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블라드 유진은 DK를 잃은 대신 림일국을 얻었다.
A급 최상위라 전투는 조금 아쉬웠으나, 마기 축출 능력은 분명 어딘가 유용하게 쓸 수 있을 터였다.
본디 마기를 박멸하는 건 강력한 성물로만 가능한 일이었다.
엘―칼릭스의 성배나 토리노의 수의 같은 특별한 물건으로만 할 수 있었다.
오로지 스킬로 비슷한 효과를 낸다는 사실만으로도 림일국은 나름 괜찮은 인재였다.
‘이를테면 마계와 같은 환경에서도 마족들의 유리함을 없애는 게 가능하겠지.’
마족은 마기가 충만한 마계에서 본신의 능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안테리오르 타워나 천공의 성에서 림일국이 마기 축출을 시전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질 터였다.
그럼 그곳은 더 이상 마족들의 홈그라운드가 아니게 될 테니까.
대략 그만한 활약만 해 주더라도 림일국은 충분히 가치를 보여 준 것이리라.
하수인에게 의념을 보낸 이후 대략 대여섯 시간 정도 흘렀을 무렵, 캠프에 난데없는 굉음이 들려왔다.
쿠르르르르!
“음?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리야?”
쉬고 있던 공략대원들은 황급히 텐트 밖으로 나와 전투 대형을 갖추었다.
어지간히도 놀란 모양인지, 몇몇은 칫솔을 입에 문 채로 무기만 달랑 들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이내 적이 아님을 확인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그렇다고 경계를 풀거나 하지는 않았다.
무시무시한 소리를 내며 다가온 것의 정체를 정확히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장갑차가 여긴 왜 온 거지?”
“그러게. 그것도 군용은 아닌 거 같아. 온통 검은색으로 칠해 놨잖아. 한국 육군에서 저런 작살나는 외형을 택할 리가 없어.”
대원들이 수군대는 동안, 유진은 캠프를 벗어나 장갑차의 전면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상부 해치가 열리며 누군가가 불쑥 튀어나오는 게 아닌가.
“으하하! 오랜만이로군. 유진!”
시커멓게 도색한 K808 장갑차를 몰고 다니는 자들은 화룡왕과 전시영뿐이었다.
장갑차 위로 펄쩍 뛰어오른 엔세데스는 양팔을 쫙 벌리며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자신의 변화한 모습을 감상하라는 듯한 느낌이었다.
돈이 없어서 빌빌대던 화룡왕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상태였다.
놈은 꽤 현대적인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상당히 세련된 패션 감각을 보아하니, 전시영이 입혀 준 건 아닌 모양이었다.
아마 스스로 저런 능력을 갖췄든지, 다이애나나 루시아의 도움을 받았을 확률이 높았다.
“많이 변했네.”
“당연하지. 돈을 왕창 벌었는데, 좀 써야 하지 않겠나? 어때, 끝내주지?”
엔세데스는 마치 장갑차 지붕이 런웨이라도 되는 것처럼 갖가지 모델 포즈를 취해 보였다.
그러자 상부 해치로 머리를 내밀던 전시영이 녀석의 다리를 찰싹찰싹 때렸다.
“어휴! 내가 박차 달린 부츠 신고 그 짓거리 하지 말랬지. 흠집 난다고!”
“그깟 흠집이야 깔끔하게 판금 도색 하면 될 거 아닌가.”
“그걸 운전도 못 하는 네가 하냐? 내가 하지? 말도 안 타면서 대체 그딴 건 왜 차고 다니는 거야?”
“엘칸 차원의 패션에서는 박차가 필수이니라.”
“이걸 확 그냥.”
도착하자마자 아웅다웅하는 걸 보아하니, 둘의 평소 모습이 어떤지는 확실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벌써 머리가 지끈거리는 듯한 느낌에 블라드 유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나저나 두 사람이 여긴 웬일이지?”
“아, 그 조밥 변호사가 좀 도와 달라고 해서 말이야. 여기에 보낼 운송 수단이 필요한데,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통일대교를 통과할 수 없다더라.”
“내 이름을 대면 될 텐데.”
“주말이라 공무원들이 출근을 안 했다나 봐. 그래서 우리가 왔지. 이 작살나는 장갑차는 강을 그냥 건너 버릴 수 있다고.”
텅텅!
전시영은 K808의 차체를 장난스럽게 두드리며 씩 웃었다.
