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블라드 유진의 저택에 방문한 자는 신헌영 부사장이었다.
부복하여 싹싹 빌 때와는 다르게 오늘은 꽤 멀끔한 모습이었다.
손에 서류 가방을 든 걸 보니, 사업적인 이야기를 하러 왔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네가 날 먼저 찾아올 줄은 몰랐는데.”
“아무리 껄끄러운 사이더라도 비즈니스에서는 감정을 빼야지요.”
“나쁘지 않은 생각이로군.”
“그렇게 해 주시리라 믿어도 되겠습니까?”
“네가 사죄를 청한 순간부터 악감정은 깔끔하게 사라졌다.”
“감사합니다.”
신헌영이 다시 한번 꾸벅 인사를 하자, 그는 소파 쪽으로 가볍게 고갯짓했다.
일단 앉으라는 의미였다.
그러면서 유진은 조낙범 변호사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아, 네. 적당한 업체를 선정하던 중에 현성 건설에서 먼저 연락이 왔습니다.”
“그새 소문이라도 퍼진 모양이로군.”
“이 바닥이 워낙 좁지 않습니까? 게다가 유진종합건설의 전례도 있고요.”
“그래서?”
마지막 말은 조 변호사에게 한 질문이 아니었다.
어느새 그의 시선은 약간 굳은 표정으로 어색하게 앉아 있던 신헌영 부사장을 향하고 있었다.
뭘 가져왔는지, 어디 좀 보자는 신호였다.
“아, 넵! 유진종합건설과 하신 계약을 토대로 제안서를 만들어 왔습니다. 아마 마음에 드실 겁니다.”
도재한 사장과는 중심가 토지 11%를 받기로 하고 개성 인근의 토벌을 진행한 바 있었다.
제안서를 슬쩍 살펴보니, 꽤 구미가 당길 만한 내용이 곳곳에 보였다.
“중심가 토지 15%에 외곽지 20%로군. 현실적인 제안 중에 최고 대우인가?”
“그, 그렇습니다. 저희의 수익을 상당 부분 포기했습니다. 물론 그러고도 확실한 이익이 있기에, 이런 제안을 하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솔직해서 좋군.”
“가, 감사합니다.”
확장 사업의 계획은 개성 서쪽의 개풍군부터 시작하여 서해로 쭉쭉 나아가는 형식이었다.
아무래도 평지도 많고 서울과 가까워 개발하기 안성맞춤이니, 목표를 서부로 잡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이제는 저곳을 노리는 기업도 많아서, 수주 경쟁에 뛰어들어야만 했다.
그런 점에서 업계 최정상 중 하나인 현성 건설은 최고의 선택이 될 수 있었다.
“나쁘지 않군. 한데, 토지 말이야. 이거 내가 선택할 수도 있나?”
“아! 물론입니다. 원하시는 곳 어디든지, 계약된 비율만큼 최우선 배정하겠습니다.”
“좋아. 만족스럽군.”
한때는 적이었지만, 이제 현성 건설과는 한배를 타게 되었다.
계약을 마친 신헌영 부사장은 곧장 허리를 90도로 꺾었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작전 일시는 조 변호사를 통해서 알려. 유진종합건설을 참고했다면, 전력이 많아 봐야 별 쓸모 없다는 걸 잘 알 테지.”
“물론입니다. 최대한 빠르게 진행할 수 있도록 조치하겠습니다.”
“그래. 가 봐.”
“예.”
신헌영이 저택을 떠나자, 조낙범은 노트북을 가방에 넣으며 홀가분한 듯이 말했다.
“계약이 성사되었으니, 이제 업체 선정은 필요가 없겠군요. 그나저나 저쪽도 상당히 급했나 봅니다.”
“그렇겠지. 나와 격돌한 일로 그룹 내 기반이 흔들렸을 테니까.”
“빠르게 알아봤는데, 회장실에서도 좋지 않은 이야기가 나왔다고 합니다. 뼈아픈 실책이라, 어떻게든 만회하려고 저러는 모양이네요.”
“그냥 주는 거나 날름 받으면 되겠군. 그나저나 전선 상황은 어떻다던가.”
“그건 제가 잘 알기 힘든 분야라…….”
“됐어. 현장에 있는 놈한테 보고 받으면 되니까.”
“예.”
블라드 유진은 국내의 상황을 먼저 정리하고, 타국으로 떠날 예정이었다.
현재 상당한 토지가 그의 소유로 이전되고 있는데, 전선이 뒤로 후퇴하면 말짱 도루묵이기 때문이었다.
