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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얄 블러드-163화 (164/226)

13화

화염에 휩싸인 유령 군마에서 뛰어내려 시뻘건 칼날을 내리찍는 사람 형체가 있었다.

그자는 거대 아울 베어의 목을 일도양단해 버렸다.

최종 보스의 몸뚱이는 엄청난 두께를 자랑했지만, 길게 뻗은 붉은 칼날에는 저항할 길이 없었다.

공격에 닿는 순간, 마치 홍해처럼 그대로 쪼개졌으니까.

놈의 머리통이 육중한 소리와 함께 떨어지자, 일대의 모든 헌터들에게 홀로그램 글귀가 떠올랐다.

[대성체 미궁의 최종 보스 ‘아울 베어 킹 우르수스’ 처치!]

[이주 중의 공략 성공으로 최대 기여자에게 보상이 주어집니다.]

남자는 투명하게 변한 손으로 우르수스의 사체를 이리저리 뒤지더니, 이내 짧게 혀를 차며 물러섰다.

찰박!

그러다가 바닥에 고인 아울 베어 킹의 혈액을 밟았다.

하지만 보스 몬스터의 피는 그의 신발을 피해서 밀려날 뿐, 결단코 옷이나 몸에 묻지 않았다.

이 일을 벌인 존재가 바로 피의 제왕이자 어둠의 군주, 블라드 유진이기 때문이었다.

“별로 건질 만한 건 없군. 맛만 괜찮은 녀석인가. 역시 인간형이 좋아. 별 제약도 없고 말이야.”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린 그는 멀찍이 떨어진 한 사람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유진과 시선이 마주친 건 흔들리는 눈망울의 전시영이었다.

그녀는 원거리 딜러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서 있는 전장 깊숙한 곳으로 한달음에 달려왔다.

“여긴 어쩐 일이야? 바쁜 거 아니었어?”

“네가 더 바빠 보인다만.”

“그거야 최종 보스가 갑자기 셋이나 나타나서……. 어쨌든 와 줘서 고마워. 다른 애들은?”

“한국도 이런 상황인데, 다른 곳은 어떻겠어?”

“말 안 해도 어떨지 알겠네.”

급하게 나오느라 주변을 챙기지 못한 전시영은 루시아와 다이애나의 안부를 물었다.

블라드 유진 또한 정확한 정보는 없었지만, 대충 유추할 수는 있었다.

루시아가 다급한 표정으로 달려 나가는 것만 봐도 충분히 짐작 가능했으니까.

“잡담이나 하고 있을 시간은 없는 것 같군. 저길 봐.”

“그래. 상당히 위태로워 보이네. 계속 도와줄 거야?”

“여기뿐만 아니라, 다른 곳도 난리다. 얼른 정리하는 게 좋겠어.”

“고마워. 이 건은 내가 따로 협회에 청구할게. 좋은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말이야.”

“그러든지.”

그는 사실상 자신의 땅을 지키기 위해서 나섰을 뿐이지만, 그녀의 제안을 거절하지는 않았다.

준다는데 굳이 안 받을 필요는 없었으니까.

유진은 날카로운 괴성을 지르며 공격을 퍼부어 대는 거대 금속 펠리컨을 주시했다.

아울 베어 킹이야 전시영과 안지홍이 거의 다 잡아 놓은 거라지만, 스톰버드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

이번의 성장 사건으로 인하여 거의 대규모 미궁의 최종 보스에 준하는 개체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같은 등급이지만 우르수스보다 상대적으로 레벨이 높은 녀석인 듯했다.

물론 그래 봐야 S급에 불과하겠지만.

‘아예 성과가 없지는 않군. 엔세데스의 말이 주효했어.’

능력치 정보를 힐끔거린 그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아직 그의 레벨은 1,996에서 아무런 변화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블라드 유진은 미묘하게 자신의 능력치가 상승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우르수스의 목을 베고 난 직후에 느낀 변화였다.

“저런 놈들을 처리하다 보면, 금방 2천 레벨을 넘어설 수 있겠지.”

스이잉―!

재차 소수혈인을 뽑아 든 그는 스톰버드를 향해서 몸을 날렸다.

오늘부터는 대성체 미궁의 최종 보스를 양껏 도살할 작정이었다.

* * *

“호오? 역시 오는 족족 깔끔하게 베어 버리는구먼. 마음에 드는 플레이인데?”

공중에 둥둥 떠서 블라드 유진의 활약을 감상하던 자는 바로 엔세데스였다.

그런 화룡왕의 곁에는 화려한 의자에 앉아 손잡이를 꼭 붙잡은 다이애나가 있었다.

