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얄 블러드-162화 (163/226)

12화

“이 근방에서 활동하는 사람이 나보다 늦게 오면 어떡해?”

“동쪽 좀 도와주고 오는 길이다. 몸도 불편한 사람한테 너무하는 거 아니야?”

“쳇! 가불기 쓰는 게 어디 있냐? 할 말 없게.”

“흐흐! 농담이다.”

전시영의 옆으로 다가온 사람은 리브라 길드 마스터 안지홍이었다.

천공의 성 공략 때 비산의 암살자 페드로에게 잘린 왼팔은 회복이 불가했다.

놈의 공격에 팔이 마치 다진 고기처럼 갈려 나갔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뛰어난 힐러의 치유 능력이라 해도 커다란 조직을 자라나게 하는 건 힘들었다.

결국에 안지홍은 가벼운 쪽으로 무기를 바꿔야만 했다.

“웬 이쑤시개를 들고 왔네. 그거 갖고 싸움이 되겠어?”

전시영은 허전한 한쪽 팔을 힐끔거리며 입술을 샐쭉하게 비틀었다.

팔 없이 헌터 생활을 하는 게 어떤지 묻고 싶은데, 그러면 왠지 그냥 싸구려 동정이 될 것 같았다.

달리 표현할 방법을 떠올리지 못했기에, 평소처럼 괜히 툴툴거린 것이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꿰뚫어 본 안지홍은 피식 미소를 지으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답했다.

“팔 하나 없다고 이 오빠 실력이 어디 가겠냐? 그냥 다 씹어 먹고 다니지.”

“우웩! 오빠라니. 어디 가서 그런 말 좀 하지 마. 더 아저씨 같으니까.”

“어허! 아직 팔팔한 청춘인데 아저씨라니.”

“진짜 못 들어 주겠네. 제발 닥쳐!”

두 사람은 아웅다웅하면서도 전방의 상황을 주시했다.

어느새 장벽 가까이 다가온 마기의 구름은 강력한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었다.

쿠구구구구!

시커먼 어둠 속에서 불쑥 모습을 드러낸 것은 상상을 초월하는 크기의 아울 베어였다.

아마도 장벽을 공격하는 녀석들의 최종 보스인 모양이었다.

거기까지는 어차피 예상하던 바라 전시영과 안지홍은 그리 당황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은 제주도에서 이미 겪어 보았기 때문이었다.

“이주인가.”

“확장 방식을 바꾼 모양이로군.”

대성체 미궁이 분화하여 보스를 쏘아 보내면, 오염 지대를 넓게 펼칠 수 있다는 이득이 있었다.

하지만 너무 깊숙이 날려 보냈을 때는 집중 공격을 당해서 바로 정화될 가능성이 존재했다.

그래서 분화 대신 이주를 택한 모양이었다.

확장 방식은 그렇다 치고, 문제는 거대 아울 베어가 나타난 이후의 상황이었다.

쿠웅! 쿠구궁!

검은 연기 속에서 재차 모습을 드러낸 존재들이 시뻘건 안광을 빛내며 장벽을 노려보았다.

하나같이 처음 나타났던 최종 보스와 비슷한 크기였다.

“크르르르!”

“크우우우!”

놈들의 울부짖음이 대기를 타고 전달되자, 두 사람은 한 차례 몸을 떨었다.

세 마리나 되는 대성체급 최종 보스에게서 엄청난 살기가 느껴졌으니까.

최근 한국 헌터계는 블라드 유진의 도움 없이도 성체 미궁을 종종 공략해 내고 있었다.

미궁 개발 지원안에 의하여 북한 지역을 야금야금 먹으면서 말이다.

그러나 그때는 수백 명의 공략대가 최종 보스 하나를 포위하여 공격하는 경우였다.

지금처럼 상대가 셋인 데다가, 부하 몬스터까지 수두룩한 상황은 절대로 아니었다.

한국의 S급 최고 실력자라지만, 전시영과 안지홍의 안색이 어두워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아저씨, 이거 좀 심각한데?”

“그러게. 이주가 동시에 일어나다니, 그럼 저 마기의 구름 뒤에 대성체 미궁이 셋이나 있는 건가?”

“저 너머가 왜 중요해? 당장 이 녀석들을 막는 게 우선이지.”

“아, 그래. 쓸데없이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군.”

안지홍은 자신의 실책을 인정하며 오른손으로 검을 뽑아 들었다.

예전처럼 대검을 쥐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한국 최고의 S급 탱커라는 타이틀은 빼앗기지 않았다.

새로운 스타일에 적응하기 위해서 무던한 노력을 한 덕분이었다.

“각개 격파로 가자. 길드 연합에 무전 해 뒀으니, 우린 저 녀석부터 차례차례 처치하면 돼.”

