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이, 이런 미친!”
“악몽이야. 이건 뚫을 수가 없어!”
“젠장! 지금이라도 돌아가야 해.”
공략대원들은 심각한 혼란에 빠져 있었다.
대규모 미궁의 근처에 도착했지만, 입장은커녕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했다.
대성체 미궁의 최종 보스급 몬스터 수십 마리가 모여, 실렌스 테라를 지키는 중이었으니까.
게다가 정체불명의 인물들이 몬스터 사이에서 암약하고 있었다.
‘마족이로군.’
블라드 유진은 놈들의 정체를 단박에 꿰뚫어 보았다.
아무래도 둘밖에 남지 않은 대규모 미궁이니만큼, 마계에서도 중히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백작급 마족을 둘이나 파견할 리는 없을 테니까.
‘그때 그놈들보다 더 뛰어나 보이는데.’
레벨이 2천에 육박하다 보니, 이제 백작급 마족 정도는 움직임만 봐도 수준을 얼추 짐작할 수 있었다.
척.
관망만 하던 그가 발걸음을 옮기자, 문득 다이애나 로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나가실 건가요? 그럼 오른쪽 저 녀석부터 부탁드려요.”
전황이 워낙 좋지 않아서 그런지, 그녀의 음성에는 다급함이 가득했다.
진작부터 도와 달라고 말하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저 정도는 알아서 처리할 수 있겠지?”
“설마요. 버티는 것도 힘든 상황인데요. 여기서는 공략에 참여 안 하실 건가요?”
“저놈들을 얼른 처리하지 않으면, 피해가 더 클 거다. 난 저기로 먼저 가야 해.”
다이애나는 유진이 가리킨 곳을 의문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이내 당황스러운 어조로 질문을 던졌다.
“아니, 어째서 사람이 몬스터를 돕고 있는 거죠?”
“저게 인간이라고 생각하나?”
“아! 그럼 설마……. 마족? 그때 하나 빼고는 다 처리했잖아요. 그런데 왜 둘이죠?”
“그놈들이 아니야. 아마 다른 무리인 듯하군.”
“몬스터들은 공략대 전력만으로 상대해야겠네요. 최대한 흔들어서 협력하지 못하도록 해 보겠습니다.”
“됐어. 살아남는 데만 집중해. 공략대장 상태를 보아하니, 그것도 힘들겠다.”
“아, 네.”
다이애나 로즈는 겸연쩍은 표정으로 콜 해리스를 힐끔 쳐다보았다.
저자도 전선에서 꽤 많은 경험을 쌓은 인물이었지만, 이런 상황은 처음인 듯했다.
대성체급 최종 보스를 한꺼번에 수십 마리씩 만날 줄은 몰랐을 테니까.
다행히 주제는 아는 모양인지, 무리하게 공략하지 않고 버티면서 빠지는 데만 집중하고 있었다.
‘저 정도면 제 역할을 해 주는 거지.’
유진이 공략대에 바라는 점이 바로 저런 모습이었다.
걸리적거리는 놈들의 시선을 끄는 일 말이다.
난장판이 되어 가는 전장을 깡그리 무시한 그는 두 마족에게 접근했다.
놈들은 짙은 마기에 몸을 숨기고 보스 몬스터들을 조종하는 중이었다.
블라드 유진이 지척까지 다가온 사실도 모른 채.
“음?”
“헛!”
그가 암흑화를 해제하며 불쑥 나타나자, 두 마족은 헛바람을 들이켜며 무기를 뽑아 들었다.
누군가가 이토록 가까이 접근할 줄은 꿈에도 몰랐던 모양이었다.
꽤 강렬한 반응에 유진은 피식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백작급인 듯한데, 누구 휘하에 있나.”
“……당신에게 신분을 알려 줄 의무 따위는 없다만.”
잠시 당황하긴 했으나, 마족들은 그를 곧장 알아보았다.
이제 마계에도 블라드 유진의 이름이 꽤 많이 알려졌기 때문이었다.
하긴 멸사공 사르판을 단신으로 격파한 인물인데, 소문이 안 퍼질 수가 없었다.
그는 두 마족을 응시하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나는 여길 돌파할 작정이다. 그냥 물러나는 게 신상에 좋을 거야.”
“불가침을 깨겠다는 건가?”
“그게 아직도 통용되는 거였나? 사르판 이후로 깨진 줄 알았는데.”
“멸사공은 어차피 우리 쪽이 아니니, 조약은 유효하다. 그러니 더 이상 문제 일으키지 말고 되돌아가는 게 나을 것이다.”
