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폰시아노는 눈을 빠르게 깜빡거리며 재차 질문을 던졌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로마에서 사람들이 사라지고 있다네. 이곳은 안전지대임이 확실한데 말이야.”
“먹고 살기 힘든 자들이 야반도주하는 거야 비일비재한 거 아니겠습니까?”
“실종 사건은 계층을 가리지 않고 무작위로 일어나고 있어. 벌써 수백 명이 사라졌다네. 야반도주와 구분하지 못한 것까지 합하면, 그보다 더 많을 테지.”
“허……. 그자의 말이 진짜였다니.”
안토니오의 말에 폰시아노는 허탈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대충 찾는 척만 하려고 했는데, 그저 가볍게 생각할 문제가 아닌 것 같았다.
폰시아노는 기사단장을 바라보며 진중한 표정으로 질문을 던졌다.
“앞으로 어찌하실 건지요.”
“아직 바티칸에는 별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네. 로마의 일은 이탈리아 경찰이 알아서 할 일이지.”
“그럼 이 건은…….”
“개인적인 부탁을 받은 모양인데, 거기까지 성기사단에서 도와줄 수는 없네.”
“후우! 알겠습니다. 원칙이 그러니, 어쩔 수 없는 일이죠.”
“그래도 자네가 바티칸에 머무르며 조사하는 것까지 막지는 않겠네. 어차피 입국 기한은 꽤 남았지?”
“예.”
“그럼 가 보게.”
“감사합니다. 단장님.”
폰시아노는 안토니오의 배려에 깊이 감사를 표하며 단장실을 빠져나왔다.
어느새 저녁이 되어 시뻘겋게 물든 하늘을 마주하자, 머릿속이 복잡하게 얽히는 것 같았다.
고개를 세차게 흔들어 정신을 차린 폰시아노는 바티칸 시국 외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상념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니지. 로마 시내부터 시작해 보자.”
* * *
유진종합건설과의 계약이 끝난 블라드 유진은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마침 조영준이 가져온 제작 아이템을 살펴보던 참이었다.
<아이템 정보>
명칭 : 카모플라쥬 롱코트
등급 : A
내구도 : A+
효과 : 위장(60%), 미약한 방어력
변검귀 가죽을 재료로 제작된 외투. 1킬로미터 이상의 거리에서 원거리 관측을 무효화 함. 한 번 위장을 성공한 대상에게는 24간 동안 위장 효과 적용.
60% 확률이라는 조건이 붙었지만, 멀리서 감시하는 것을 원천 차단할 수 있었다.
이미 그에게는 암흑화라는 매우 강력한 은신 능력이 있었지만, 언제나 스킬을 시전하고 다닐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카모플라쥬 롱코트는 나름대로 가치가 있는 아이템이었다.
디자인도 유진의 마음에 쏙 드는 편이었고.
“좀 어떻습니까?”
“나쁘지 않은 옵션인데? 앞으로도 이 정도 품질이면 좋겠군.”
“이게 다 재료가 좋아서 그런 거지요. 하하!”
“대금은 잘 받았나?”
“물론입니다. 과분할 정도로 주셔서 요즘 일할 맛도 나고 정말 좋습니다.”
“그래. 그럼 이제 가 봐.”
“예.”
조영준이 정웅철과 함께 밖으로 나가자, 그는 만족한 표정으로 코트를 입고 거울에 비춰 보았다.
그런데 문득 유진의 귓가에 희미한 말소리가 들려왔다.
“거기 누구 있나?”
“예, 대부님.”
그의 부름에 대답한 사람은 거실 한쪽 구석의 노트북으로 업무를 보고 있던 조낙범이었다.
최근 조 변호사는 또 다른 업체를 선정하기 위해서 여기저기 알아보고 있었다.
이번엔 유진종합건설 때처럼 너무 작은 곳보다는 적당히 규모가 있는 곳으로 선정하려 했다.
블라드 유진의 요구를 대부분 수용할 수 있도록 말이다.
“무슨 일이십니까?”
노트북을 접고 후다닥 달려온 조낙범이 묻자, 그는 검지를 입술에 갖다 대며 귀를 기울였다.
잠깐의 적막 이후 유진은 명령을 내렸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미세한 음파의 원인을 청각만으로 감지해 낸 것이다.
“2층에 가서 레니가 뭘 보고 있는지 알아 와. 지금 당장.”
