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차원의 흐름이 뒤틀리다니, 그게 무슨 말이지?”
“저런 현상이 일어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는 의미다. 뭔가 거대한 것이 왔어.”
엔세데스는 평소와 달리, 진중한 표정으로 TV를 바라보고 있었다.
전시영과 함께 괴상한 일을 꾸미는 모습만 보다 보니, 화룡왕이라는 별호가 전혀 와닿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은 블라드 유진과 처음 만났을 때처럼 묵직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무거워진 엔세데스의 분위기만큼 상황이 심각하다는 걸 의미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정확하게 알고 싶군.”
“세부적인 것까지는 나도 알 수 없어. 단지 어떤 강력한 존재가 지구로 넘어옴으로써, 저런 현상이 일어났으리라고 추측하는 거지. 내가 받은 건 그냥 느낌뿐이니까.”
“미증유의 존재라…….”
“미안하지만 이번에는 별로 도움 되지는 못하겠어. 차원 간의 일에 너무 많은 관여를 하면, 로드가 날 잡으러 올 거거든.”
“그런 사정은 이미 알고 있다. 도움을 청하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말도록.”
“와, 너무하네. 그래도 권유는 할 줄 알았는데.”
“방금 말하지 않았나. 관여하면 안 된다고.”
“너무 많이 관여하면 그렇다는 거지. 근본적인 해결책 같은 걸 알려 주는 건 괜찮잖아?”
TV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그는 흥미로운 눈빛으로 화룡왕을 돌아보았다.
해결책이라는 단어가 유진의 구미를 당기게 한 것이다.
시선이 느껴지자, 엔세데스는 악동처럼 짓궂은 표정을 지으며 소주를 꿀꺽꿀꺽 들이켰다.
증류식 소주의 짙은 향이 거실에 가득 퍼지자, 레니가 팔을 마구 휘저으며 2층으로 도망쳤다.
도도도도.
―윽! 술 냄새!
다크 엘프 소녀의 뒷모습을 보며 킬킬거리던 화룡왕은 이내 손가락을 딱 튕겼다.
그러자 냉장고가 저절로 열리며 샤인 머스캣 한 송이가 날아오더니, 엔세데스의 입으로 직행했다.
한 알 한 알 차례대로 말이다.
유진은 그런 녀석에게 궁금했던 것을 물어보았다.
“근본적인 해결책이라는 게 뭐지?”
“간단해. 어떤 강력한 존재가 지구로 넘어와서 위협한다? 그냥 그놈보다 더 세지면 되는 거야.”
“그래서 근본적이라는 말이 앞에 붙은 건가?”
“그렇지. 내가 좀 알아보니, 헌터들은 레벨을 올려서 점점 강해진다고 하더군. 너도 같은 능력을 지니고 있지 않나?”
“맞아. 비슷한 상대와의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레벨이 오르지.”
“그럼 그렇게 하면 되겠네.”
“하나, 지구에는 나와 견줄 만한 실력자가 없어.”
대규모 미궁이라 해 봐야 S급 최상위나 SS급 수준이었다.
EX급 중반부에 접어든 그의 레벨에는 영향을 미칠 수가 없었다.
적어도 1,900레벨 이상은 되어야 조금이나마 레벨이 오를 터였다.
사실상 지구에 그런 존재는 엔세데스뿐인 상황이니, 성장이 멈추는 건 당연한 결과이리라.
하지만 화룡왕은 뭐가 문제냐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거렸다.
“어차피 전 세계의 미궁들이 성장하고 있다며. 그렇다는 말은 대규모 미궁도 한 단계 등급이 올라갔다는 소리 아닌가?”
“……그럴듯한데?”
대규모 미궁 또한 이번 사건으로 성장했다면, 블라드 유진이 갈 만한 사냥터가 생긴 거나 마찬가지였다.
“미국과 중국인가.”
그는 다이애나를 무심코 바라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미국의 대규모 미궁은 그녀를 통하면 어렵지 않게 접촉할 수 있었다.
한데, 어깨를 으쓱거린 엔세데스가 한 가지 해결책을 더 제시했다.
“아니면 강력한 아이템을 보유하는 것도 한 방법이 될 수 있지.”
“그거야 지금도 진행 중인 계획이다.”
“아니, 그저 그런 쭉정이 말고 진짜 명품을 말하는 거야.”
“갑자기 웬 명품?”
명품은 오랫동안 상품적 가치를 인정받은 고급 물건을 일컬었다.
아이템 이야기에서 갑자기 명품이 왜 나온단 말인가.
살짝 미심쩍은 눈빛으로 쳐다보자, 화룡왕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테라스 쪽을 턱짓했다.
“그런 의미에서 저택 앞의 정원. 아니, 숲 말이야. 이것 좀 내가 유용했으면 하는데.”
“거긴 왜?”
