 사체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호시탐탐 기습을 노리던 몬스터의 수효는 육안으로 파악한 것보다 월등히 많았다.
“우리 주변에 저렇게 많이 매복해 있었다고?”
“저것들이 한꺼번에 터지기라도 했다면…….”
“으으! 끔찍하군.”
사체들을 헤아려 본 대원들은 몸을 부르르 떨며 발걸음을 옮겼다.
폭탄마인들의 덩치는 가면 갈수록 커지는 중이었다.
더불어 폭발력도 점차 강해지고 있었기에, 공략대의 공포심은 극대화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블라드 유진이 나선 뒤부터는 급격하게 완화되는 모습을 보였다.
반으로 갈라진 폭탄마인들의 사체는 누가 봐도 그의 작품이었으니까.
“진작에 이럴 것이지! 내 말 맞잖아. 지금까지 방임한 거라니까?”
“굳이 그 많은 희생을 치를 이유가 있었나 싶네.”
아니나 다를까, 다이애나가 예상한 대로 유진의 과거 행동을 비판하는 헌터들이 툭툭 튀어나왔다.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 줬더니 보따리 내놓으라는 격이었다.
그녀는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그들을 쳐다보며 말했다.
“저런 소리를 듣게 해서 미안해요. 앨런이 이따위로 형편없는 공략대를 짰을 줄이야…….”
“됐어. 애초부터 B급이 절반이나 된다는 걸 알고 온 거니까.”
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전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푸확―!
마침 불쑥 튀어나온 폭탄마인을 소수혈인으로 썰어 버리면서 말이다.
반면에 공략대에는 블라드 유진을 옹호하는 대원들도 있었다.
“최종 보스를 상대하려고 힘을 아껴 둔 거 아닌가?”
“그래. 저렇게 진짜 같은 분신을 유지하려면, 에너지가 만만치 않게 들 테지.”
“저 사람은 우리 중에서 가장 강한 전력이잖아. 이런 잡몹에 힘을 쏟게 하는 건 옳지 않은 것 같아.”
물론 그들은 소수라 제대로 목소리를 내지는 못했다.
긁어 부스럼을 만든다며 동료들에게 눈총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그를 두둔하던 헌터들은 의기양양해질 수밖에 없었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엄청난 불이익이 다가와 공략대를 덮쳤기 때문이었다.
“크으으! 마, 마기가…….”
“숨쉬기조차도 힘들어. 왜 갑자기 이렇게 된 거지?”
어느 순간에 엄습해 온 마기가 대원들의 숨통을 옥죄었기 때문이었다.
A급 최상위에 해당하는 실력자들도 간신히 버티는 수준인데, 그 이하는 볼 것도 없었다.
몬스터의 위협은 없어졌지만, 걷기조차 힘든 지경에 처한 것이다.
처음에는 영문도 몰랐지만, 몇몇 헌터들의 말에 공략대는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
“블라드 유진이야. 그가 지금껏 마기를 막아 주고 있었던 거지.”
“대가리는 장식으로 들고 다니냐? 병신들아! 생각 좀 해 봐. 맨 처음 여기 들어왔을 때와 똑같잖아.”
“아무것도 안 한다고 하면서 지껄인 새끼 대체 누구냐?”
“아까보다 더 힘들어졌잖아!”
폭탄마인의 기습은 주의를 기울이면 극복할 수 있었다.
물론 전투는 어렵기 그지없었지만, 지금처럼 공략대 전체가 고통에 휩싸일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유진이 몬스터를 막아 주는 시점부터 잊고 있었던 고난이 시작되었다.
대원들은 그제야 그의 공로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하아…….”
긴 한숨과 함께 이마를 짚은 콜 해리스는 원망스러운 눈으로 헌터들을 돌아보았다.
공략대장으로서 읍소를 하긴 해야 했다.
하지만 이들의 역겨운 꼴을 보고 있자니, 부끄러움에 몸 둘 바를 모를 지경이었다.
세계 최고의 헌터를 모셔 놓고 이게 무슨 추태인가.
“당신들 내가 꼭 기억해 놓겠어. 실렌스 테라 이후로 내 눈에 띄기만 해 봐. 턱주가리를 열 조각으로 박살 내놓을 테니까.”
상당히 온건한 성격으로 소문난 콜 해리스였지만, 지금은 마치 악귀처럼 화를 내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블라드 유진을 향해서 걸어갔는데, 무거운 발걸음처럼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물어물하며 가만히 서 있자, 다이애나 로즈가 옆구리를 쿡 찔렀다.
얼른 사과부터 박으라는 의미였다.
“저…….”
하지만 공략대장 콜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유진이 손을 들어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기 때문이었다.
그는 감정 없는 눈빛으로 돌아보며 전방을 향해 고갯짓했다.
“준비해라.”
“무엇을 준비하라는 말씀이신지요.”
“아직도 정신 못 차렸나? 최종 보스다.”
쿠구궁!
블라드 유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묵직한 충격파가 대지를 휩쓸었다.
이윽고 공략대는 실렌스 테라에 똬리를 튼 최종 보스의 진면모를 확인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