“예? 레, 레니요?”
“어려운 지시인가?”
“아, 아닙니다.”
조 변호사는 이상하리만치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계단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최근 그의 집에 자주 드나들면서 조낙범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 하나 생겨 버렸다.
바로 블라드 유진이 데리고 있는 신비로운 흑발의 소녀 레니였다.
어린아이답게 그녀의 장난은 짓궂기 그지없었다.
문제는 레니의 완력이 일반적인 소녀의 범주를 아득히 초월한다는 거였다.
뿅망치에 얻어맞고 기절한 것만 해도 십수 번이었고, 베개 싸움에 휘말려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으으! 오늘은 제발…….”
조낙범은 뿌리가 조금 희끗희끗해진 머리칼을 쓸어넘기며 2층으로 올라갔다.
다행히도 레니는 2층 거실 소파에서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무심코 벽면을 바라보니, 볼륨이 매우 작게 낮춰진 TV가 뉴스를 쏟아 내는 중이었다.
영상물을 확인한 조 변호사는 발뒤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계단을 내려가려 했다.
그런데 문득 뒤에서 잠이 덜 깬 목소리가 들려오는 게 아닌가.
“조밥이야?”
“히이익!”
다다다다다!
뒷덜미에 소름이 돋은 조낙범은 미친 듯이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그러고는 순식간에 유진의 앞에 당도하여 채널명을 알려 주었다.
“허억! 허억! 뉴습니다. 뉴스!”
아무래도 그의 곁이라면 안전할 테니, 이내 조 변호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블라드 유진의 그림자에서 레니가 고개를 불쑥 내밀기 전까지는 말이다.
“왜 도망가? 나랑 놀아야지.”
“히엑!”
쿵!
그 광경을 보자마자 조낙범은 뒤로 벌러덩 넘어져 버렸다.
돈이 궁해서 진 연합체의 일을 돕다가 하수인이 되었다지만, 그래도 변호사는 사회적 지위가 꽤 높았다.
하지만 이 집에서 조 변호사가 최약체라는 사실은 변함없었다.
워낙 주변에 괴물들이 가득했기에 벌어진 일이었다.
“쉿! 조용히.”
위기에 처한 조낙범을 구한 건 적절한 TV 채널을 찾은 유진이었다.
놀랍게도 그의 말 한마디에 레니는 얌전히 소파에 앉아 주머니에서 꺼낸 롤리팝만 핥았다.
[긴급 속보입니다. 유럽에서부터 시작된 미궁 증폭 현상이 전 세계로 번지는 중입니다. 각 미궁은 최소 한 단계씩의 성장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미국과 중국에만 남아 있던 대규모 미궁이 벌써 열 개나 늘어났다는 소식입니다.]
“미궁 증폭?”
뉴스에 집중하던 블라드 유진은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자막에 뜬 숫자에 주목했다.
대규모 미궁이 총합 12개가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이윽고 자막에서 2가 탈락하더니, 3이라는 숫자가 새겨졌다.
그새 대성체 미궁이 대규모로 성장한 모양이었다.
“상황이 심각해 보입니다. 프랑스인가 보군요.”
조낙범의 말마따나 뉴스는 미친 듯이 퇴각하는 중인 프랑스 전선을 보여 주고 있었다.
퇴각은 몽펠리에 인근의 옛 전선 터까지 이어졌다.
프랑스는 사건이 터진 지 고작 하루 만에 유진의 활약으로 얻은 영토를 몽땅 잃어버린 것이다.
교황청 성기사단으로 보이는 자들이 화면에 잠깐 잡혔는데, 그는 그 안에서 주요 인물 하나를 알아보았다.
‘바티칸의 성검 요한? 저자가 프랑스 전선에 있었나?’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지만, 그자의 인상착의에 관해서는 이미 숙지하고 있었다.
교황청의 최강자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니, 미리미리 알아 둔 것이다.
상당히 고전한 듯, 번쩍이는 은빛 갑옷은 흙과 먼지가 뿌옇게 앉아 빛이 바랜 상태였다.
아무래도 아이템을 손질할 시간도 없었을 만큼, 급하게 퇴각한 모양이었다.
우당탕탕!
심각한 얼굴로 TV를 보고 있는데, 2층에서 누군가가 달려 내려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슬쩍 화면에서 고개를 돌려보니, 다급한 표정의 루시아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언제나 조용조용하게 다니는 스타일이지만, 오늘은 분초를 다투는 일이 있는 듯했다.