“땅이 좋더라고.”
요즘 대한민국은 영토가 폭증하고 있었다.
물론 오늘 발생한 미궁의 단계가 상승하는 사건 때문에, 당분간은 확장이 멈출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껏 확보한 영토만 해도 예전과는 비교도 하지 못할 만큼 거대했다.
화룡왕이 마음만 먹는다면, 땅 정도야 사는 게 어렵지는 않을 터였다.
아마 협회에 가서 요구하면, 곧바로 적당한 토지를 내어 줄지도 몰랐다.
일종의 뇌물성으로 말이다.
그럼에도 저택 앞의 정원을 원한다는 건 그곳에 뭔가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뜻했다.
“뭐가 있긴 한가 보군.”
“맞아. 저길 좀 파헤쳐 보고 싶은데, 집주인 허락 없이 막 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어차피 난 거의 발도 들이지 않는 곳이니. 마음대로 해.”
“대신 확실한 결과가 나오면, 네게 먼저 전해 줄게. 방금 말한 진짜 명품 말이야.”
“특별한 땅을 얻으면 거기서 좋은 아이템을 얻을 수 있다는 건가?”
“정확하게는 엘칸 차원에서 내가 만든 아티팩트를 소환하는 거지. 그러려면 마나가 일정하게 솟구치는 켈르인……. 복잡한 설명은 넘어가자고.”
“나쁘지 않은 조건이네. 그런 이유라면, 얼마든지 써도 좋아.”
화룡왕이 만든 아이템이라니, 솔깃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잡다한 몬스터의 부산물을 생산직 헌터에게 맡긴 결과보다 훨씬 좋을 게 분명했다.
무려 레드 드래곤이 제작한 물건이 아닌가.
화룡왕과 협상을 마친 블라드 유진은 소파에 앉아 얌전히 기다리고 있던 다이애나 로즈를 돌아보았다.
“이제 그쪽 이야기나 좀 들어 보지.”
드디어 자신의 차례가 돌아오자, 그녀의 얼굴은 마치 꽃이 피는 것처럼 밝아졌다.
다이애나는 그의 앞으로 다가와 몇 장의 서류를 펼쳐 놓으며 설명을 시작했다.
내용은 사실상 별거 없었다.
2차 냉전 때의 사건으로 인하여 유진과는 데면데면하던 미국 측이 먼저 접선해 온 것이었다.
바로 다이애나 로즈의 소속인 와처스 길드를 통해서 말이다.
“어지간히도 급했나 보네.”
위성 지도와 미국 현지 상황을 곁에서 지켜보던 엔세데스가 한마디를 툭 내뱉었다.
“맞아요. 그나마 미국은 전선을 조금씩 밀어내고 있었어요. 하지만 이번 일로 많은 것을 잃게 되었죠.”
미국은 중국과 마찬가지로 세계 최강의 헌터 대국 중 하나였다.
튼튼한 자본을 기반으로 외국 헌터들을 흡수하면서 성장한 미국은 외부의 도움을 거의 받지 않았다.
전력이 비슷하다고 평가되는 중국, 러시아와는 정책 기조가 전혀 달랐다.
자국의 힘만으로 대규모 미궁을 정화할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번 사태로 인해 대규모 미궁 정화가 불가해졌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도움을 청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난장판이 되어 가고 있는 세계 각국에 손을 벌리지는 않았다.
오로지 블라드 유진 단 한 명에게만 제안서를 보냈다.
꽤 친분이 있다고 알려진 다이애나 로즈를 통한 청탁이었다.
“뒤끝 없어 보여서 그건 좋네. 계약 조건이 뭐지?”
“우선은 종신 계약을 제안했는데, 이건 아무리 봐도 그냥 찔러 보는 것 같아요.”
“대규모 미궁 처리에 20억 달러. 이후로 와처스 길드에 소속되는 계약은 연간 3억 달러 수준이군. 세금은 면제에다 부가 수익은 따로 가져가는 거고.”
미국에 1년만 있어도 그에게는 대략 2조 7천억 원이 지급되는 무지막지한 계약이었다.
못해도 3조 원 정도는 순식간에 벌어들일 수 있을 터였다.
간 김에 주요 미궁 몇 군데만 정화해 주면, 그야말로 천문학적인 돈을 벌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은 땅덩어리가 넓은 만큼 이번에 대규모로 발돋움한 대성체 미궁이 꽤 많았다.
하나, 지금은 델라웨어주의 오래된 대규모 미궁 실렌스 테라(Sĭlens Terra)를 정화하는 게 우선이었다.
놀랍게도 화룡왕의 말대로 대규모 미궁이 성장한다는 보고가 들어왔으니까.
물론 유진에게 이보다 좋은 호재는 없었지만.
“당연히 이건 마음에 들지 않으시겠죠?”
