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미궁 성장과 이주 현상은 대한민국 북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고 있었다.
춘천이 가장 심했지만, 개성 인근의 개척지도 마찬가지로 위기였다.
대규모 개발 사업으로 인해 최신식 장벽을 구축해 놓지 않았다면, 진작에 밀려났을 정도로 공세는 무시무시했다.
“오, 온다!”
“장벽에 달라붙지 못하게 해!”
“원거리 공격부터 퍼부어!”
드르르르륵! 투쾅―!
기관총과 포가 불을 뿜고 고속 유탄 발사기가 고폭탄을 마구 날려 댔다.
더불어 수많은 헌터들이 장벽 위에 자리하여 갖가지 스킬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그러자 몰려들던 몬스터 무리가 일순간 주춤하는 것이 느껴졌다.
장벽에 배치된 육군의 준수한 화력 덕분이지만, 기본적으로 헌터의 수효가 많기에 일어난 결과였다.
전선에는 협회나 개인 자격으로 온 헌터밖에 없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개성 북부 장벽에는 기업의 고용 헌터들이 잔뜩 몰려와서 수비에 가담하고 있었다.
“탱커 전원 하강! 장벽 아래에서 버틴다!”
“내려가!”
지이이잉!
현수하강 중인 탱커들은 유진종합건설 소속으로, 개성 개발 지구를 지키기 위해서 전투에 참여했다.
원래 기업들은 헌터들을 잔뜩 고용하고도 이러한 방어 작전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북부 미궁 개발 지원안이 착착 진행되면서 꼭꼭 숨어 있던 힘이 풀려 나오게 되었다.
장진석 대통령의 노림수가 제대로 먹힌 것이다.
덕분에 협회는 좀 더 광범위한 전선에 헌터들을 파견할 수 있었다.
“무조건 지켜야 해요. 무슨 수를 써서든지요! 우리 탱커들을 잘 부탁합니다. 구성은 씨.”
도형욱 부사장은 최근에 고용한 무소속 힐러 구성은을 돌아보았다.
교황청 소속이 아닌 힐러는 정말이지 구하기가 매우 어려웠는데, 이번 개발 사업 건으로 운 좋게 한 명을 건졌다.
덕분에 유진종합건설은 자체적인 공략이 가능해졌다.
물론 전선을 넘어오는 미궁의 파편을 처리하는 수준에 그쳤지만.
하지만 구성은의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으음…….”
안전하다는 조건만 갖춰진다면야 혼자서 여러 명의 탱커들을 지원하는 건 크게 어렵지 않았다.
게다가 지금은 원거리 딜러들이 죄다 장벽 위에 있어서, 저쪽은 아예 신경 쓸 필요조차 없었으니까.
문제는 지금껏 자신이 너무 혹사당했다는 사실이었다.
오늘 오전만 해도 벌써 세 번째 웨이브를 막아 내는 상황이었다.
제아무리 단련되었다 해도 근본적인 에너지 부족을 극복할 방안은 없었다.
지금은 오로지 휴식이 답이었다.
하지만 새카맣게 몰려오는 몬스터 웨이브를 앞에 두고 쉴 틈이 어디 있겠는가.
없는 에너지를 쥐어 짜내서 버텨야만 했다.
물론 정신력을 앞세워, 악으로 깡으로 하는 것도 명확한 한계가 있었다.
“최선을 다해 보겠지만, 이전처럼 하긴 힘들 겁니다. 포션을 다 썼거든요. 에너지가 회복되는 족족 지원한다 해도 이대로는 역부족일 겁니다.”
“제가 어떻게든 물건을 구해 보겠습니다.”
생산직 헌터들이 제작하는 물건 중에는 에너지를 회복하는 물약이 존재했다.
엄청나게 비싼 데다가 효율도 좋지 않았지만, 지금은 그런 물건이라도 꼭 필요한 상황이었다.
도형욱은 형에게 전화를 걸어 보았다.
첫 웨이브 때부터 포션을 달라고 요청해 놓았지만, 도재한 사장은 묵묵부답이었다.
아마 이곳저곳에서 전투가 벌어졌을 테니, 포션을 구하는 건 쉽지 않을 터였다.
여기서 구성은이 혼자 쓴 양만 해도 수십 병은 넘어가지 않았던가.
뚜뚜뚜뚜!
“에잇! 젠장!”
설상가상으로 전화까지 먹통이 되어 버렸다.
한순간에 너무 많은 통신을 중계하느라 과부하가 걸린 것이 틀림없었다.