그는 그런 그녀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방금 했던 말을 정정해 주었다.
“조밥 변호사가 아니라, 조낙범 변호사.”
“뜻만 통하면 되지. 사람 이름을 어떻게 일일이 다 외우고 다녀?”
“여전히 무지막지하군.”
“아! 잠깐만.”
이윽고 그녀는 해치 안으로 사라지더니, 잠시 후에 뭔가를 불쑥 꺼내 들었다.
“조밥 변호사가 이 아이템을 전해 달라던데. 어디다 의뢰 넣었던 거라면서.”
“그때 그거로군.”
유진은 조영준이라는 방어구 전문 생산직 헌터에게 맡겼던 혈거인의 가죽을 떠올렸다.
상등품 제작 재료라면서 좋아하더니, 과연 어떤 물건이 나왔을지 궁금했다.
전시영에게서 검붉은 무언가를 받아든 그는 홀로그램을 켜서 옵션부터 확인해 보았다.
<아이템 정보>
명칭 : 혈거인의 심장
등급 : S
내구도 : S
효과 : 충격 흡수 20%, 냉기 저항 10%, 독 저항 15%, 파괴 시 공격 무효화
혈거인의 가죽으로 만든 엄심갑. 내구도를 넘어서는 충격에 파괴되는 순간, 1초 동안 모든 공격을 튕겨 냄.
‘공격 무효화? 이거 괜찮네.’
조영준이 만든 혈거인의 심장은 나름 쓸 만한 아이템이었다.
아무리 재료가 좋았다지만, S급이 뜬 건 꽤 고무적인 성과였다.
최상위 수준의 생산직 헌터라도 S급 아이템을 제작하는 건, 상당한 운이 필요한 일이었으니까.
거기다 옵션 또한 준수한 편이었다.
특히 악염도나 카이넬의 신안처럼 아이템에 스킬까지 붙어 있었다.
물론 최후의 순간 단 한 번밖에 발동되지 않는 거였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혈거인의 심장이 목숨을 구하는 날이 있을 터였다.
스윽! 척!
블라드 유진은 셔츠를 벗고 얇은 흰색 민소매만 입은 채 엄심갑을 착용하려 했다.
아무래도 옷 위에 걸치기에는 영 움직이기가 불편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문득 그런 그의 앞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오는 게 아닌가.
찰칵!
“올! 좋은데? 좀 더 과감하게 포즈 취해 봐.”
고개를 들어 보니, 휴대 전화를 든 전시영이 연신 화면을 눌러 대고 있었다.
마치 본인이 사진작가라도 된 듯 이리저리 이상한 자세로 앉았다 일어나면서 말이다.
“뭐 하는 거냐?”
“보기 드문 광경인데, 무조건 남겨 둬야지. 나중에 애들한테 팔아먹을 수도 있고.”
“…….”
그녀의 정신 나간 소리에 유진은 짧은 한숨을 쉬며 얼른 엄심갑과 셔츠를 입었다.
그래야 저 괴상한 행위가 멈출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에이. 아깝네.”
“시끄럽고 여기 이 친구들이나 데려가서 조낙범한테 넘겨. 그럼 그자가 알아서 할 거다.”
“오, 뭔데? 오염 지대 근처에 웬 민간인이야?”
“주웠어.”
대충 아무렇게나 설명한 그는 림일국을 향해서 고갯짓했다.
그러자 개성 북쪽의 숲에서 발견한 열 명의 가족이 우물쭈물하며 다가왔다.
림일국이 괜찮다며 앞장서서 걸어왔지만, 한국 사람들과 접촉하는 것이 영 달갑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긴 그 오랜 세월을 세뇌받으며 살아왔으니, 이런 반응은 당연했다.
영문도 모른 채 냄새나는 열 명의 난민을 떠안게 된 전시영은 어깨를 으쓱하며 양손을 펼쳐 보였다.
그러자 귀찮아하는 블라드 유진의 반응을 읽은 도형욱이 얼른 다가와 설명을 덧붙여 주었다.
“반갑습니다. 전시영 랭커님. 유진종합건설의 부사장 도형욱입니다.”
물론 공략대장의 행동엔 그녀와 안면을 익혀 보려는 의도가 저변에 깔려 있었다.
가볍고 제멋대로인 것처럼 보여도 전시영은 한국에 두 명뿐인 S급 헌터였으니까.