“스페인도 상황이 좋지 않은 모양이군.”
“아, 넵! 두 개의 전선이 모두 후퇴 중이랍니다. 이대로라면 또 마드리드를 빼앗길 수도 있다는……. 이미 알고 계시는군요.”
유진이 보고 있던 TV 화면을 확인한 루시아는 꾸벅 인사를 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다녀와. 상황 봐서 가능하면 지원해 주지.”
“감사합니다.”
그의 한마디에 우중충하던 그녀의 얼굴이 봄꽃처럼 활짝 폈다.
아마 루시아는 천군만마를 얻은 듯한 느낌일 것이다.
블라드 유진이라면 새로 생긴 대규모 미궁쯤이야 단신으로 썰어 버릴 능력이 있으니까.
밝은 얼굴로 집을 나서는 그녀를 잠깐 지켜보다가 TV로 시선을 돌렸다.
이제 뉴스에서는 유럽이 아니라, 다른 대륙의 상황도 흘러나오고 있었다.
우당탕탕!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누군가가 계단을 미친 듯이 달려 내려와 복도에서 슬라이딩하며 방향을 바꾸었다.
딱 전시영스러운 행동이었다.
“여! 나 바빠서 간다. 도마뱀 아저씨한테 말 좀 전해 줘. 그 녀석 아직 휴대 전화에 익숙하지 않거든!”
“평소에는 어떻게 연락했지?”
“이상한 텔레파시를 쓰더라고. 안녕!”
후다다닷!
전시영은 폭풍처럼 복도를 달려가더니, 조영준을 보내고 돌아오던 정웅철과 현관에서 마주쳤다.
“깍두기, 비켜!”
“헙!”
정웅철은 화들짝 놀라며 벽에 딱 붙어 서서는 문이 닫히지 않도록 붙잡아 주었다.
이자는 진 연합체에서 활동하는 비인가 헌터였지만, 전시영의 앞에서는 한낱 쪼렙에 불과했다.
그러다 보니 절로 험악한 인상을 감추며 깍듯한 태도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대부로 모시는 블라드 유진의 손님이기도 하고 말이다.
“문 고마워!”
“별말씀을.”
엄청난 속도로 신발을 신은 그녀는 정웅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바람처럼 사라졌다.
그러자 이윽고 주차장 쪽에서 굉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쿠르르르르!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블라드 유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말았다.
“설마 그놈의 장갑차를 여기까지 끌고 왔나?”
“요즘에는 승용차 대신 장갑차만 타고 다니시던데요.”
“진짜 못 말리는 여자로군.”
그는 어처구니없는 눈빛으로 멀어지는 K808 장갑차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스윽! 척! 척!
루시아에 이어 전시영 다음으로는 다이애나 로즈였다.
급하게 사라지던 둘과는 달리, 그녀는 사뿐사뿐 계단을 내려와 느긋하게 유진의 앞으로 다가왔다.
“꽤 여유 있어 보이네.”
“네, 저는 영국 출신이라서요. 거긴 큰 문제가 없다네요. 아일랜드에 피해가 좀 있어서 지원하는 중이랍니다.”
“그래도 떠나긴 할 건가 보군.”
“귀환 명령이 떨어지긴 했는데, 미국에는 천천히 가도 돼요. 유진 님께 말씀드릴 것도 있고요.”
“나한테 할 말이 있다고?”
“네, 이번에 제가…….”
“잠깐.”
뭐라고 이야기하려는 순간, 그는 다이애나의 눈앞에 손을 펼쳐 보이며 말을 막았다.
그러고는 1층 구석에서 슬리퍼를 질질 끌고 나타난 실크 가운의 남자를 가리켰다.
“옷 좀 입고 다녀.”
“가운도 옷이야. 부드러워서 좋다고.”
새파란 가운만 걸치고 거실로 걸어 나온 자는 엔세데스였다.
레드 드래곤의 수장이라는 위엄 따위는 어디 갔는지, 아침 댓바람부터 증류식 소주로 병나발을 불고 있었다.
그러다가 TV를 힐끔거린 화룡왕은 눈살을 찌푸리며 알 수 없는 한마디를 툭 내뱉었다.
“차원의 흐름이 뒤틀린다 했더니, 벌써 시작되었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