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얄 블러드-169화 (170/226)

19화

루드벨과 칼트록스는 공략대가 실렌스 테라로 진입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이 물러나라는 명령을 내렸기에, 대규모 미궁 주변에서 몬스터를 찾아볼 수는 없었다.

“과연 저자가 우리 뜻대로 움직이겠습니까?”

칼트록스는 멀어지는 블라드 유진을 가만히 응시하며 말했다.

왠지 찜찜한 느낌이 들어서 그런지, 표정이 별로 좋지 않았다.

“확률은 꽤 높은 편이야. 떡밥도 던져 놓았고, 중국 쪽에는 일부러 미궁 성장을 억제해 두었으니까.”

“가장 심각한 곳으로 먼저 향할 거란 말씀이로군요.”

“물론 장담할 수는 없다. 저놈은 정말이지 예측을 불허하는 존재니까.”

“그렇습니다. 설마 제가 게일드 백작 각하의 영지를 물려받게 될 줄은…….”

백작급이라 하기에 칼트록스는 다소 손색이 있는 마족이었다.

그렇다고 아예 작위를 받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이미 선례가 존재했으니까.

멸사공 사르판 휘하의 백작급 마족들 또한 승계받을 당시에는 칼트록스와 비슷한 수준이었다.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저자에게도 약점이 있을 터. 예의 주시하고 있으니, 언젠가는 처죽일 날이 올 것이다.”

루드벨은 미궁 속으로 사라져 가는 공략대를 끝까지 지켜보며 말했다.

유진은 마계에서도 인정하는 초강자였다.

게다가 직접 만나는 순간 숨이 턱턱 막힐 정도의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았던가.

칼트록스가 긴장할 만도 했다.

“저걸 만드느라 얼마나 많은 마기를 들였는데……. 아깝지만 어쩔 수 없지.”

당연한 말이지만 대규모 미궁을 만드는 데는 엄청난 자원이 소모되었다.

마계 입장에서는 마기를 생산해 내는 공장을 지구에 박아 둔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곳을 털리게 생겼으니, 속이 쓰리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래도 큰 그림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일정 부분 손해도 감수해야만 했다.

특히나 저런 무지막지한 변수가 있을 때는 더더욱.

“돌아간다.”

“예.”

스스슷!

루드벨과 칼트록스는 짙은 마기의 안개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 * *

“갑자기 최종 보스들이 왜 사라진 건가요?”

블라드 유진이 공략대로 돌아오자, 다이애나 로즈는 왠지 살짝 벌게진 얼굴로 질문을 던졌다.

“그건 왜 묻는 거지?”

“마족들을 다 처리했다고 여길 지키던 놈들이 빠질 것 같지는 않아서요.”

그녀의 의문은 당연했다.

이제 지구상에 대규모 미궁은 단 두 곳뿐이었으니까.

그중 하나가 날아가게 생겼는데, 지키러 우르르 몰려왔다가 갑자기 돌아간다?

그러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었다.

그는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간단히 대답해 주었다.

“꺼지라고 했어.”

“네?”

“가라니까 가던데?”

“…….”

유진의 설명은 상식을 아스라이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다이애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뒤돌아보자, 키득거리는 엔세데스의 얼굴이 보였다.

이 상황이 어지간히도 웃긴 모양이었다.

“아주 참신했어. 근데 그게 사실이기도 하잖아?”

“이게 지금 재밌어요?”

“좀 많이? 당황한 얼굴이 꽤 볼 만하군.”

“뭐, 뭐라고요?”

그녀와 화룡왕이 아웅다웅하는 동안, 그는 발걸음을 돌려 콜 해리스를 찾았다.

공략대장은 방금의 전투로 전사한 인원을 꼼꼼하게 챙기는 중이었다.

대부분은 흔적조차 찾지 못했지만, 온전한 시체는 최대한 수습하려는 것이다.

“바쁜가 보군.”

“아, 유진 님. 거의 다 끝났습니다. 무슨 일이시죠?”

“지키는 놈들도 없는데, 슬슬 들어가지.”

“저 마기 속으로 말입니까? 아직 안전이 확보되지 않았습니다. 저 안에 어떤 놈들이 도사리고 있을 줄 알고…….”

콜 해리스는 부정적인 의견을 내놓았다.

수십이나 되는 대성체급 최종 보스와 마주하다 보니, 기가 눌린 모양이었다.

하긴 그럴 수밖에 없었다.