“천즈한과 함께 일하나 보군.”
“대답할 이유가 없다.”
상대는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답했지만, 유진은 기존과 다른 분위기를 감지해 냈다.
뒤편에 서 있던 붉은 머리 녀석의 움찔거리는 동작이 미세하게 느껴졌다.
‘거짓이다.’
동료의 반응을 눈치채지 못한 모양인지, 그와 이야기하던 자는 떳떳하게 고개를 쳐들었다.
“거짓말이 서투르네.”
“그게 대체 무슨 헛소리인가. 우린 그쪽과 별로 관련되어 있지 않다.”
“다 아니까 연기할 필요 없어. 기회를 주지.”
“무슨 기회 말이냐?”
“부정하지 않는 걸 보니, 역시 천즈한 측의 마족인가.”
“…….”
유도 신문에 걸려든 마족은 눈가를 미묘하게 일그러뜨리며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더니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의 동료 때문에 거짓말이 들통났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것이다.
“넌 백작이나 된 놈이 속마음 하나 감추지 못해?”
“죄송합니다. 이게 첫 임무라…….”
“환장하겠군.”
아무래도 붉은 머리 녀석은 경험이 일천한 모양이었다.
사르판 휘하에 있던 백작급 마족들보다 훨씬 더 말이다.
“게일드의 후임인 듯한데, 그럴 수 있지. 작위를 받은 지 얼마 안 되었을 테니.”
“그래. 알았다. 알았으니까 그만 좀 넘겨짚어.”
“그게 사실이지 않나.”
“젠장할!”
몇 마디 말만 섞고도 정보를 쏙쏙 빼 가는 유진의 모습에 상대는 두손 두발을 다 들고 말았다.
그와 심리전을 해 봐야 자신들만 불리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터놓고 이야기하지. 내가 누군지는 이미 알 테고, 뭐부터 알려 줘야 하지? 이곳에 온 이유?”
“미궁을 정화하러 왔겠지.”
“맞아. 이미 이쪽 인간들하고 계약한 거라, 무를 수가 없어. 그러니 좀 꺼져 줘야겠는데.”
“으음!”
선임으로 보이는 왜소한 덩치의 검은 머리 마족은 불쾌한 표정으로 헛기침했다.
모욕적인 언사를 듣고도 대항하기가 망설여졌기 때문이었다.
사르판이 공작치고 약하다곤 하나, 백작급이 비빌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눈앞의 블라드 유진은 그런 멸사공을 찢어발긴 장본인이니, 섣불리 싸움을 걸 수가 없었다.
그들이 망설이고 서 있자, 그는 가볍게 손을 흔들며 계속 말을 이었다.
“그렇다고 바로 가라는 건 아니야. 적당한 정보 교환을 하면 좋겠는데. 어떤가.”
“뭘 원하지?”
“여길 지키고 있는 이유 정도면 충분해. 이왕이면 이름까지도 알았으면 좋겠군.”
“무슨 이름?”
“너희와 천즈한이 모시는 공작까지면 되겠네.”
“고작 네 목적을 알려 주는 대가로는 과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원하는 걸 말해 봐. 가능한 한 들어주지.”
유진의 제안에 상대는 심각한 고민에 빠진 듯했다.
하지만 결론은 금방 나올 수밖에 없을 터였다.
싸우거나 빈손으로 물러서는 선택지보다는 정보 교환이 그나마 나았으니까.
“중국의 대규모 미궁. 거긴 어떻게 할 거지?”
“대마궁(大魔宮) 말인가?”
“그래. 거길 공략하지 않는 조건이라면, 제안에 응할 마음이 있다. 천즈한과 맺은 불가침처럼 말이야.”
“멸사공과 계열이 아예 다르다고 말한 건 너다. 난 공격하기 전에 일단 대화로 해결하려 했으니, 약속을 어긴 건 아니지 않나?”
“그, 그건 그렇긴 하다만…….”
“중국의 대마궁은 건드리지 않겠다. 어차피 거긴 접근조차 못 하게 막을 테지. 천즈한이 중국에서 꽤 영향력 있는 거로 아는데.”
“아마도 그럴 것이다. 그래도 확약을 받아 두는 게 좋지. 그럼 협상 체결이로군.”
“물어본 거나 대답해. 너의 이름은?”
“루드벨.”
지금껏 그와 이야기를 나눴던 자는 루드벨, 그 뒤의 붉은 머리는 칼트록스였다.
이들은 천즈한과 함께 극열공 마즈단을 섬기는 백작급 마족이었다.