특히나 개성 인근의 전선은 반드시 지켜야만 했다.
물론 거기는 현성 건설과 함께 토벌에 나설 테니, 언제든 대응 가능할 터였다.
문제는 진 연합체가 관리 중인 전선 인근의 경계 지역 시장이었다.
아마 이번 일로 인하여 상당한 타격이 있을 것 같았다.
뚜르르르! 달칵!
―예, 대부님.
바쁠 텐데도 흑룡은 그의 전화를 거의 바로 받았다.
혈성쇄혼술에 의하여 하수인이 되었기에, 충성심이 남다른 것이다.
“전선은 어때?”
―거의 피난길과 마찬가지입니다. 전라도 전선은 원래도 대성체 미궁이 없어서 어찌어찌 버티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강원도가…….
“그래. 거기가 위태롭겠군. 알았다. 이만 끊지.”
―알겠습니다.
뚝!
어마어마한 수준의 사건이다 보니, 별 상관없는 유진도 사뭇 바빠지고 말았다.
인간들의 틈새에 섞여 상당한 재산을 축재했으니, 이제 완전히 남 일도 아니었다.
카모플라쥬 롱코트를 걸치며 나서려는데, 문득 2층에서 내려오던 다이애나 로즈와 눈이 마주쳤다.
“아, 네가 있었지. 그래. 뭐라던가.”
“유진 님의 제안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겠답니다.”
“최장 2개월이라고 했지? 계약한 이후로.”
“네.”
“거긴 조금 대기하라고 해. 먼저 할 일이 있으니까.”
“네? 대기요?”
그녀가 반문했지만, 이미 그는 녹턴에 올라탄 상태였다.
다이애나는 순식간에 멀어진 블라드 유진의 뒷모습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자 거실에 서서 증류식 소주를 들이켜던 엔세데스가 찬장에서 새 술병을 꺼내며 말했다.
“심심하면 데려다줄까?”
“갑자기 어디로요?”
“어디긴 어디야. 저 친구 가는 곳이지. 따라가서 구경이나 할까 하는데.”
“어, 어? 그게 가능해요?”
“대체 날 뭐로 보는 거야? 그깟 일 정도야 쉽지.”
“그럼 저 갈래요! 무조건 가요.”
“따라와.”
화룡왕은 실크 가운을 펄럭이며 테라스를 통해 바깥으로 나가려 했다.
그런데 문득 뒤에서 다이애나가 손목을 잡아당기는 게 아닌가.
“잉? 왜?”
“갈 땐 가더라도 옷은 좀 입고 가시죠. 그거……. 외출복 아니에요.”
“아, 그렇군. 로브 같아서 말이야.”
“아무리 로브라고 해도 안쪽에 옷은 입을 텐데요.”
“그래? 실크로 된 옷을 좀 구해 봐야겠군. 감촉이 좋아서 이거 말고 다른 옷감은 싫거든.”
엔세데스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방으로 가서 옷을 입고 나왔다.
민망함이라는 단어를 아예 모르는 것처럼 말이다.
“자, 그럼 출발해 볼까?”
유쾌한 목소리로 혼잣말을 중얼거린 화룡왕은 곧장 손가락을 딱 튕겼다.
그러자 엔세데스와 다이애나의 신형이 허공에 둥둥 뜨기 시작했다.
“어어?”
* * *
“막아! 방벽 터지면, 이 뒤는 곧바로 도시다!”
“다 쏟아부어라! 탄 아끼지 마!”
투두두두두!
춘천 고슴도치섬에서 북쪽으로 대략 6km 지점.
대한민국 육군과 헌터들은 새로운 장벽을 세우고, 쏟아지는 몬스터를 막아 내는 중이었다.
원래는 화천군의 북한강 유역까지 전선을 확장했으나, 지금은 무려 11km가량을 후퇴한 상태였다.
기존의 콘크리트 구조물을 완전히 치우지 않고 절반 정도 남겨 놓았기에 그나마 다행이었다.
만약 구 장벽을 철거했다면, 파죽지세로 밀려 버렸을 것이다.
그만큼 몬스터 무리의 파상공세는 어마어마한 수준이었다.
전선에서는 연신 굉음과 발포 소음이 들려왔지만, 오염 지대 안쪽이라고 조용한 건 아니었다.
퍼엉! 쉬이이익! 터엉!
대성체로 진화해 버린 미궁 하나가 난데없이 분화를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그로 인하여 몬스터만 우글거리던 지면이 순식간에 오염 지대로 변하고 말았다.
다행히 전선까지는 닿지 않았으나, 이제 마기에 잠식되는 건 시간문제였다.