“걔들이 나머지 두 마리를 버틸 수 있어?”

“지금은 그러길 간절히 바라는 수밖에 없다. 우리가 최대한 빨리 처치하고 다음 녀석을 상대해 줘야지.”

“좋아. 시작해 보자고.”

전시영은 결의에 가득 찬 눈으로 가장 왼쪽의 최종 보스, 거대 아울 베어를 노려보았다.

평소라면 장난스러운 말을 툭툭 내뱉으며 여유를 부렸을 테지만, 지금은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전황이 너무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장벽 동쪽의 불안한 모습을 바라본 그녀는 심란한 표정을 지었다.

툭!

“가자면서 뭘 멍하니 보고 있어? 힐러들 도착했으니까, 나 먼저 들어간다.”

안지홍은 그런 전시영의 어깨를 손등으로 살짝 건드리며 전장을 향해서 달려 나갔다.

그녀는 양손에 푸른 화염을 피워 올리며 퉁명스러운 한마디를 내뱉었다.

“아저씨, 재생 능력 있으니까 아무 데나 쏜다?”

“야! 그거 아프다고!”

“큭큭!”

전시영이 낄낄거리며 웃자, 안지홍은 피식 미소를 지으며 오른손의 검을 슬쩍 들어 보였다.

그러고는 곧장 거대 아울 베어의 정면으로 달려들며 길쭉한 녹색 기운을 검신에 덧씌웠다.

“페르디티오의 칼날!”

예전보다 면적은 줄어들었으나, 날카로움만큼은 확실히 증가했다.

안지홍의 스킬은 거대 아울 베어의 가슴팍을 정확히 명중시키며, 맹렬한 기세로 파고 들어갔다.

그러자 놈의 육중한 몸체가 뒤로 크게 휘청거리는 게 아닌가.

탱커라고 하기에는 상당한 공격력을 선보이고 있었다.

“오? 그동안 놀고 있지는 않았나 보네. 그래도 명색이 딜러가 공격력에서 밀릴 수는 없지.”

활약을 지켜보던 전시영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양손을 들어 올렸다.

묵묵히 자신의 역량을 끌어 올린 모습이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었던 것이었다.

장벽의 끄트머리에 선 그녀는 아래쪽을 향해 양손을 쫙 뻗었다.

그러자 시퍼런 화염이 무시무시한 크기로 확장되더니, 벽면을 기어오르던 아울 베어 무리를 향해 몰아치기 시작했다.

“연옥의 숨결.”

쿠화아아아!

초고온의 화염을 쏟아 내는 전시영의 전매특허 스킬이 발현되었다.

연옥의 숨결은 장벽이 무너지지 않게끔 하면서도, 큰 피해를 줄 수 있는 스킬이었다.

초열지옥 계열을 펼쳤다가는 이곳을 지키는 병사들마저도 폭발에 휘말릴 수 있으니까.

“자, 여기는 이 정도만 하고 진짜 목표를 노려볼까? 초열지옥 연쇄역풍!”

삐이이―! 쿠콰콰콰쾅!

그녀의 오른손에서 빙글빙글 회전하던 노란 구슬 다섯 개가 거대 아울 베어의 근처에서 폭발했다.

“크웨에에!”

막대한 에너지가 터져 나와서 육신을 붕괴시키자, 놈은 괴로운 비명을 질러 댔다.

전시영의 공격이 제대로 먹히고 있다는 증거였다.

이렇게 계속 공세를 더하다 보면, 거대 아울 베어 정도는 금방 처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전황은 애석하게도 두 사람의 의도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쿠와아악!”

쩌저정!

최종 보스 하나가 대뜸 이곳으로 이동하더니, 탱킹에 집중하던 안지홍의 측면을 후려갈긴 것이다.

한창 전선 동쪽에서 활동하던 놈이 갑자기 합류하다 보니까, 결국에 원래 목표를 끝장내지 못했다.

“이런, 젠장!”

티란누스의 방패를 시전하여 공격을 막아 내던 안지홍은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바닥을 굴렀다.

펠리컨을 닮은 듯한 최종 보스가 큼지막한 날개를 올려 쳤기 때문이었다.

촘촘하게 박힌 수만 개의 금속 깃털이 정렬하며 독특한 소리를 냈다.

스퀴이잉―! 촤르르르륵!

놈의 날개 공격은 마치 거대한 칼날을 휘두른 것처럼 날카로웠다.

공기를 가르는 소리를 듣자 하니, 제대로 적중당했다가는 몸뚱이가 토막 나 버릴 것만 같았다.

등골이 서늘해진 안지홍은 부서진 티란누스의 방패를 복구하며 눈알을 굴렸다.

“갑자기 두 마리라니…….”

