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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얄 블러드-168화 (169/226)

18화

“아니, 뭐 이런 말도 안 되는 옵션이?”

다이애나 로즈는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유리병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엔세데스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거릴 뿐이었다.

“영지(靈地)를 소모해서 고작 그딴 걸 소환하는 건, 엄청나게 손해라고. 값은 제대로 치러야 한다. 알았냐?”

“영지가 뭐죠?”

“그 왜 블라드 유진네 집 정원 좀 빌리자고 한 거 있잖아.”

“아……. 무슨 아이템 어쩌고 한 거요?”

“지금 상황에서 최고의 한 수를 전해 줬는데, 뭐가 어째?”

“헷.”

“웃지 마라. 정든다. 그거 쓰면 최소한 영지 한 스팟은 줘야 해. 미국 땅덩어리 크다며? 그 정도는 할 수 있겠지.”

“알겠어요. 최대한 노력해 보죠.”

화룡왕이 건네준 건 유진의 집 정원에서 뽑은 영기(靈氣)로 아공간을 잠시 연 결과였다.

다이애나는 유리병을 다시 한번 홀로그램에 비추어 보았다.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옵션이어서 재차 확인해 보려는 것이다.

<아이템 정보>

명칭 : 대자연의 비약

등급 : EX

내구도 : 일회용

특징 : 화룡왕의 시그니처 아이템

효과 : 신성력과 마기를 제외한 모든 종류의 에너지를 회복함. 모든 스킬의 재사용 대기 시간 초기화. 사용 제한 없음.

현재 대상 회복률 : 100%

S급 헌터의 삶을 살면서 그녀 또한 다양한 최상위 아이템을 접해 보았다.

그중에는 당연히 에너지 회복 포션도 있었다.

하지만 단번에 100%를 회복시켜 줌과 동시에, 재사용 대기까지 초기화하는 물건이라니.

이러한 옵션은 지구상에 존재하지도 않을뿐더러, 이와 비슷한 것조차 본 적이 없었다.

대체 이런 미친 아이템을 제작할 수 있는 생산직 헌터가 어디 있단 말인가.

피식 미소 지은 엔세데스는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다이애나를 재촉했다.

그녀의 부재가 길어지자, 전황이 급속도로 나빠졌기 때문이었다.

“눈 빠지겠다. 구경 그만하고 얼른 마셔. 쟤들 다 죽게 놔둘 거야?”

“아, 넵! 그럴 수는 없죠. 갑니다!”

퐁!

유리병의 뚜껑을 제거한 다이애나 로즈는 대자연의 비약을 단숨에 들이켰다.

그러자 그녀의 눈에서 새파란 빛이 뻗어 나오는 게 아닌가.

체내를 가득 채우고도 에너지가 한참 남아서, 안광을 통해 빠져나오는 것이다.

“으오오오!”

푸른 서기에 휩싸인 다이애나는 돌연 괴성을 지르더니, 앞으로 뛰쳐나가기 시작했다.

체내에서 들끓어 오르는 열기로 인해, 가만히 서 있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오우! 한 돌격하는 여자였네.”

평소답지 않은 저돌적인 모습에 화룡왕은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버번위스키를 마셨다.

이 상황을 마치 재미있는 안줏거리 정도로 생각하는 듯했다.

두다다다다!

“어어? 다, 다이애나 님! 어디 가시는 겁니까?”

“저러다 최전방까지 가겠습니다. 안 막고 뭐 해요!”

난데없는 무지성 돌진에 공략대원들은 당혹스러운 목소리를 쏟아 냈다.

다이애나 로즈가 혹시나 개죽음이라도 당하면, 버티면서 빠지는 것조차 불가능해질 터였다.

그녀는 후방 지원의 대부분을 책임지고 있던 핵심 인물이었으니까.

“물약을 잘못 드시기라도 한 거 아냐?”

“이미 가져온 에너지 포션은 모두 소진되었습니다. 이상한 걸 드실 리는 없을 텐데요.”

“진짜 돌아버리겠군.”

콜 해리스는 이마를 짚으며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한창 지휘 중임에도 불구하고 이러는 이유는 간단했다.

이미 저 멀리 이동한 다이애나를 막을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저러다 비명횡사라도 당한다면, 그걸로 끝장이었다.

공략대장 콜은 혼자만이라도 탈출해야 하는 건 아닌지 진지하게 고민했다.

