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스위트룸에서 빠져나온 앨런 후버와 다이애나 로즈.
두 사람은 호텔 응접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워낙 유명한 인물들이다 보니, 적당히 트인 공간이 필요했다.
그러지 않으면, 파파라치들이 따라붙어 온갖 괴상한 소문이 양산될 테니까.
“나한테 할 말 없나?”
“무슨 말요?”
“허! 못 본 사이에 되게 뻔뻔해졌군. 천공의 성인지 뭔지, 그런 곳에도 멋대로 참가하고 말이야.”
“거긴 영국인 자격으로 간 건데요?”
“알지? 행사 팽개치고 한국으로 도망간 것부터 해서 전부 계약 위반이야.”
“도망이요? 그게 도주한 거로 보이셨나요?”
“그럼 꿈과 희망을 찾아서 떠나기라도 한 건가? 네가 주 무대로 활동했던 미국은 내버려 두고, 완전히 다른 나라에서? 그딴 소리를 팬들이 들으면, 참 자알했다고 하겠군.”
앨런은 어깨를 으쓱하며 비아냥거렸다.
그녀가 와처스 길드와 함께하며 큰돈을 번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연예계 활동을 할 거였으면, 애초부터 장기 계약 따위는 하지도 않았을 거였다.
아무리 자신을 발굴해 준 와처스 길드라고 해도 말이다.
다이애나는 앨런 후버를 똑바로 노려보며 턱을 까딱거렸다.
살짝 오만해 보이는 것이 마치 누군가와 닮은 듯한 느낌이었다.
“계약할 때, 저를 전선에서 뺀다는 내용은 없었잖아요. 왜 계속 연예계 활동만 시키는 거예요?”
“하! 또 그 소리네. 그게 훨씬 더 도움이 되니까 그런 거지.”
“저한테는 전혀 도움 안 되는데요.”
“네가 활동해서 벌어들인 돈이면, 전선에 더 큰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는 걸 왜 몰라.”
“그래요? 그럼 우리가 한창 활약할 시기보다 전황이 훨씬 나아졌겠네요?”
“그건 그때와 상황이 다르잖아.”
“미궁 성장 사건이 벌어지기 이전에도 그랬다고 할 수 있어요?”
“…….”
그녀가 조목조목 따지고 묻자, 말문이 막힌 앨런은 괜히 생수를 하나 까서 조금씩 들이켰다.
전선이 길어질수록 미궁 정화와 방어가 힘든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돈을 아무리 푼다고 해도 뛰어난 헌터를 양성하는 건 한계가 있었다.
인류의 모든 힘을 합치고도 해결할 수 없었던 것이 바로 미궁 사태가 아니었던가.
게다가 앨런 후버는 자신이 한 말처럼 다이애나 로즈로 인해 발생한 수익을 전선에 왕창 투입하지도 않았다.
그저 다른 길드와 똑같은 수준의 기금만 조성해서 지원할 뿐이었다.
“설마 끝까지 숨길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셨어요?”
“따지자면 나도 할 말이 없지는 않아. 일단은 길드의 성장이 우선이었으니까. 전선 지원은 나중에 해도 충분히…….”
“성장은 대체 언제까지 할 생각이시죠? 지금 와처스 길드의 가치가 얼만데요.”
“좋아. 알았어. 네 제안을 받아들이마. 지금부터는 전선에 확실히 투자해 주겠어. 길드를 거덜 내지 않을 수준에서 최대한. 됐지?”
“되긴 뭐가 돼요?”
“이제 방황 그만하고 돌아오란 말이야. 언제까지 저 사람 곁에 붙어 있을 건데?”
“그거야 제 마음이죠.”
“아까도 말했지만 계약 위반이야. 내가 불편한 선택을 하지 않도록 해 주길 바라.”
앨런이 말하는 불편한 선택이란, 소송을 걸게 하지 말라는 의미였다.
와처스 길드가 법적 대응에 나서면, 무단이탈을 했던 그녀는 엄청난 위약금을 물어야 할 터였다.
계약 파기까지 가게 되면, 천문학적인 금액이 나올지도 몰랐다.
하지만 다이애나는 전혀 겁먹은 표정이 아니었다.
“미안하지만 뜻대로 되지는 않을 거예요. 블라드 유진 님과의 계약은 제 덕분에 따낸 거 아니었던가요?”
“아, 젠장.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겠어?”
