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얄 블러드-165화 (166/226)

15화

“으어어! 이, 이건 도저히…….”

현성 건설 신헌영 부사장은 시뻘게진 눈으로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항상 말끔하게 빗어 넘기던 머리칼은 엉망이 되었고, 명품 정장 또한 지저분해진 상태였다.

호화로운 삶을 살던 재벌 2세가 아니라, 여느 기업의 실무자와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미친 듯이 바쁘면, 자신을 돌아보지 못하는 건 누구나 똑같은 법이니까.

“부사장님, 서부 전선에 물량 부족 현상이 심화하고 있습니다. 당장 오늘 오후까지 콘크리트 블록을 보내지 않으면 작업에 차질이 생길 겁니다.”

“거긴 분명 어제 보냈잖아?”

“벌써 다 썼다던데요.”

“아니, 대체 그게 무슨…….”

“어제 받아 온 분량만큼 더 밀어 넣어야 합니다.”

“돌아 버리겠군. 생산직 길드에 연락을 넣어 봐. 아니, 내가 직접 해야겠어.”

부하 직원에게 업무 지시를 내리려던 신헌영은 손을 휘저으며 휴대 전화를 들었다.

일을 절차대로 진행했다가는 콘크리트 블록을 한 조각도 받지 못할 터였다.

부사장이 직접 읍소라도 해야 블라드 유진의 일정에 간신히 맞출 수 있었다.

“……아, 네네. 물론입니다. 당연히 웃돈도 얹어 드려야죠. 급하게 부탁드리는 건데요. 예, 들어가십시오.”

뚜루륵!

허공에 연신 인사를 해 대며 전화를 끝낸 신헌영은 긴 한숨을 내쉬며 간이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인맥을 활용하고 추가 자금을 들여서 어찌어찌 따라가고는 있었지만, 이미 현성 건설은 한계에 봉착했다.

수용 능력을 아득히 넘어서는 일을 하다 보니, 이곳저곳에서 실수가 터져 나왔다.

신헌영 부사장이 현장을 뛰어다니며 활약하지 않았다면, 진작에 돈좌되었을 사업이었다.

“하아! 조금만 늦춰줬으면 좋겠는데…….”

이게 다 유진의 엄청난 공략 속도로 인하여 벌어진 일이었다.

하지만 신헌영은 공략 지연 요청을 할 수가 없었다.

최전방의 블라드 유진과는 아예 만날 수조차 없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애초부터 준비가 다 되었다며 자신만만하게 뛰어들었던 사업 아닌가.

뒤늦게 힘들다며 멈추기에는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다.

그랬기에 일주일이 넘도록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베이스캠프에 나와 있는 것 아니겠는가.

게다가 한 번 크게 틀어졌던 유진과의 관계를 생각하면, 최대한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여야만 했다.

조립식 탁자에 얼굴을 대고 잠시 휴식을 취하는데, 부하 직원이 텐트 앞으로 빠르게 다가왔다.

“부사장님.”

“허! 또 뭐야?”

“북부 전선에 웨이브가 발생하여 추가 전력 투입이 필요합니다. 일단 제 판단으로 전력을 투입하긴 했으나, 사실 조금 부족한 상황입니다. 게다가 서부 전선의 공략 진척도가 생각보다 더 빠릅니다.”

“으아악! 안 해! 이제 안 해! 실무 나간 놈들이 알아서 판단하고 결정하라 해!”

“현실적으로 부족한 자원을 실무자들이 극복하는 건 무리입니다.”

“아니, 없는 걸 어떻게 만들어 와? 내가 확보한 블록으로 무조건 끼워 맞추라고! 이 자식들아!”

우당탕!

상상을 초월하는 격무에 지친 신헌영은 드디어 폭발하고야 말았다.

아랫사람을 굴려서 보고만 받는 식으로 편하게 사업을 진행하는 건, 평시에나 가능한 일이었다.

지금처럼 매 순간 중요한 판단을 해야 하고, 긴급 자금을 투입해야 할 때는 리더의 역할이 중요했다.

신헌영 부사장 또한 지금까지 인맥과 자본력을 총동원하여, 전선 구축을 해 오지 않았던가.

그래놓고 일에서 손을 떼겠다니, 이건 사업을 접자는 이야기나 다름없었다.

물론 부하 직원들은 신헌영이 진심으로 저런 말을 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간 스트레스가 잔뜩 쌓여서 단순히 화풀이하는 거라 여겼다.

물론 딱 한 사람만 빼고.

“하기 싫어?”

난데없이 들려온 이질적인 목소리에, 씩씩거리던 신헌영 부사장은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그러자 곤란한 표정의 부하 직원과 은발의 미청년이 함께 눈에 들어왔다.