도형욱의 설명을 들은 그녀는 금방 상황을 이해했다.
“그러니까 저자들을 이송해 주기만 하면 되는 거지?”
“예, 그렇습니다.”
“쉽네.”
전시영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이야 돌아가는 김에 내려 주면 그만인 거니까.
물론 케케묵은 냄새는 영 참기 힘들었지만.
그런데 캠프를 뒤적거리던 유진이 장갑차로 돌아와 큼지막한 덩어리를 불쑥 내밀었다.
“아, 그리고 조낙범한테 이것도 좀 갖다 줘.”
“그게 뭔데?”
“변검귀의 가죽인데, 외투나 만들까 싶어서.”
변검귀 가죽은 위장 효과가 있는 데다가, 방어력도 상당히 높은 편이었다.
생산직 헌터의 가공을 거치면, 괜찮은 작품이 나올 것 같았다.
물론 혈거인처럼 등급이 높지는 않겠지만.
“오! 변검귀? 희귀한 놈들인데, 여기 있었어? 이거도 팔면 꽤 할 거야.”
최근에 아이템 장사를 왕창 한 덕분인지, 전시영은 제작 재료 시세를 훤히 꿰고 있었다.
어차피 변검귀의 가죽은 상당히 남을 터라, 그녀에게 넘겨도 괜찮을 것 같았다.
은근히 그러기를 바라는 눈치기도 하고 말이다.
“남은 건 너희가 쓰든지, 아니면 팔아도 돼.”
“오! 그래? 좋아. 운송료는 이걸로 퉁 치자고.”
“나쁘지 않은 거래로군.”
“그럼 갈게. 다음에 봐.”
후면 해치를 열어 림일국 일행을 태운 전시영은 밝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이윽고 K808 장갑차는 모든 해치를 닫고,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쿠르르르르!
에너지 코어 파워팩 특유의 소리를 내면서 말이다.
개성 북부에서 일어난 작은 소동은 그렇게 일단락되었다.
* * *
한국이 북진 정책을 펴고 있을 무렵, 폰시아노는 오랜만에 바티칸 시국으로 돌아가 있었다.
성기사단에 그간의 성과를 보고하고, 블라드 유진이 언급한 사건도 조사하기 위함이었다.
폰시아노는 먼저 안토니오 단장에게 천공의 성 작전을 상세히 보고했다.
보고서에는 기재되지 않은 시시콜콜한 일까지 모두 전달했는데, 대부분은 유진에 관한 내용이었다.
“흠. 그자가 우리 편을 들어 주다니, 이해할 수가 없군. 애초부터 교황 측 사람 아니었던가?”
“그런 건 없다고 합니다. 자신을 발굴해 준 인연으로 함께하고 있었을 뿐이지, 계약하지는 않았다더군요. 당연히 상하 관계 같은 것도 없고요.”
“나쁘지 않은 전개로구먼. 이번 일로 교황이 크게 한 방 먹었어. 뒤늦게 성명을 내 봤자, 이미 기운 분위기가 바뀌지는 않지.”
그가 파견 성기사대와 함께 천공의 성을 공략함으로써, 교황과의 불화설이 불쑥 고개를 쳐든 것이다.
당연히 그건 안토니오 기사단장이 퍼트린 소문이었다.
오랫동안 교황과 정치적으로 싸워 온 단장이 그런 절호의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다.
그러자 안드레아 교황은 곧장 블라드 유진과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성명을 냈으나, 이미 분위기는 이쪽으로 넘어온 뒤였다.
“그래서 그자가 뭐라던가? 선물은 마음에 들어 하나? 그래도 상당한 물건을 줬는데 말일세.”
“영 눈에 차지 않는 모양입니다. 아무래도 요즘 SS급에 올랐다는 소문까지 돌아서 말이죠.”
“허! 그런 수준까지…….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충분히 보일 법한 반응이로군.”
“그래서 뭔가 부족한 것 같아, 한 가지 요구를 더 들어주려 합니다.”
“요구?”
“예, 사람을 찾아 달라더군요.”
폰시아노는 그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전달하며, 아마르 코너의 간단한 신상이 적힌 서류를 내밀었다.
안토니오 단장은 미간을 찌푸리며 두 장의 종이를 넘겨 보더니, 느릿하게 주억거리며 말했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바티칸 근처에서 일어나는 일과 어느 정도 합치가 되는군.”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