유진과의 대규모 미궁 정화 계약을 들먹이자, 앨런 후버는 마른세수를 했다.
사실상 이 건은 그녀의 공이 컸으니, 뭐라고 할 수조차 없었다.
다이애나 로즈에게 새로운 무기가 생긴 것이다.
자신을 연예계 쪽으로만 팔아먹으려던 와처스 길드에 이제야 한 방 먹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고작 여기서 멈출 마음이 전혀 없었다.
“이렇게까지 해야겠어요. 계약 파기하죠.”
“그건 당사자하고 하는 거지. 이젠 네가 관여할 수 있는 게 아니야.”
“무슨 소리예요? 내가 당사잔데.”
“뭐?”
“블라드 유진 님과의 계약이 아니라, 제걸 파기하자는 거잖아요. 말귀 못 알아들어요?”
“너 지금 대체…….”
앨런은 큰 충격을 받은 듯, 떨리는 손으로 다이애나를 가리켰다.
와처스 길드와 그녀의 인연은 결단코 얕지 않았다.
어중간한 능력으로 빛을 보지 못하던 다이애나 로즈를 발굴한 게 바로 앨런 후버였으니까.
이 날렵하게 생긴 미중년이 없었다면, 전무후무한 S급 광범위 버퍼도 존재치 않았을 것이다.
날개를 제대로 펼치지도 못한 채, 진로를 바꿨을 테니까.
그녀의 매몰찬 발언이 앨런의 심장을 후벼팔 만도 했다.
아마 계약 파기는 아예 고려 대상도 아니었을 터였다.
“아무리 그래도 그건 너무하지 않나?”
“맞아요. 너무하죠. 솔직히 아저씨 도움이 컸으니까요. 그래서 저는 와처스 길드와 평생 함께할 마음을 먹고 있었어요.”
“그런데 대체 왜 그런 말을 한 거지? 내가 상처라도 받길 원했나?”
“아뇨. 이유는 간단해요. 제가 몸담고 있어야 할 와처스 길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그게 무슨 의미지?”
“아직도 모르시겠어요? 와처스는 이제 헌터 길드가 아니에요. 그냥 엔터테인먼트사지.”
“…….”
다이애나에게 이런 말을 들을 줄이야, 앨런 후버는 꿈에도 예상치 못했다.
그녀는 항상 길드에 헌신적이었고, 어떤 임무도 확실하게 해내는 요인이었으니까.
그게 전선 지원이든, 대도시 부유층을 대상으로 한 행사든 상관없이 말이다.
“이러면 위약금이 엄청날 거다.”
“소송하고 싶으면 하세요. 그까짓 돈, 내죠. 뭐. S급 헌터인데, 설마 굶어 죽기야 하겠어요?”
“이미지에 치명적일 수도 있어.”
“이제 그런 거 신경 안 쓸 건데요. 누구는 돈이고, 남의 시선이고 다 무시하면서도 잘 사시더라고요.”
“아니, 너한테 그런 영향을 준 게 대체 어떤 샊…….”
앨런은 말을 하다가 순간적으로 멈칫하고 말았다.
빙그레 웃는 다이애나 로즈의 얼굴과 누군가가 겹쳐 보였기 때문이었다.
함부로 입에 올릴 수 없는 바로 그 사람 말이다.
“아마 생각하신 게 맞을 거예요. 고소는 알아서 하시고, 그럼 전 갑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무감정한 눈빛으로 앨런 후버의 전신을 훑었다.
소름 끼치도록 차가운 분위기에 앨런은 다이애나를 붙잡지 못했다.
무슨 짓을 해도 먹힐 만한 상황이 아님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환장하겠군.”
* * *
앨런 후버는 일단 계약 파기 건을 제쳐 두고, 공략대 결성에만 집중했다.
덕분에 200명에 달하는 헌터를 모을 수 있었다.
물론 대부분의 전력이 전선에 나간 탓에 수준은 그리 높지 않았다.
무려 절반가량이 B급 헌터로 구성되어야 할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블라드 유진은 공략대원들의 등급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출발하지.”
“예.”
공략대에 출발 명령을 내린 앨런 후버는 그에게 인사하고 그대로 빠졌다.
지금부터는 공략대장인 A급 딜러 콜 해리스에게 전권을 위임할 것이다.
“자네는 안 가나?”
유진이 슬쩍 돌아보며 질문하자, 앨런은 어색하게 웃으며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저는 할 일이 남아서 말이죠. 함께하지 못하게 됐습니다.”