앞으로 다른 성체 미궁 또한 진화를 거듭할 테니까.
“무, 무너진다! 빠져!”
“으와아악!”
쿠콰콰콰콰!
대형 몬스터들의 무지성 돌격에 못 이긴 콘크리트 장벽이 굉음과 함께 터져 나가기 시작했다.
한쪽이 무너지자, 이곳저곳에서 연신 곡소리가 흘러나왔다.
전력이 부족한 곳을 미봉책으로 메우려 하다 보니, 방어 부담이 장벽 전반으로 번지는 것이다.
키리릭! 덜컥!
“제, 젠장. 이제 더는 못 막아!”
K16에 기능 고장이 발생하자, 기관총 사수는 겁에 질린 표정으로 물러났다.
벌써 몇 번째로 총열이 맛이 갔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한두 번은 아닌 느낌이었다.
그뿐이랴, 탄환을 분당 수백 발씩 박아 넣어도 대형 몬스터에게는 별 피해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쿠워어어!”
쿠웅! 카가가각!
거대한 곰을 닮은 몬스터가 강화 콘크리트 장벽을 마구 때리고 긁었다.
저런 놈이 한두 마리만 더 있으면, 생산직 헌터들이 만든 단단한 장벽도 와르르 무너질 것만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아울 베어들이 장벽의 한쪽 구석을 향해서 몰려들기 시작했다.
마치 빈틈을 찾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뭐 해! 총열 교체하고 얼른 쏴!”
발악하는 부소대장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몬스터 무리가 거의 지척까지 다가온 상태였다.
게다가 단순한 기능 고장이 아니라, 총열 외에 다른 부품까지 점검해야 했다.
거대한 곰이 수십 마리나 접근하는 상황인데, 한가롭게 수리나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으, 으아! 안 되겠습니다.”
“당장 수리하고 투입해!”
“으아악!”
“저, 저런 개…….”
꾸웅!
욕지거리를 쏟아 내던 부소대장은 몸을 휘청거리며 장벽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신장 8m는 그냥 넘을 것처럼 커다란 아울 베어가 시뻘건 안광을 빛내며 무섭게 기어오르는 중이었다.
그 모습을 보자, 병사들을 지휘하던 부소대장도 주춤하며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대형 몬스터가 주는 압박감은 엄청난 수준이었다.
“빌어먹을! 일단 빠져. 여기 있다간 진짜 다 죽겠다!”
“으으! 예, 알겠습니다.”
상황이 극단적으로 치닫고 있음을 실감한 부소대장은 퇴각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병사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장벽 아래로 뛰어 내려가려 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초열지옥(焦熱地獄) 십지폭쇄(十指爆鎖).”
삐이이! 쿠콰콰콰콰콰쾅!
장벽 꼭대기로 누군가가 불쑥 튀어 오르더니, 양손을 쫙 펼치며 노란색 섬광을 번득이는 게 아닌가.
잠시 후 어마어마한 폭음과 함께 장벽 너머에서 연쇄 폭발이 일어났다.
벽면 근처에 있던 병사들이 수 미터나 튕겨 나갈 정도로 강력한 충격파까지 일었다.
이윽고 여파가 가시고 나자, 장벽을 지키던 병사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너무도 무서웠지만, 상황이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희뿌연 흙먼지와 검은 연기가 어느 정도 걷히자, 붉은 화염에 휩싸인 지면이 드러났다.
장벽을 박살 내며 기어오르던 아울 베어 무리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시커멓게 탄 자국만이 바닥과 벽면에 남았을 뿐이었다.
“자, 영웅 등장이요!”
척!
병사들은 공중제비를 돌며 장벽 꼭대기에 떨어진 붉은 머리의 여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지금은 마치 저 사람이 여신으로 보일 지경이었다.
그녀는 지옥 같던 전선에 내려온 한 줄기 구원의 빛 같은 존재였으니까.
“저, 전시영. S급 헌터다!”
“으와아아!”
한 명이 여자의 정체를 알아차리고 외치자, 병사들은 단체로 환호성을 질렀다.
대한민국이 자랑하는 S급 헌터라면,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으리라고 믿는 것이다.
하지만 뒷모습만 보이고 있던 전시영의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엄청난 게 다가오고 있어.”
앞으로 불어닥칠 암울한 미래를 직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느새 그녀의 앞에는 시커먼 마기의 구름이 몰려드는 중이었다.
후웅! 처척!
“여, 고민이 많은 표정이네.”
한데, 그런 전시영의 곁에 내려선 누군가가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