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얄 블러드-156화 (157/226)

6화

“부, 부르셨습니까?”

전화한 지 30분도 되지 않아서 나타난 자는 폰시아노였다.

한국 파견 기사대장은 거의 추기경급에 해당하지만, 그의 앞에서는 머리를 조아릴 수밖에 없었다.

고작 아이템 하나만 던져 주고 끝낼 만큼, 유진에게서 받은 도움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천공의 성을 함께 공략함과 더불어, 교황과 돌아서는 모습까지 보여 주었으니까.

그로 인해 성기사단이 정치적으로 얼마나 많은 이득을 보았던가.

공손한 폰시아노의 태도를 흡족한 눈으로 지켜보던 그는 슬슬 본론을 꺼냈다.

“교황청에서 이상 징후가 포착되었다.”

“이상 징후라니……. 그게 어떤 건지 알 수 있겠습니까?”

“정확하게는 알 수 없어. 상당한 실력자가 그 근처에서 연락이 끊겼다는 정보다.”

“교황청 근처라면, 로마겠군요.”

“아무래도 그럴 테지.”

“갑자기 제게 왜 이런 말씀을 하는 건지요.”

“눈치가 영 없군. 그러니 그딴 이상한 아이템이나 가져오지.”

폰시아노는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지난번 성기사단의 손을 들어 준 대가로 양도한 건 엘―칼릭스의 눈물이라는 아이템.

SS급인 데다가 온갖 유용한 패시브 옵션이 붙어 있는 엄청난 물건이었다.

하지만 블라드 유진의 반응은 탐탁지 않았다.

솔직히 그건 신성력 증폭 옵션 때문이었지만, 폰시아노는 그의 눈이 너무 높다고만 생각했다.

이번에는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을 요구를 할지 시작부터 두려운 마음이 새록새록 돋아났다.

“죄, 죄송합니다.”

그래도 유진에게 대거리를 할 수는 없었기에, 폰시아노는 일단 사과부터 박고 보았다.

그러자 그는 눈앞의 아둔한 성기사에게 요구 사항을 확실하게 전달했다.

“가서 알아보라는 뜻이다. 특히 교황을 주시해.”

“안드레아 교황을요?”

“어차피 너희와는 정적이니, 동태를 알아보는 것쯤은 원래도 하고 있지 않나?”

“그렇긴 합니다만, 감시를 붙인 적은 없습니다. 도청이나 간자(間者) 파견은 아무래도…….”

“누가 그러라고 했나? 그냥 교황의 신변과 바티칸 시국에 이상한 일은 없는지 알아보라는 소리다.”

“아, 넵.”

“겸사겸사 아마르 코너라는 놈이 있는지도 확인해 보고.”

블라드 유진은 탁자 위에 두 장의 종이를 올려놓았다.

DK의 인상착의와 간단한 신상 명세였다.

“가명으로 활동할 확률이 높으니, 이름은 크게 신경 쓰지 마.”

“알겠습니다. 소상히 알아보고 연락드리겠습니다. 한데, 언제까지 해야 하는 일입니까?”

“일주일마다 경과 보고해.”

“……예.”

어물쩍 대답한 폰시아노는 고개 숙여 인사한 뒤, 황급히 저택을 나섰다.

그자는 차의 시동을 걸면서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부우웅!

“교황청에 이상한 일이 뭐가 있다고……. 대충 알아보는 척만 하고 치워 버려야겠군. 다음번부터는 뭐든 거절해야겠어. 이 정도면 보은으로 충분하지.”

주차장을 빠져나가게 되자,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이번에는 블라드 유진이 뭔가 대단한 걸 요구하지는 않았으니까.

하지만 폰시아노는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그에게 또 큰 빚을 지게 된다는 사실을 말이다.

* * *

건설업 재벌들과 관련된 자질구레한 일이 끝나자, 유진은 북부 개척 사업에 집중할 수 있었다.

유진종합건설은 기존의 고용 헌터들만 남기고, 나머지는 전부 해고해 버렸다.

블라드 유진 혼자서도 미궁 공략이 가능한 상황인데, 들러리를 잔뜩 데리고 다닐 필요는 없었으니까.

돈만 잡아먹는 단기 계약직 용병 헌터들을 털어 내고 나자, 공략대는 달랑 21명이 남았다.

이젠 공략 팀이라고 불러도 될 만큼 규모가 대폭 축소된 것이다.

새로 영입한 계약직 헌터 중에 힐러 한 명은 남겨 두었다.

원체 귀한 존재다 보니, 유진종합건설 측에서도 놓치기 아까웠던 모양이었다.

“여기가 개성이군요. 실제로 보는 건 처음입니다.”

도형욱은 폐허가 된 개성 시내를 신기한 눈빛으로 둘러보았다.