이런 난리통에 통신을 복구하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도형욱은 휴대 전화를 집어넣고, 고용 헌터들을 향해서 연신 무전을 보냈다.
걸리지도 않는 전화를 붙잡고 있느니, 지휘를 확실히 하는 게 병력 손실을 줄이는 길이었으니까.
“우측에 혈거인 셋이 추가됩니다. 화력 지원으로 떨어뜨려 주세요!”
콰광―! 쾅!
하지만 그런 도형욱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탱커 진형에는 구멍이 뚫리기 시작했다.
개성 북부 전선에도 춘천과 마찬가지로 최종 보스의 이주가 개시되었기 때문이었다.
쿠궁! 쿠궁! 쿵!
장벽 앞에 나타난 몬스터는 개성 근처답게 거대 혈거인이었다.
블라드 유진이 이 근방에서 잡은 대성체 미궁의 최종 보스와 비슷한 생김새였다.
“제, 젠장…….”
상대의 모습을 확인한 도형욱은 욕설을 내뱉으며 무전기를 내렸다.
놈은 장벽보다 더 커 보이는 괴물이었으니까.
해군의 지원까지 받을 수 있다지만, 저런 녀석을 저지하는 건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현대 무기로 몬스터들을 정리할 수 있다면, 각국 정부가 뭣 하러 군비를 축소하고 헌터 양성에 힘쓰겠는가.
“최소한 대성체급이다. S급 없이 저런 놈을 쓰러뜨리는 건 불가능해. 얼른 이곳을 버리고 물러나야…….”
도형욱은 문득 한창 지반을 다지는 중인 개발 지구를 돌아보았다.
유진종합건설은 개성 개발에 사활을 건 상태였다.
여기서 물러난다면, 회사는 도산을 면치 못하리라.
그래도 고용 헌터들의 목숨을 헛되이 날릴 수는 없었다.
도형욱 부사장은 안타까운 마음을 집어삼킨 채, 퇴각 메시지를 전달하려 했다.
장벽 아래로 내려간 탱커들이 걱정되긴 했으나, 그들은 대단한 신체 능력을 지닌 헌터들이었다.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고정된 밧줄을 붙잡고 충분히 올라올 수 있을 터였다.
물론 장벽 위에서 밧줄을 당겨, 그들의 등반을 도울 작정이었다.
“전원 퇴…….”
송신 버튼을 누르고 무전을 보내려는 찰나, 순간적으로 도형욱의 말문이 막혔다.
생각지도 못한 광경을 정면에서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스팍―! 푸화악!
“그워어어어!”
마기의 구름 속에서 암청색 무언가가 불쑥 튀어나오더니, 거대 혈거인의 목을 베어 버리는 게 아닌가.
목덜미가 절반쯤 잘려 나간 녀석은 손으로 상처 부위를 황급히 막으려 했다.
하지만 손가락 사이로 혈액이 쏟아져 나오기만 할 뿐, 쉽사리 차단되지 않았다.
휘리릭! 콰―직!
잠시 후, 자그마한 체구의 실루엣이 마기를 뚫고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머리칼을 휘날리며 공중제비를 도는 것의 정체는 자그마한 소녀였다.
놀랍게도 그녀는 자기 몸보다 몇 배는 큰 언월도를 자유자재로 다루고 있었다.
두 번째 공격이 작렬하자, 거대 혈거인의 신형이 크게 휘청거렸다.
서서 팔을 휘두르는 것만으로는 그녀를 저지할 수 없으니, 몸을 바닥에 데굴데굴 굴린 것이다.
쿠콰콰콰콰!
이러면 어깨 위를 뛰어다니며 공격하는 소녀를 무게로 짓눌러 버릴 수 있으리라.
하지만 그녀는 미련 없이 허공으로 도약하더니, 장벽 위에 사뿐히 내려섰다.
낙하지점은 입을 쩍 벌리고 서 있던 도형욱의 바로 옆이었다.
타닥!
―뭐 해?
소녀는 얼빠진 표정의 헌터들을 돌아보며 새침한 목소리로 말했다.
메시지가 머릿속에 직접 전달되는 방식은 신기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넋 놓고 있을 시간 따위는 존재치 않았다.
“기, 기회다! 이대로 밀어붙입시다! 탱커 진형 돌격!”
마침 거대 혈거인이 바닥에 나자빠져 있던 터라, 공격을 퍼붓기에 최적의 상황이었다.
도형욱은 잽싸게 무전을 보내고는 소녀를 휙 돌아보았다.
하지만 방금까지 곁에 서 있던 그녀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뒤였다.
“여기 있던 애 어디 갔어요?”