하지만 머릿속을 가득 휘젓던 번뇌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전방에서 터져 나온 주황색 섬광이 무지막지한 영향력을 발휘했기 때문이었다.

번―쩍!

[다이애나 로즈의 ‘폭풍의 주문’이 시전되었습니다. 권역 내의 아군 전체에 10분간 이로운 효과가 부여됩니다.]

[30레벨에 해당하는 부가 능력치가 적용됩니다.]

[스킬에 20% 향상 보너스가 붙습니다.]

[자체 회복력이 50% 상승합니다.]

“아아!”

눈앞에 주르륵 떠오른 글귀를 본 콜 해리스는 탄성을 지르고 말았다.

그녀의 광범위 버프가 너무도 반가워서 양팔을 번쩍 들며 쾌재를 부를 뻔했다.

공략대장 콜은 가까스로 욕구를 참고, 황급히 명령을 전달했다.

지금은 환호성을 지를 게 아니라, 기회를 살려야 할 때였으니까.

“포메이션 6으로 변경하고, 우측부터 공략합니다! 타겟 B부터 집중 공격!”

“예!”

용기백배한 공략대는 다이애나 로즈의 뒤를 따라 문어 형상의 최종 보스를 박살 내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그녀는 평소에는 거의 쓰지도 않던 공격 스킬을 마구 난사하는 중이었다.

“박멸의 일격! 박박 터뜨리기!”

콰광! 콰앙! 퍼어엉!

다이애나의 스태프에서 튀어나온 황색 기운은 의외로 굉장한 위력을 발휘했다.

그녀는 버프와 회복에 특화된 헌터지만, 그렇다고 공격 스킬이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광범위 버프 능력을 얻은 대가로 다른 기술들의 에너지 소모가 커졌다는 게 문제였다.

꽤 위력적인 스킬을 보유하고 있더라도 몇 번 사용하지도 못하고 방전되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차라리 공격은 봉인하고 강점을 살리는 게 훨씬 나은 선택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으오오오오!”

아직도 시퍼런 안광이 뿜어져 나올 정도로 다이애나 로즈의 몸에는 에너지가 넘쳐 흘렀으니까.

콰과과광!

연속으로 시전된 박멸의 일격과 박박 터뜨리기에 적중되자, 최종 보스가 크게 휘청이며 나자빠졌다.

그것도 공략대가 딱 두들겨 패기 좋은 위치에 말이다.

“지금이다! 조져!”

“문어숙회 맛 좀 보자!”

콰과과광!

대체 미국인들이 문어숙회를 어떻게 아는지는 모르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공략대는 기어코 대성체급 최종 보스의 숨통을 끊어 놓는 데 성공했다.

푸확―!

“으아아아!”

최후의 일격을 꽂아 넣은 근접 딜러 하나가 무기를 치켜들며 포효를 내질렀다.

그와 동시에 뒤에서도 우렁찬 함성이 터져 나왔다.

“이, 이겼다!”

“로즈! 로즈! 로즈! 로즈!”

달랑 S급 한 명에 절반 이상이 B급으로 구성된 공략대가 대성체급 최종 보스를 쓰러뜨릴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것도 최근의 미궁 성장 사건 때문에 기존보다 강해진 몬스터인데 말이다.

공략대원들은 다이애나 로즈의 성을 연호하며 연신 환호성을 질러 댔다.

대성체급 최종 보스를 쓰러뜨릴 수 있었던 건 순전히 그녀의 폭주 덕분이었으니까.

이윽고 그런 그들의 귓가에 곧장 불호령이 떨어졌다.

“뭣들 하는 겁니까? 아직 싸움은 안 끝났습니다!”

다이애나는 최전방에서 헌터들을 독려하며 긴장감을 다시금 불러일으켰다.

실렌스 테라를 둘러싼 최종 보스들은 수십 마리나 되었다.

시커먼 마기 속에 저런 것들이 얼마나 더 있을지, 가늠도 못 할 만큼 심각한 상황이었다.

고작 하나를 쓰러뜨렸다고 기뻐할 시간 따위는 없었다.

실제로 대규모 미궁을 둘러싸고 있던 놈 중, 네 마리가 적극적으로 공세에 가담하려 했다.

“이러면 다섯 마리를 동시에 상대해야 해. 이건 이길 수 없어. 일단 이쪽으로 빠지십시오!”

사색이 된 콜 해리스는 곧장 퇴각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대성체급 최종 보스들의 발걸음은 예상보다 훨씬 빨랐다.