그녀는 상당한 고도에 잔뜩 긴장하면서도 유진의 움직임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역시 대단해. 저분을 미국으로 데려갈 수 있다면, 길드의 염원을 달성하는 것도…….”

다이애나 로즈가 속한 와처스 길드는 원래 전선을 구축하는 주역이었다.

엄청난 규모로 성장하고 나서는 물러나서 돈 되는 일만 하고 있었지만.

어쨌거나 그녀의 시각에서는 한심하기 그지없는 처사였다.

애초에 다이애나가 와처스와 손을 잡은 건 대의를 위해서가 아니었던가.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길드는 변해 버렸다.

안타까운 일이었으나, 사실상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그러기에는 와처스 길드의 조직 구조와 권력 구도가 너무도 복잡해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블라드 유진과 같은 거물이 들어온다면 이야기가 달라질 터였다.

엉망진창이었던 한국 헌터계도 그의 개입 이후에 정상 궤도로 올라서지 않았던가.

다이애나 로즈는 와처스에도 그런 기적이 일어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슬슬 점수를 좀 따는 게 어때?”

한데, 그런 그녀의 귓가에 장난스러운 엔세데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갑자기 무슨 점수요?”

“옆에서 뭐라도 해서 눈에 띄어야 계약이 편하지 않겠어?”

화룡왕의 눈빛과 말투는 마치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잠깐 머뭇거린 다이애나는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이미 유진과 엔세데스가 미국에 관한 이야기를 끝마친 거로 착각했기 때문이었다.

“고작 그런 거로 유진 님이 전선에 도움을 주실까요?”

“그야 모르는 일이지. 워낙 제멋대로인 녀석이지 않나.”

“그래도 엔세데스 님은 자주 대화를 나누시잖아요.”

“시시콜콜한 이야기뿐인데 뭘. 그래도 도움이 안 되지는 않을 거야. 계속 얼굴도장 찍어.”

“음……. 그래요. 지금은 뭐라도 해 봐야 할 때죠. 저 좀 내려 주실래요?”

“그래.”

화룡왕이 손가락을 딱 튕기자, 그녀가 앉은 의자가 지상을 향해서 떨어지기 시작했다.

적당한 속도였기에 다이애나 로즈는 큰 부담을 느끼지 않고, 전투를 준비할 수 있었다.

의자가 지면 근처에 도달했을 때, 그녀는 장벽 위로 몸을 날리며 스킬을 시전했다.

“폭풍의 주문!”

피이이잉―!

주황색 기운이 동심원을 그리며 번져 나가자, 일순간 장벽 주변의 시간이 멈춘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윽고 능력치가 급상승한 헌터들의 움직임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어어? 몸이 왜 이래?”

“광범위 버프? 이거 설마…….”

“다이애나 로즈?”

천공의 성에서 폭풍의 주문을 경험해 본 A급 헌터들은 곧장 그녀의 출현을 알아차렸다.

이토록 강력한 버프를 수백 명에게 걸 수 있는 존재는 지구상에 단 한 명뿐이었으니까.

“S급 헌터가 우리를 비호한다! 이길 수 있어!”

“탱커들은 저놈의 발부터 묶어! 우리가 화력으로 다 터트려 줄게!”

한국 헌터 길드 연합은 용기백배하여 상대를 향해서 달려들었다.

[대성체 미궁의 최종 보스 ‘포식자 아르마딜로 포디다에’가 혼란에 빠졌습니다.]

[디버프가 중첩되어 집중 공격 ‘기절’이 5초 동안 발현됩니다.]

이전보다 훨씬 강한 공격이 무수히 쏟아지자, 포디다에는 눈을 까뒤집고 나자빠져 버렸다.

다이애나 로즈가 시전한 폭풍의 주문은 상태 이상을 크게 터트리는 효과가 있었다.

버프를 받은 헌터들의 공격에 가장 많이 포함된 옵션이 발현되는 형식이었다.

“지금이다! 약점을 공격해!”

“외피에다 공격 퍼붓지 마!”

길드 연합은 포식자 아르마딜로의 단단한 외피를 피해서, 상대적으로 약한 복부를 공략했다.

5초는 상당히 짧은 시간이었지만, 지금은 천 명에 달하는 딜러들의 공격이 쏟아지는 중이었다.

탱커들마저도 극딜을 꽂고 있었기에, 포디다에가 박살 나는 건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다이애나의 능력은 역시 대규모 전투에서 빛을 발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은 왠지 어둡기만 했다.

“미국에서는 여기처럼 할 수가 없어.”