놀랍게도 최전선에 나가 있어야 할 블라드 유진이 현성 건설의 베이스캠프에 나타난 것이다.

“어어? 여, 여긴 대체 어떻게…….”

“얼추 다 끝났으니, 돌아왔을 뿐이다. 근데 계약 파기라도 하려는 모양이지?”

“그, 그, 그, 그럴 리가 이, 있겠습니까? 아하하.”

신헌영은 심각하게 말을 더듬으며 얼른 자세를 바로 했다.

자신이 넘어뜨린 조립식 탁자와 간이 의자를 주섬주섬 정리하면서 말이다.

부사장의 이마와 등줄기에는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업무 효율 문제도 있었지만, 애초에 신헌영이 이곳에 온 이유가 무엇이었던가.

유진에게 얼굴도장을 제대로 찍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방금의 실수 한 번으로 이제껏 쌓아 온 이미지가 모조리 실추되게 생겼다.

잔뜩 얼어붙은 신헌영 부사장이 자리를 권하자, 그는 간이 의자에 앉아서 턱짓으로 지도를 가리켰다.

“목표 지점까지 미궁 정화는 완료했다.”

“그게 정말입니까?”

“그래. 앞으로는 너희들 하기에 달렸지.”

“예정된 날짜보다 5일이나 앞당겨졌군요.”

“고작 5일이지. 그것도 최대한 천천히 한 거야.”

“…….”

태연한 블라드 유진의 대답에 신헌영은 얼빠진 표정을 짓고 말았다.

유진종합건설과 달리, 그의 보조를 완벽하게 맞출 수 있다던 자신감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뒤였다.

“오늘은 통보하러 온 거다. 당분간 한국을 비울 예정인데, 네가 명심해야 할 사실이 있어서 말이야.”

“예, 말씀하십시오. 경청하겠습니다.”

신헌영 부사장은 만면에 역력하던 당황한 기색을 싹 지운 뒤, 공손한 자세로 대답했다.

지금껏 현성 건설을 성장시킨 인재답게 대단한 태세 전환 속도였다.

하지만 억지로 끌어 올린 포커페이스도 유진의 한마디에는 와르르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그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는 일반인이 버틸 만한 수준이 아니었으니까.

한없이 무거워진 공기를 통해서 전달된 블라드 유진의 음성이 신헌영의 심혼을 내리눌렀다.

“내 영지를 빼앗기면, 재미없을 줄 알아.”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저희도 사활을 건 사업인데요.”

“수고해. 그럼.”

신헌영과의 간단한 대화를 마친 그는 곧장 유령 군마를 타고 사라져 버렸다.

덩그러니 남은 신헌영 부사장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부하 직원을 돌아보았다.

“근데 방금 정화 작업이 다 끝났다고 했지?”

“아, 네. 그렇게 들었습니다.”

“그럼 오늘 예정된 작업보다 더 진행된 거 아닌가?”

“예. 중장비는 물론이고 콘크리트 블록과 인력까지, 아마 지금의 50%는 더 필요할 겁니다.”

“이런 빌어먹을…….”

한숨과 함께 머리를 감싸 쥔 신헌영은 조립식 탁자 위에 떨어진 모발을 가만히 응시했다.

살면서 탈모 걱정은 일절 한 적이 없었는데, 아무래도 오늘부터는 신경을 써야 할 것만 같았다.

수북이 쌓인 머리카락의 개수가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차 대기시켜 주게. 생산직 길드에 직접 찾아가야겠어.”

“예, 알겠습니다.”

중장비와 인력은 그렇다 치고, 일단 지금 중요한 건 강화된 콘크리트 블록을 확보하는 일이었다.

신헌영 부사장은 힘없이 몸을 움직여 베이스캠프를 나섰다.

* * *

신헌영에게 업무 폭탄을 던진 블라드 유진은 다이애나 로즈와 함께 미국행 비행기에 탑승했다.

그가 입국 의사를 밝히자, 와처스 길드는 곧바로 전세기를 한 대 보내주었다.

이런저런 절차를 밟는 시간조차 아까운 모양이었다.

“드디어 미국이군요.”

존 F. 케네디 국제공항에 내린 다이애나는 살짝 들뜬 표정이었다.

이렇게 유진과 단둘이 오랫동안 함께 한 건 그야말로 처음이었으니까.

지금은 껌딱지처럼 붙어 다니던 레니조차 해주, 개성 전선에 놔두고 오지 않았던가.

그저 나란히 걷기만 해도 그녀의 입가에서는 미소가 떠날 줄을 몰랐다.

물론 완벽하게 둘만 있는  아니었다.

“오! 여긴 느낌이 꽤 다른데?”

땅을 보러 온 화룡왕 엔세데스도 함께였으니까.