성체 미궁의 보스를 상대할 때는 거의 무조건 공략대의 수효가 훨씬 많았을 테니까.

대체 어디에서 저런 괴물들과 맞닥뜨릴 수 있겠는가.

공략대장의 머뭇거림도 충분히 이해가 가는 부분이었다.

물론 블라드 유진은 그런 사정 따위 봐줄 마음이 전혀 없었지만.

“그럼 알아서 해. 나는 지금 진입할 테니까.”

“예?”

콜 해리스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되물었지만, 그는 이미 몸을 돌려 걸어가고 있었다.

이윽고 다이애나 로즈와 이상한 붉은 머리 청년도 유진의 뒤를 따라 이동했다.

그러자 놀랍게도 숨통을 옥죄어 오던 짙은 마기가 좌우로 쫙 갈라지는 게 아닌가.

마치 홍해를 가른 모세처럼 말이다.

공략대장은 저도 모르게 성호를 그으며 중얼거렸다.

“오! 신이시여.”

콜 해리스가 보기에는 그가 기적을 일으키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블라드 유진이 어둠의 군주이자 피의 제왕이라는 사실은 꿈에도 모른 채.

* * *

‘이제껏 봐 왔던 그 어떤 미궁보다 고농도의 마기다. 이거 정말 대단하군.’

실렌스 테라에 입성한 유진은 눈을 감은 채 숨을 크게 들이켰다.

마치 향기로운 냄새를 맡는 듯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뒤이어 미궁에 입장한 다이애나 로즈의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이곳의 마기는 S급 헌터도 견디기 힘들 정도였기 때문이었다.

“B급이 버틸 수 있을지 의문이네요.”

“알아서 적응해야지.”

그의 주변에 있으면 그나마 좀 나을 터였다.

블라드 유진은 고농도의 맛있는 마기를 자연적으로 흡수하니까.

“으윽! 이런 미친!”

“뭐, 뭐가 이렇게 강해?”

아니나 다를까, 실렌스 테라로 들어온 헌터들은 마기에 적응하지 못했다.

외부보다 몇 배는 높은 압박에 들어오자마자 기절하는 B급 헌터도 있을 정도였다.

‘쯧! 쓸모없긴.’

그런 헌터들을 바라보던 유진은 작게 혀를 차며 마기를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피의 권능으로 강한 척력을 일으켜 주변의 마기 농도를 대폭 떨어뜨리는 것이다.

그러자 사색이 되었던 헌터들의 얼굴이 점차 원상태로 돌아왔다.

무슨 대단한 인도주의적 사상이 있어서 인간들을 도운 건 아니었다.

공략대를 제대로 써먹으려면 최종 보스까지는 멀쩡하게 살아 있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들어와 보니 알겠군. 지금까지와는 달라.’

실렌스 테라는 드라코 도무스와 차원이 다를 정도로 강력한 마기를 내포하고 있었다.

이번 미궁 성장 시간으로 인한 결과였다.

아마 삼두마룡 트리 페 디타스보다 훨씬 강한 놈이 나올 터.

공략대가 부하 몬스터 정도는 처리해 줘야 공략이 수월할 것이다.

“어? 이거 설마 유진 님이 하신 건가요?”

마기가 줄어들었다는 사실을 알아챈 다이애나가 문득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그는 가볍게 고갯짓하며 먼저 앞으로 걸어갈 뿐이었다.

“가지.”

“아, 네.”

시커먼 마기를 헤치며 앞으로 나아가자, 곳곳에서 시뻘건 안광이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역시 대규모 미궁답게 가장 약한 놈들도 상당히 위협적이었다.

하지만 그래 봤자 유진의 앞에서는 그냥 한칼 수준.

소수혈인을 뽑아 든 그는 검붉은 사람 형상의 몬스터들을 가볍게 도륙해 버렸다.

스이잉! 스핏!

“크르륵!”

블라드 유진이 가는 길을 따라서 사체들이 널브러지자, 다이애나는 간혹 떨어지는 재료 아이템을 주웠다.

“이놈들 이름이 폭탄마인(爆彈魔人)인데요?”

“폭탄? 그런데 왜 안 터져?”

그녀의 말에 답한 건 엔세데스였다.

유진은 폭탄마인을 베어 넘기며 이미 저만치 이동했기 때문이었다.

화룡왕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뒤에서 괴성이 들려왔다.

콰아앙!

“으아악!”

“이 새끼들 뭐야!”

반사적으로 돌아보니, 검붉은 괴인 몇이 공략대에 난입한 상태였다.