한국은 땅덩이가 좁은 데다가 지형이 험준하여, 요소요소를 방어하는 게 가능했다.

헌터들의 도움이 있다면, 장벽을 구축하는 게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미국은 광활한 땅을 보유한 데다가, 대부분이 평지로 이루어져 있었다.

단순히 소규모 장벽을 세우는 거라면, 한국보다 훨씬 쉬울 터였다.

중장비로 순식간에 해치울 수 있으니까.

문제는 평지가 너무 넓어서 그런 작업을 엄청나게 해야 한다는 거였다.

게다가 방어 인력도 그만큼 많이 필요했다.

그래서 항상 여기저기에 구멍이 생겨 전선이 뒤로 밀리고, 고착화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쿠웅!

서쪽에서 들려온 굉음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다이애나는 블라드 유진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거대 펠리컨 스톰버드를 갈기갈기 찢어발긴 상태였다.

단단한 금속 외피를 두른 최종 보스였으나, 유진의 천계도살검 앞에서는 종잇장이나 다름없었다.

그 엄청난 무위를 다시금 목격한 그녀는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에겐 저분이 무조건 필요해.”

다이애나 로즈는 그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와 계약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 * *

“도와주셔서 고맙습니다. 이런 지원은 생각지도 못했는데요.”

“심심해서 나와 본 거야.”

“하하! 그러시겠죠. 마실이라고 해도 받을 건 받아야 합니다.”

“그건 당연한 거고.”

전투가 끝난 직후, 안지홍은 절뚝거리며 다가와 블라드 유진을 향해서 고개를 숙였다.

스톰버드를 상대할 때 다리에 큰 상처를 입은 탓이었다.

슬쩍 눈길이 갔지만, 그는 무덤덤하게 고개를 돌렸다.

“남쪽 상황은 어떻지?”

“남부 전선은 거의 정리되어 가는 추세라, 막아 내는 게 그리 어렵지 않을 겁니다. 여기가 가장 심하죠.”

안지홍은 헌터 협회를 통해서 들은 정보를 유진에게 그대로 전달해 주었다.

대한민국은 오염 지대를 전라도 일부 지역만 남겨 둔 상태였다.

그곳은 원래도 대성체 미궁이 없었기에, 민간의 힘으로도 충분히 방어가 가능할 터였다.

문제는 북쪽에서 내려오는 적들이었다.

대규모 미궁의 최종 보스에 준하는 놈들이 남하해 왔기에, 한국은 그야말로 외줄 타기를 하는 중이었다.

까딱하면 지금까지 확장해 온 땅을 모조리 날리게 생긴 것이다.

이윽고 전시영과 다이애나, 엔세데스가 차례로 그의 근처로 합류했다.

“센 놈들인 줄 알았는데, 의외로 시시하네. 변화가 좀 있나?”

화룡왕의 질문에 유진은 문득 능력치 정보창을 펼쳐 보았다.

<능력치 정보>

이름 : 블라드 유진(Vlad Eugene)

레벨 : 1,997

등급 : EX(Lv. 1,501~3,000)

종족 : 피의 군주

종족 효과 : 강체, 불로불사, 반신

최종 보스 둘을 잡은 덕분인지, 그는 1레벨이 오른 상태였다.

천공의 성 이후로는 성장이 멈췄는데, 오늘은 한 발자국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지구로 돌아와서 얻은 첫 쾌거에 블라드 유진은 살짝 고개를 끄덕거렸다.

“성장이 되긴 하는군. 아슬아슬하긴 했지만 말이야.”

수치상으로 표시가 되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1,996레벨의 끄트머리에 머물러 있다가 경험치가 조금 올라, 간신히 성장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래도 대안이 대규모 미궁밖에 없던 이전보다는 확실히 나은 상황이었다.

“거봐. 내가 된다고 했잖아.”

엔세데스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손에 든 술잔을 빙글빙글 돌렸다.

잔이 손가락을 타고 빠르게 회전했으나, 그 안에 담긴 술은 한 방울도 쏟아지지 않았다.

중력을 조절하는 마법이라도 쓴 모양이었다.

화룡왕이 신기한 행동을 하든 말든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들의 신경은 오로지 미궁 성장 사건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안지홍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블라드 유진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큰일입니다. 개성 쪽에도 상당한 수준의 최종 보스들이 몰려갔을 텐데요.”

춘천이 이 지경인데, 최전선이나 마찬가지인 개성도 마찬가지 상황일 터였다.

하지만 이야기를 들은 유진의 표정은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그는 손을 가볍게 휘저으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거긴 괜찮아. 이미 손을 써 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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