대원들 또한 대장과 비슷한 표정이었다.

사실 한국 사람에게 북한 땅이란 미지의 세계와도 같았다.

탈북한 사람들의 이야기나 다큐멘터리 등으로 접하기는 했어도, 직접 가 본 사람은 손에 꼽았으니까.

하지만 유진의 눈에는 다 거기서 거기로 보였다.

드라코 도무스로 향할 때, 한국의 지방 도시도 대부분 저렇게 폐허가 되어 있었으니까.

“개성 북쪽의 대성체 미궁과 서쪽의 두 곳만 정리하면, 목표는 완료됩니다.”

“더 이상 영토를 넓히지 않는 건가?”

“일단은 그렇습니다. 이 넓은 땅을 모두 개발하기에는 폐사(弊社)의 능력 범위 밖입니다.”

“너무 큰 걸 집어삼켰다간 배가 찢어질 수도 있다?”

“예, 과유불급이지요.”

“현명하군.”

유진종합건설의 사장, 도재한은 자신의 주제를 너무도 잘 아는 사람이었다.

중소기업이 이만한 크기의 땅을 단독으로 개발한다는 것만 해도 이미 배가 터질 지경이었다.

여기서 더 욕심을 부렸다가는 제 살만 깎아 먹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었다.

건설 중이나 후에 문제가 발생하면, 아무도 유진종합건설에 수주를 주지 않을 테니까.

“공략이 끝나도 새로운 계약을 따낼 시간은 충분할 겁니다. 이미 확실한 전례가 있으니, 너도나도 좋은 조건을 제시하며 달려들 테니까요.”

도형욱은 그를 다른 회사로 보내려 하면서도 의연한 표정을 지었다.

그저 입에 발린 위선이 아니라, 한계를 절감하고 진정으로 물러서려는 의지가 돋보였다.

블라드 유진은 이렇게 의지가 곧은 자들을 좋아했다.

이런 놈들을 하수인으로 만들면, 목숨을 버려 가면서까지 충심을 보여 주었으니까.

‘가보르가 떠오르는군. 마자르족 중에서 가장 쓸 만한 놈이었는데.’

그는 문득 1천 년 전의 과거를 떠올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공략대는 개성 시내를 지나서 북쪽의 오염 지대를 향해서 이동하는 중이었다.

원래는 전선 건설 공병대가 들어오고도 남을 시간이지만, 길이 좋지 않아 임시 도로부터 깔고 있었다.

일부 중장비는 제아무리 열악한 노면이라도 상관없지만, 다른 차량은 통행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이럴 때는 공략 범위를 넓게 잡으면 그만이었다.

어차피 블라드 유진이 함께하는 한 전력이 부족할 일은 없었다.

타다다다닷!

그런데 다음 미궁 공략을 위해서 이동하던 중, 고용 헌터 하나가 헐레벌떡 달려오는 게 아닌가.

정찰을 보냈던 원거리 딜러였다.

“대, 대장님!”

“무슨 일이죠?”

“저기 저쪽에 사람이 있습니다.”

“예?”

도형욱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으며 공략대원들을 돌아보았다.

상식적으로 이런 곳에 사람이 있을 리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정찰자는 확신에 찬 눈으로 거듭 보고했다.

“정말입니다. 저기 북쪽 숲으로 들어가는 두 명을 정확하게 봤습니다. 넝마 같은 녹색 옷을 입고 있더군요.”

믿기 힘든 말이었으나 확인해 보지 않을 수는 없었다.

이곳은 전선과 오염 지대 사이의 위험한 장소라, 일반인이 있으면 안 되기 때문이었다.

만약 저 숲속에 숨어 있는 자들이 헌터라고 해도 상당한 문제가 될 터였다.

이곳은 미궁 개발 지원안에 의하여 유진종합건설에게만 공략이 허가된 장소니까.

도형욱은 팔짱을 끼고 가만히 서 있던 유진을 무심코 돌아보았다.

진정한 결정권자인 그에게 의견을 묻는 것이었다.

자신에게로 시선이 쏠린 것을 느낀 블라드 유진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어차피 가는 길이니 들러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 뭔지 궁금하기도 하고.”

그의 허락이 떨어지자, 도형욱은 정찰자에게 눈짓했다.

얼른 안내해 보라는 의미였다.

“앞장서겠습니다. 따라오시죠.”

정찰자는 장애물로 가득한 개성 시내를 마치 제집처럼 돌아다녔다.

길 찾기에 매우 능숙한 걸 보니, 그간 임무 수행 차 어지간히도 드나들었던 모양이었다.

이윽고 공략대는 복잡한 폐허를 벗어나서 북쪽의 꽤 넓은 숲에 다다를 수 있었다.

“민둥산만 있다더니, 되게 울창하잖아?”