주변의 헌터들에게 질문해 보았지만, 아무도 행방을 아는 이는 없었다.
하지만 도형욱은 금방 소녀를 찾아낼 수 있었다.
본분을 위해서 거대 혈거인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언월도를 내리찍는 그녀의 모습이 보였으니까.
암청색으로 번들거리는 칼날은 이전보다 훨씬 거대해진 상태였다.
“대체 이게 뭔…….”
* * *
레니의 난입 덕분에, 개성 전선에서도 진화한 대성체 미궁의 최종 보스를 쓰러뜨릴 수 있었다.
웨이브가 끝나자마자 사라져 버렸지만, 소녀의 전투 장면은 장벽 감시 카메라에 제대로 찍혔다.
뉴스는 춘천 전선의 쾌거를 주로 다루었지만, 개성 쪽에도 여론의 관심이 쏠렸다.
새로운 영웅의 출현은 언제나 환영이니까.
“얼추 정리되긴 한 건가.”
“일단 전선을 지킬 수는 있었습니다. 아직도 매일같이 국지전이 벌어지는 중이지만요.”
블라드 유진은 신헌영 부사장의 설명을 듣고 있었다.
이곳은 유진종합건설이 지키는 장벽 인근의 베이스캠프였다.
신헌영은 헌터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곳까지 나와서 보조 역할을 자처했다.
다이애나처럼 얼굴도장의 의미로 말이다.
“개성 다음은 어디지? 내가 조금 바빠져서 말이야. 일을 빨리 진행해야겠어.”
“무, 물론입니다. 원하시는 템포에 무조건 맞추겠습니다. 얼마나 빠르게 진행하면 될까요?”
유진의 재촉에 신헌영 부사장은 반색하며 일정을 물어보았다.
일단 계약해 놓긴 했으나, 대체 일을 언제 시작할지 오매불망 기다리는 실정이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미궁 성장 사건으로 인하여 전 세계가 떠들썩하지 않았던가.
자칫 잘못하면, 개발을 시작조차 하지 못하고 지원안이 어그러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웬만하면 한 달 안에 끝냈으면 좋겠군.”
와처스 길드와 한 계약은 2개월 안에 대규모 미궁을 공략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그는 한 달의 여유를 두고 일정을 진행하고자 했다.
아마 그 정도면 현성 건설도 만족할 만큼의 공략을 진행할 수 있을 터였다.
“저희 목표는 해주시까지인데, 여기를 좀 봐 주시겠습니까?”
신헌영은 빔 프로젝터로 지도를 다시 띄워 주었다.
개성의 전선을 명확하게 표시한 북한 서부 지역의 지형도가 나타났다.
현성 건설에서 설정한 2차 전선의 면적은 기존의 두 배를 넘어서는 수준이었다.
“폐사(弊社)에서 예측한 대로라면, 이곳까지 공략 및 전선을 확장하는 데만 3개월입니다. 유진 님의 공략 속도를 감안한 계획이지요.”
“안 된다는 소리인가.”
“아닙니다. 여기 연안군 북쪽의 산악 지대를 목표에서 완전히 빼 버리면, 소요 시간이 절반으로 줄어듭니다.”
“호오…….”
“초과하는 15일은 인력과 자본을 대거 투입해서 어떻게든 줄여 보겠습니다. 지금부터 박차를 가하면 아마 가능할 겁니다.”
신헌영 부사장의 말에 유진은 눈을 빛냈다.
북쪽 토지의 절반 이상을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포기하는 과감함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보아하니, 다리까지 놓을 계획이더군.”
“그렇습니다. 이곳과 교동도를 연결하는 교각도 건설할 계획입니다.”
“좋아. 그대로 추진해. 얼마나 시간을 주면 준비할 수 있나.”
“전선 확장 공사는 당장 오늘부터도 가능합니다.”
“준비성 철저해서 마음에 드는군. 그럼 바로 시작하지.”
“예!”
신헌영은 마치 잘 훈련된 군인처럼 차렷 자세로 대답하더니, 신난 표정으로 막사를 뛰쳐나갔다.
아마 아래에서 대기 중인 중장비를 이쪽으로 끌고 오려는 모양이었다.
재벌 2세답지 않은 열정에 그는 피식 미소를 지었다.
‘어디 그럼 슬슬 움직여 볼까? 열심히 하겠다니, 기대에 부응해 줘야겠지.’
한 달?
블라드 유진에게는 충분하고도 남는 시간이었다.
신헌영 부사장은 들뜬 표정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앞으로 자신에게 어떤 일이 닥칠지도 모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