진형을 가다듬으려고 잠깐 주춤하는 사이, 어느새 지척까지 엄습해 들어온 상태였다.

“빌어먹을!”

번―쩍!

공략대장의 욕지거리와 함께 전방에서 하늘색 섬광이 터져 나왔다.

“수호의 진언!”

다이애나 로즈의 광범위 버프가 다시 한번 펼쳐진 것이다.

폭풍의 주문이 거의 끝나 가고 있던 참이라, 매우 적절한 시점이 아닐 수 없었다.

[다이애나 로즈의 ‘수호의 진언’이 시전되었습니다. 권역 내의 아군 전체에 20분간 이로운 효과가 부여됩니다.]

[충격을 흡수하는 방어막이 생성됩니다.]

수호의 진언이 걸리자, 즉사 당하는 헌터들의 비율이 극단적으로 줄어들었다.

상대가 워낙 강하다 보니, 단 한 방에 유명을 달리하는 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방어막이 충격을 대부분 해소해 준 덕분에, 이제 그런 경우는 거의 발생하지 않았다.

공략대는 별다른 피해 없이 콜 해리스의 명령대로 물러날 수 있었다.

실렌스 테라와 거리를 벌리자, 최종 보스들의 공격이 순식간에 소극적으로 변했다.

쿠궁! 쿵!

반응이 뜨뜻미지근해진 놈들은 공략대를 주시하면서 원래 자리로 되돌아갔다.

애초부터 저들의 목표는 헌터들의 말살이 아니라, 대규모 미궁을 지키는 것인 모양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에 물러날 걸 그랬네.”

공략대장은 30%가량 줄어든 전력을 확인하고 눈살을 찌푸렸다.

콜 해리스의 선택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실렌스 테라 주변의 몬스터와 충돌하면서 대성체급 최종 보스들이 합류하게 된 거니까.

그래도 진작에 저들의 의중을 파악했다면,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음은 사실이었다.

물론 결과론적 관점일 뿐이지만.

“좋은 판단이었어요.”

“아닙니다. 더 빨리 빠졌어야 했는데…….”

“대성체 미궁을 공략했다고 생각해 보세요. 분명 지금보다 훨씬 큰 손실이 있었을 거예요.”

“그랬을까요?”

“네, 확실해요.”

원래 자리로 복귀한 다이애나 로즈는 침울한 표정의 공략대장을 위로해 주었다.

하지만 앞으로 어떡해야 할지 막막한 건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공략대의 가장 큰 전력인 블라드 유진이 백작급 마족을 상대하러 가버렸으니까.

아무래도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숨을 돌리던 다이애나의 시야에 이상한 광경이 포착되었다.

쿵! 쿠웅! 쿠구궁!

“어어? 저놈들……. 그냥 물러나는데요?”

실렌스 테라를 에워싸고 있던 대성체급 최종 보스들이 마기 속으로 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껏 철저하게 대규모 미궁을 지키고 있었는데, 난데없이 태도를 바꿔 버리다니.

정말이지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아니, 대체 왜?”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지 않나? 뭔가 노림수라도 있는 거 아냐?”

“그거야 확인해 봐야지……. 저 안으로 들어갈 사람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말이야.”

사라진 최종 보스들을 찾겠다고 짙은 안개 속을 수색할 수는 없었다.

인력이 부족하거니와, 그런 미친 임무에 지원할 이는 존재치 않을 테니까.

“왜 갑자기 몸을 숨긴 걸까요? 이 상황에서 기습할 리는 없을 텐데요.”

다이애나는 엔세데스에게 돌아와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이 무시무시한 이계의 존재라면, 뭔가를 감지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간이 의자에 앉아서 유유자적 풍류를 즐기던 화룡왕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했다.

“갔어.”

“네?”

“다들 저쪽으로 쭉 이동하던데?”

화룡왕의 기감은 예상보다 훨씬 넓었다.

실렌스 테라 너머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놈들의 움직임을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지만, 믿지 않을 수는 없었다.

엔세데스의 음성에는 확신이 깃들어 있었으니까.

그건 그렇다 쳐도 아직 왜라는 질문이 남은 상태였다.

“왜요?”

“그건 네 애인한테나 물어봐.”

화룡왕은 턱짓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러자 다이애나 로즈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아, 아직 그런 관계는 아닌데요?”

“농담도 못 하냐? 그나저나 되게 좋아한다?”

“…….”

엔세데스의 말장난에 걸려들었다는 사실을 알아챈 그녀는 민망한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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