“이제 나무를 베어 가는 사람이 없으니까. 예전에는 땔감으로 쓰려고 엄청나게 베어 갔다더군.”

마기로 인해 모양이 이상해지기는 했어도 숲에는 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공략대원이 한 말처럼 벌목을 안 하니까 이만큼 숲이 커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인간의 발길이 끊긴 작은 섬에는 온갖 희귀종 생물들이 살고 있다지 않은가.

‘어찌 보면 인간이나 미궁이나 별 차이가 없을 수도 있겠군. 자연을 파괴한다는 점에서는 인간이 더하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숲으로 진입하는데, 문득 블라드 유진의 오른편에서 이상한 기척이 발생했다.

부스럭!

이제껏 아무런 징조도 없다가 갑자기 튀어나온 움직임이라, 공략대원들은 누구도 반응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무덤덤한 얼굴로 소수혈인을 뽑아 들더니, 가볍게 위로 올려 쳤다.

스이잉―! 푸화악!

번득이는 붉은 섬광이 공간을 쪼개 버리자, 암청색 액체가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이윽고 번들거리는 무언가가 머리부터 가슴까지 양단된 상태로 바닥에 처박혔다.

외피를 자세히 보니, 주변과 색상을 비슷하게 바꾸는 능력이 있는 듯했다.

“변검귀(變臉鬼)로군요. 이런 몬스터가 숨어 있었다니……. 혹시 이놈을 잘못 본 거 아닙니까?”

사체를 살핀 도형욱이 그렇게 중얼거리자, 정찰자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확실히 사람이었습니다. 이렇게 덩치가 크지 않았어요. 김윤모 씨도 함께 봤습니다. 아마 여기 어딘가에 숨어 있을 거예요.”

변검귀는 카멜레온처럼 변색 능력이 있는 몬스터였다.

이렇게 주변 환경과 동화되어 있으면 발견하는 게 쉽지 않아, 느닷없이 공격당할 가능성이 컸다.

그래서 변검귀가 서식하는 지역은 무조건 피해야 하는 곳이었다.

아무리 실력이 뛰어난 헌터라도 기습 한 방에 목숨을 잃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삐이익―! 삐빅!

정찰자가 작은 호각을 꺼내 일정한 리듬을 타며 불자, 저 먼 수풀 사이에서 웬 나무 인간이 튀어나왔다.

길리 슈트를 입고 있다 보니, 몬스터로 착각할 수도 있을 법한 비주얼이었다.

그자가 이쪽으로 걸어오는 동안, 공략대는 주변 경계에 나섰다.

혹시나 또 다른 몬스터가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문득 길리 슈트를 입은 정찰자의 측면에서 이상한 기척이 느껴지는 게 아닌가.

부스럭! 슈화악!

“허억!”

정찰자는 깜짝 놀라며 옆으로 몸을 날렸다.

하지만 위장을 풀고 나온 변검귀의 기습을 완벽하게 피하지는 못할 것 같았다.

워낙 예측할 수 없는 곳에서 튀어나온 공격이라, 대응이 한 박자 늦고 말았으니까.

쉬이익! 카앙!

하지만 정찰자는 변검귀의 날카로운 갈고리에 당하지 않았다.

어디선가 날아든 시퍼런 쇠붙이가 녀석의 발톱에 작렬한 결과였다.

“허억! 헉!”

바닥을 구른 정찰자는 곧장 품속에서 기관 단총을 꺼내 갈겼다.

지금은 스킬을 발동하는 것보다 방아쇠를 당기는 게 훨씬 빠르고 효과적이었다.

게다가 동료들이 근처에 있으니, 소리를 크게 내도 별 상관이 없었다.

드르르륵!

하지만 변검귀는 고작 권총탄에 쓰러질 정도로 호락호락한 몬스터가 아니었다.

그놈은 잠깐 주춤거리다가 재차 정찰자에게 달려들었다.

“크웨에엑!”

쉬익! 콰직―! 콰과광!

하나, 동료가 당하는 모습을 본 공략대원들도 가만히 있지만은 않았다.

곧바로 강력한 원거리 공격이 날아들어 변검귀의 외피를 찢어발기고 불태워 버렸다.

이윽고 놈은 넝마가 되어 바닥에 대가리를 처박고 말았다.

“휴우! 괜찮습니까?”

도형욱을 비롯한 공략대원들은 곧장 기습당한 정찰자에게 다가가 안위를 물었다.

그러나 블라드 유진은 변검귀와 정찰자 쪽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는 숲속 어디선가에서 날아든 시퍼런 날붙이에 집중하는 중이었다.

변검귀를 후려갈겼던 푸른 빛은 어느새 수풀 속으로 사라진 뒤였다.

‘저건 공략대원이 날린 게 아닌데. 확실히 저 안에 뭔가가 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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