다이애나는 조심스럽게 첫 번째 서류를 옆으로 슬쩍 밀어 보았다.
역시나 그의 시선은 종신 계약서를 따라가지 않았다.
돈이야 지금도 차고 넘치니, 아무리 많은 금액이라 해도 구미가 당기는 제안은 아니었다.
그는 그 아래에 깔려 있던 다른 계약서를 읽는 중이었다.
“이건 단기 계약이군.”
“네, 맞아요. 저희 길드에서도 종신 계약은 가망이 없다고 생각해요. 아마 이게 진짜일 겁니다.”
“실렌스 테라 정화에 10억 달러. 미국에 별장을 비롯한 토지 제공?”
“아마 이번 계약을 보고 이런 제안을 한 것 같습니다.”
블라드 유진이 넓은 토지를 좋아한다는 소문은 이미 전 세계에 쫙 퍼진 상태였다.
그러지 않고서야 더 좋은 보상이 널렸는데, 도심의 국유지를 받을 리는 없을 테니까.
아마도 그래서 이런 제안을 내민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건 넓은 영지를 원하는 그의 중세적 관념 때문에 받은 땅이었다.
당시에는 정착할 집이 필요하기도 했고 말이다.
상당한 면적의 정원에 저택까지 갖춘 지금은 너른 땅 같은 건 별로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런데 문득 곁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엔세데스가 눈을 반짝이며 다가오는 게 아닌가.
“오호? 그럼 혹시 그 땅도 대여해 줄 수 있나?”
“그래. 이번에는 네가 있었지.”
화룡왕의 말에 맞장구치며 눈짓하자, 다이애나는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규모 미궁을 공략하는 대가로 소정의 대금과 토지 몇 군데를 주는 조건이면, 두말할 것도 없이 대환영이었다.
한국과 달리 북미는 차고 넘치는 게 토지 아니었던가.
“그럼 여긴 계약 완료. 후후! 기대하라고.”
엔세데스가 손가락을 딱 튕기며 말하자, 다이애나 로즈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서로 그냥 대충 말만 하고 끝났는데, 대체 무슨 계약이 되었다는 말인가.
그녀의 의문을 해소해 주기 위해서 화룡왕은 설명을 덧붙였다.
“언령으로 맺어진 계약이야. 그딴 종이 쪼가리보다 훨씬 신뢰도가 높지.”
“예?”
물론 설명을 제대로 해 준다고 해서 모두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언령에 관해서 설명하려면 또 시간을 잡아먹을 테니, 블라드 유진은 얼른 끼어들며 질문을 던졌다.
“단기 계약이면, 언제까지 실렌스 테라를 정화해야 하는 거지?”
“아, 네. 여기 세부 항목이 있네요. 기한은 2개월이고, 지원은 요청하는 만큼이랍니다.”
“자신감이 넘치는군. 만약 지원을 안 받으면 어떻게 되나.”
“어……. 그런 내용은 없는데, 어떡하죠?”
“얼마나 더 줄 수 있냐고 물어봐. 아무래도 토지가 좋겠군. 그런데 걔들 나한테 줄 땅은 있어?”
“그러게요. 전선이 엄청나게 밀렸다고 했는데요. 설마 직접 개척하라고 하지는 않겠죠?”
“그거야 별로 어렵지 않은 일이긴 한데……. 아무래도 이 친구와 함께 가야 할 것 같군. 네게 필요한 땅이니 실물을 봐야 하지 않겠어?”
“당연하지. 이번에는 같이 움직여야겠군. 빨간 머리 아가씨는 바쁜 듯하니, 너랑 좀 놀아야겠네.”
엔세데스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자, 유진은 두 번째 계약서를 들어 다이애나의 앞으로 내밀었다.
“방금 말한 거 들었지? 길드에 연락해서 계약 조건 수정 가능한지 알아봐 줘.”
“네, 알겠습니다.”
그녀는 밝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다음, 위성 전화를 찾으러 2층으로 올라갔다.
아마 지금 미국은 새벽쯤일 테지만, 시간이 뭐가 중요하겠는가.
미국의 미래가 달린 문제인데.
다이애나 로즈가 사라지자, 블라드 유진은 다시 TV로 시선을 돌렸다.
미궁 성장 건은 워낙 여파가 크다 보니, 세계 곳곳에서 희한한 일이 발생하고 있었다.
그런 것들을 알게 되는 것도 소소한 재미였다.
한데, 문득 현관 쪽에서 누군가가 잰걸음으로 다가와 살짝 고개를 숙였다.
“대부님,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보통은 정웅철이 해야 할 역할이었으나, 손님을 안내해 온 사람은 조낙범이었다.
조 변호사와 함께 온 자를 쳐다보니, 어째서 그랬는지 알 것 같았다.
“직접 찾아오다니 의외로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