“좋아. 이름은 알았고, 대규모 미궁을 지키려는 이유가 궁금하군.”
“간단한 거 아닌가? 최근 지구에서 마계의 영향력이 줄어들고 있잖아.”
“음.”
루드벨의 대답에 유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오른손을 펼쳐 보였다.
사실 미궁의 세가 약화한 건 그의 활동 때문이었다.
드라코 도무스와 미궁 군체, 안테리오르 타워와 천공의 성까지.
인간의 힘으로는 해결하기 힘들었던 난관들이 블라드 유진에 의해서 모조리 분쇄되었으니까.
게다가 이제는 실렌스 테라도 박살 내려는 중이지 않았던가.
이대로 가다간 지구에서 미궁이 아예 축출될 지경이었다.
“그래서 성장 사건을 벌인 건가? 전 세계의 미궁이 날뛰는 중이던데.”
“그건 또 이야기가 달라.”
“다르다니, 무슨 뜻이지?”
“거기까지는 말해 줄 이유가 없을 것 같네. 조건을 넘어서는 정보잖아.”
루드벨이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유진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정보 교환 조건에는 없는 내용이었지만, 칼자루를 쥔 건 그였다.
자못 불편한 분위기를 감지한 루드벨은 겸연쩍은 표정으로 곧장 입을 열었다.
“말 한번 잘못했다고 아예 쳐죽일 기세네. 무서워서 입도 못 열겠어.”
“헛소리 그만하고 계속해 봐.”
“우리도 잘은 몰라. 유럽 쪽에서 매우 강한 힘이 발현되고 있다는 것밖에는.”
“힘?”
“뭔가 이상한 게 들어와서 분탕을 치는 중이야. 그 반작용으로 미궁의 마기가 자연히 상승한 것이고.”
“나름 좋은 정보로군. 더 알고 싶은 거 있나?”
“음……. 저놈은 왜 여기 있는 거지?”
잠깐 생각에 잠겼던 루드벨은 공략대의 한쪽 구석을 가리키며 질문을 던졌다.
문득 뒤를 돌아보니, 다이애나 주변에서 얼쩡거리며 버번위스키를 들이켜는 엔세데스가 보였다.
마계는 엘칸 차원에도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보니, 레드 드래곤의 존재 또한 아는 모양이었다.
블라드 유진은 어깨를 으쓱이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답했다.
“놀러 왔대.”
루드벨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그와 화룡왕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엘칸에서도 그러더니, 어지간히 미친 드래곤이로군.”
* * *
“크윽! 더, 더 이상은 못 버팁니다!”
“버프! 버프 한 번만 더 해 주십시오!”
유진이 마족들과 담판을 짓는 동안, 공략대는 지옥 같은 전투를 벌이는 중이었다.
전장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어찌어찌 한 마리를 무력화하기는 했는데, 더 이상의 성과는 이룰 수가 없었다.
쓰러뜨린 하나마저 완전히 숨통을 끊은 게 아니었으며, 아직 상대는 수십 마리나 남아 있었으니까.
“유감입니다만, 저도 당장은 해 드릴 수 있는 것이…….”
공략대 전체를 케어하느라, 다이애나 로즈는 그야말로 녹초가 되어 있었다.
힐러들의 부족한 역량까지 책임져야 했기에, 이미 한계를 넘어선 지 오래였다.
아무래도 S급이 혼자뿐이라, 그녀에게 부담이 가중될 수밖에 없었다.
다이애나는 술만 퍼마시고 있는 엔세데스를 향해서 시선을 돌렸다.
화룡왕이라면 이 상황을 타개하게 해 줄 충분한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난 개입 못 해. 잡졸들도 아니고, 마계에서 심혈을 기울인 작전이잖아. 여기서 존재를 드러냈다간 내 신상에 재미없는 일이 벌어질 거라고.”
“정말 도움 안 되는 분이시네요.”
“어허! 나한테 뭐라고 할 시간에 스킬 한 번 더 쓰겠다. 아, 그럴 에너지가 없다고 했지? 뭐 그럼 이거라도 좀 줘?”
휘리릭! 턱!
엔세데스는 새파란 액체가 담긴 유리병을 그녀에게 던져 주며 술을 들이켰다.
다이애나는 어이없는 눈빛으로 화룡왕을 쳐다보았다.
이 상황에서 술 같은 걸 마셔서 뭐 어쩌자는 말인가.
그런데 무심코 홀로그램을 통해서 병을 살펴본 그녀의 눈이 한순간에 휘둥그레졌다.
“어? 이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