놈들은 폭탄마인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무지막지한 폭발을 일으켰다.

아무래도 최전방에서 놈들이 터지지 않은 건 터지기 전에 처리해서 그런 듯했다.

“폭발하는 몬스터라고?”

“네, 그런 거 같습니다. 공략대에 다소 피해가 있었어요.”

“터지기 전에 죽이면 되는 거 아닌가?”

“음. 그게…….”

다이애나 로즈는 살짝 곤란한 표정이었다.

공략대원들이 약해서 그렇다고 말하기에는 듣는 귀가 워낙 많았으니까.

영어로 물었는데, 다른 언어로 답할 수도 없고 말이다.

유진은 피식 미소를 지으며 그녀가 할 말을 대신해 주었다.

“어려운 모양이군.”

“네, 제가 뒤편으로 가야 할 것 같네요.”

“그래.”

다이애나는 광범위 보호 스킬을 펼치며 행렬의 후방으로 이동했다.

힐러들의 부담을 조금이나마 줄이기 위해서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화룡왕은 짓궂은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마치 성녀 같은 느낌이네. 안 그래?”

“제 역할을 찾아가는 것뿐이지.”

“괜찮은 애 같은데 취하지는 않는 건가? 뱀파이어들은 종종 인간 애인도 만들고 하잖아.”

“엘칸 차원에서는 그러는지 몰라도 여긴 아니야. 그나저나 아이템 소환은 땅을 얼마나 확보해야 하는 거지?”

엔세데스가 헛소리할 기미가 보이자, 유진은 대충 화제를 돌려 버렸다.

그런데 문득 화룡왕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아, 그게 말이지…….”

“문제라도 있나?”

“스읍! 아주 사소한 차질이 있었어.”

“왜 이렇게 질질 끄나? 얼른 말해.”

“너희 집에서 모은 영기를 포션 꺼내는 데 써 버렸어. 그 포션은 아까 쟤가 꿀꺽했고.”

“…….”

“어차피 네가 쓸 만한 걸 가져오려면, 미국에서 땅을 받아야 한다고. 소환 시기는 아마 거의 똑같을 거야.”

그의 눈빛이 돌변하자, 엔세데스는 황급히 손을 휘저으며 변명했다.

드래곤에게 언령을 통한 계약은 매우 중요한 법.

블라드 유진이 문제를 제기하면 화룡왕은 심대한 타격을 입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미국에서 영지를 충분히 얻는다면, 크게 차이 나는 수준은 아니었다.

덕분에 공략대의 전력 보전에 도움이 되기도 했고.

“좋아. 그건 그냥 넘어가지.”

“휴! 천 년 감수했네.”

엔세데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척.

잠시 잡담을 나누던 중, 문득 쉬지 않던 유진의 걸음이 멈추었다.

짙은 마기 속에서 뭔가를 발견하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그의 어깨 너머로 앞쪽을 살피던 화룡왕은 흥미로운 눈빛으로 작은 탄성을 토했다.

“호오? 이거 굉장한데?”

“이런 건 처음 보는군.”

블라드 유진과 엔세데스의 앞에 나타난 건 거대한 마법진이었다.

그 중심에는 이제껏 보아 왔던 폭탄마인과 닮은 무언가가 꿈틀거리며 몸집을 키우고 있었다.

겉으로는 그저 검붉은 몬스터들이 합체하는 거로 보였지만, 두 사람은 단박에 그 실체를 꿰뚫어 보았다.

이윽고 모두의 눈앞에 홀로그램 글귀가 떠올랐다.

[대규모 미궁의 중간 보스 ‘폭주마인 팔란스’가 잠에서 깨어납니다.]

[‘폭주마인 팔란스’가 주변 성체 미궁의 보스들을 흡수하여 거대 단일 개체로 거듭납니다.]

[‘군집’ 효과로 중간 보스가 기존보다 수배 이상 강화됩니다.]

쿠구구구구!

마법진 중앙에서 몸을 일으킨 폭주마인 팔란스는 정말이지 어마어마하게 컸다.

덩치만 놓고 보면, 입장 전에 만났던 대성체급 최종 보스보다 훨씬 거대했다.

“쿠오오오오!”

놈이 괴성을 내지르자, 굉음과 함께 저릿저릿한 마기가 지면을 강타하는 게 아닌가.

팔란스의 위용과 마주하게 된 유진은 내심 놀라고 있었다.

‘고작 중간 보스가 이 정도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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