애초의 계획은 완벽하게 어그러지고 말았다.

각개격파를 위해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던 놈을 먼저 노린 것이 아니었던가.

이러면 전시영과 안지홍의 화력만으로는 놈들을 극복할 수가 없었다.

―죄, 죄송합니다. 경황이 없어서 보고가 늦었……. 치직! 즉시 합류하겠습니다.

이어폰을 통해서 길드원의 다급한 무전이 흘러나왔지만, 안지홍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쉬이익! 콰아앙! 터어엉!

“크헉!”

최종 보스들의 공격이 연속으로 들어오는 상황이었으니까.

온몸에 힘을 주며 공격을 받아 내자, 전시영이 쏘아 낸 노란 구체가 놈들의 지근거리에 나타났다.

당연히 전열을 가다듬은 육군 병력의 지원 사격도 이어졌다.

하지만 맹렬한 불꽃과 폭음이 난무하던 와중, 눈앞에 홀로그램 글귀가 나타났다.

왠지 불안감을 가중하는 문구에 두 사람은 미간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대성체 미궁의 최종 보스 ‘금속 펠리컨 스톰버드’가 경질 장갑판을 전개합니다.]

[스톰버드의 방어력이 일시적으로 200% 상승합니다.]

[스톰버드가 일정 시간 동안 80%의 화염 내성을 얻습니다.]

터더더더더덩!

막대한 공격력이 투사되었으나, 별다른 이득을 보지는 못했다.

거의 빈사 상태에 놓여 있었던 거대 아울 베어가 스톰버드의 뒤에 숨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와, 뭐 저런 개…….”

저도 모르게 욕지거리를 중얼거리던 안지홍은 화들짝 놀라며 입을 다물었다.

평소에도 욕설을 잘 쓰지 않는 사람다운 반응이었다.

어찌 되었든 북한강 유역에서 시작된 대규모 이주 현상은 점점 한국군에 불리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헌터계 전력의 절반 이상이 투입되었으나, 춘천 북부의 전선마저도 넘겨줘야 할 판이었다.

“불굴의 광기라도 써야 하나.”

루시아가 레니에게 받았던 불굴의 광기는 전시영의 필살 스킬이 되어 있었다.

그녀는 쉬지 않고 안지홍을 지원하며 진지하게 고민해 보았다.

불굴의 광기를 시전하면, 피아 식별을 제대로 못 하는 대신에 막대한 힘을 얻을 수 있었다.

아마 최종 보스 중 하나는 충분히 쓰러뜨릴 수 있으리라.

하지만 단기간에 엄청난 에너지를 소모한 탓에 금방 무력해진다는 게 문제였다.

그러면 남은 최종 보스를 거의 안지홍 혼자 상대해야 할 것이다.

“진퇴양난이네. 빌어먹을.”

그렇다고 지금처럼 공략을 이어 간다고 해서 뭔가 뾰족한 타개책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하필이면 스톰버드가 전개한 기술에는 화염 내성이 부여되어 있었다.

그 말인즉, 앞으로 전시영의 스킬이 저 금속 펠리컨 녀석에게 제대로 먹히지 않는다는 사실을 뜻했다.

그래도 공격을 퍼붓지 않을 수는 없었다.

“초열지옥 십지폭쇄!”

그나마 다행인 점은 그녀의 스킬이 공간을 뛰어넘어서 전개된다는 것이었다.

삐이이―! 쿠콰콰콰쾅!

열 개의 노란 구체는 날개를 쫙 펼친 스톰버드를 지나쳐, 거대 아울 베어에게 직격했다.

제대로 보이지 않아서 몇 발 빗나가긴 했지만, 어차피 십지폭쇄는 명중률이 그리 높지 않은 스킬이었다.

그런데 착실히 피해를 쌓아 가던 와중, 거대 아울 베어가 스톰버드를 지나쳐 불쑥 튀어나오는 게 아닌가.

놈은 전시영을 향해서 아가리를 쫙 벌리더니, 날카로운 괴성을 쏟아 냈다.

“끼야아아악―!”

“으으윽!”

투웅!

귀청을 찢을 듯한 음파와 함께 강력한 충격파가 그녀를 덮쳤다.

순간 뒤로 튕겨 나간 전시영은 장벽에 고정된 기관총을 붙잡고 나서야 멈출 수 있었다.

그런데 끝없이 이어질 것 같던 음파 공격이 돌연 뚝 끊겼다.

문득 고개를 든 그녀는 놀라운 광경을 목격하고야 말았다.

“어?”

시뻘건 불빛이 번쩍이는 순간, 거대 아울 베어의 목이 통째로 잘려서 바닥에 떨어지는 장면이었다.

스핏! 쿠우우우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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