그러면서 그의 옆을 힐끔거리는 걸 보니, 아무래도 다이애나 로즈와 관련된 일인 모양이었다.
이미 블라드 유진은 그녀와 와처스 길드 간의 계약 파기 건에 관해서 알고 있었다.
다이애나가 조언을 구하기 위해서 상황을 알려 주었으니까.
‘꽤 쓸 만한 놈인 거 같은데, 하수인으로 만들어 버릴까?’
앨런에게 혈성쇄혼술을 건다면, 그녀의 소송 건은 단박에 해결될 터였다.
하지만 그는 이내 고개를 미세하게 가로저었다.
다이애나 로즈는 유진이 개입하지 않아도 혼자서 잘 이겨 낼 테니까.
게다가 앨런 후버 말고도, 하수인으로 써먹을 만한 놈이 널리고 널린 게 미국이었다.
“움직일 모양이로군.”
“아마 그렇겠죠. 하지만 괜찮아요. 돈이 그냥 줘 버리면 그만이니까요.”
그와 함께 지내다 보니, 그녀 또한 금전에 별 미련이 없어진 상태였다.
돈보다 더 중요한 가치가 많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니까.
“여기부터는 배를 이용할 겁니다. 타시죠.”
콜 해리스가 손바닥을 펼쳐 보이자, 블라드 유진은 망설임 없이 거대한 회색 선체에 탑승했다.
이번 작전에는 스피어헤드급 원정고속수송함이 동원되었다.
벌링턴함은 200명이 넘는 공략대를 태우고, 실렌스 테라가 있는 델라웨어 주를 향해 나아갔다.
이른 아침에 출발한 공략대는 오후쯤 되어서야 뭍을 밟을 수 있었다.
예상대로 해안가에는 지옥도가 펼쳐진 상태였다.
고농도의 마기가 사방에 가득한 데다가, 웬만한 미궁의 최종 보스급 몬스터가 시시때때로 돌아다녔다.
여기서 유진과 다이애나가 빠진다면, 공략대는 1시간도 버티지 못하고 몰살당할 것만 같았다.
“저, 저런 데를 가는 거였어?”
“미친, 아무리 블라드 유진이라는 자가 있다지만 이건 좀…….”
공략대원들은 본격적으로 전투를 벌이기도 전에 겁을 집어먹은 상태였다.
전선에서 날고 기던 베테랑 헌터라도 눈앞의 광경과 마주한다면, 저런 반응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대규모 미궁 근처는 무지막지하게 위험한 곳이었다.
더군다나 실렌스 테라가 성장하고 있다는 소문까지 들려오지 않았던가.
“괜찮을까요?”
다이애나 로즈마저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블라드 유진은 백사장을 걸어가며 무심 한 마디를 툭 내뱉었다.
“겁먹었으면 다 꺼지라고 해.”
그의 음성은 순식간에 공략대 전체로 퍼졌다.
자기들끼리 웅성거리는 와중에도 헌터들의 신경은 유진을 향하고 있었으니까.
게다가 하필이면 영어로 말했기에, 모두가 알아듣고 말았다.
공략대원들의 분위기는 마치 들불처럼 급속도로 타올랐다.
“아니, 누가 쫄았다고 그래!”
“여기 겁먹은 놈 있어?”
“우리가 이까짓 마기와 몬스터에 쫄 줄 알아?”
미국의 헌터 사회는 마초적 성향이 매우 강했다.
그의 한 마디는 그런 공략대원들의 자존심을 제대로 건드린 모양이었다.
소극적이던 공략대에 활기가 쫙 돌더니, 곧장 블라드 유진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남자들만 그러는 게 아니라, 여성 헌터들 또한 분위기에 편승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다이애나 로즈는 전선에서 함께 싸우던 전우들을 떠올렸다.
그녀는 그의 발언에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후후! 미국 헌터들 다루는 법은 또 언제 배우셨대?”
사실 유진은 진짜 가도 된다는 의미로 한 말이었다.
저들이 없다고 해도 공략에 큰 지장은 없을 테니까.
하지만 다이애나는 전혀 다르게 받아들였다.
미국 헌터들의 호승심을 자극하여 용기를 북돋았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녀는 왠지 신난 발걸음으로 힐러들과 함께 이동했다.
하지만 호기롭게 출발한 공략대는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서 절망을 겪고 말았다.
아직 실렌스 테라에 입장하지도 않은 상태임에도 불구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