이제 막 공항을 빠져나온 셋의 앞으로 불현듯 일단의 무리가 접근해 왔다.

“안녕하십니까?”

훤칠한 키에 날카로운 눈매, 탄탄한 몸매의 백인 남자가 인사를 건넸다.

그자를 본 다이애나 로즈는 걸음을 멈춘 채, 살짝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이런 반응을 보인 이유는 간단했다.

자신이 한국으로 도망친 탓에, 가장 곤란했을 사람이 눈앞에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와처스 길드 마스터, 앨런 후버입니다. 저희와 함께 가시죠.”

“그러지.”

앨런은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그를 안내하면서 다이애나를 힐끔 쳐다보았다.

할 말이 많은데, 블라드 유진의 앞이라 참는 듯한 모습이었다.

리무진을 타고 간 끝에 도착한 곳은 맨해튼 미드타운 센터 근처의 5성급 호텔이었다.

뉴욕은 한창 개발 붐이 일어서 어수선한 한국과는 전혀 분위기가 달랐다.

‘거리가 의외로 깔끔하군.’

한 번도 미궁의 위협을 받지 않은 중심지인 데다가, 난민이 발을 들일 수도 없는 공간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침탈당하지 않은 땅이라고 해도 불안감까지 감출 수는 없었다.

길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근심 걱정이 가득했다.

공포라는 감정이 무뎌질 정도로 비보가 연일 쏟아지고 있었으니까.

체크인을 마친 뒤, 일행은 곧장 방으로 올라왔다.

와처스 길드에서 준비한 방은 프레스티지 스위트룸으로, 허드슨강이 바로 보이는 곳이었다.

창밖에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앨런 후버가 다가와 착잡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평화로워 보이지만 상황이 그리 좋지만은 않습니다. 뉴욕 시민들도 불안에 떨고 있죠. 이게 다 실렌스 테라 때문입니다.”

미국의 대규모 미궁은 초창기부터 델라웨어주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반도 전체가 실렌스 테라의 영향력에 잠식당했지만, 여태껏 큰 문제는 없었다.

마기가 내륙 쪽으로 북상하지는 않았으니까.

하지만 미궁 성장 사건이 벌어지면서 실렌스 테라의 권역은 현재 뉴저지까지 잠식한 상태였다.

이대로라면 올해 안에 필라델피아와 뉴욕까지 집어 삼켜질 예정이었다.

“북부와 서부 전선에 전력이 집중되느라, 후방을 신경 쓰지 못했습니다. 거긴 그야말로 지옥이거든요. 그래서 유진 님을 초청할 수밖에 없었죠.”

앨런은 태블릿 PC에 전황 지도를 띄워서 보여 주며 뉴저지 근처를 가리켰다.

곧이어 시커먼 마기가 대지를 빠른 속도로 잠식하는 위성 사진이 떠올랐다.

상황은 생각보다 훨씬 더 심각한 듯했다.

어깨 너머로 화면을 가만히 쳐다보던 엔세데스는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앨런 후버의 말을 정정해 주었다.

“전선의 전력을 빼도 실렌스 테라의 확장을 저지할 수는 없을 텐데. 그게 가능했다면, 진작에 대규모 미궁을 정화했겠지.”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렇습니다.”

촉새처럼 튀어나온 화룡왕의 음성에 앨런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난데없는 팩트 폭행이 불쾌했지만, 꾹 눌러 참고 설명을 이어 갔다.

요점은 단 하나였다.

남은 한 달의 기간 내에 실렌스 테라를 정화하는 것.

공략에 필요한 모든 지원은 미국 정부가 다 해 주겠다는 내용이었다.

“공략대는 결성되어 있나?”

“그렇습니다만, 전력이 다소 부족한 편입니다. 아무래도 상황이 영 좋지 않은지라…….”

미국은 다양한 미궁 이슈에 꽤 적극적으로 대처해 왔다.

러시아의 리고르 아스페라부터 가장 최근엔 천공의 성까지, 빠짐없이 지원 병력을 파견한 것이다.

지원을 받을 만한 자격은 충분했으나, 이번에는 자국 전력만으로 공략에 임해야 했다.

각국의 상황이 의리를 지킬 수 있을 만큼 여유롭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됐어. 적당히 시선을 끌어 줄 수준이면 된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언제 출발할 수 있지?”

“사흘이면 충분합니다.”

“바로 준비해 줘.”

“예.”

앨런 후버는 살짝 고개를 숙인 뒤, 미소를 지으며 물러났다.

드디어 미국에 자리 잡은 암 덩어리를 제거할 기회가 도래했으니, 기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돌아서서 다이애나 로즈를 바라보는 앨런의 표정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이야기 좀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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