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교황은 감격한 얼굴로 한 줄기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차원문이 열린 건 아주 잠깐뿐이었는데, 이런 거물이 나타나다니.
품계가 낮은 천사가 나타나도 감지덕지라 할 법한 상황에서, 대천사의 등장은 기막힌 행운이었다.
―희생이 있었군.
가브리엘은 주변을 둘러보며 무뚝뚝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원의 가장자리에 서 있던 천여 명의 사람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절명한 상태였다.
차원문이 열리는 순간, 울혈을 토하며 우르르 나자빠진 것이다.
사기꾼의 옥타헤드론을 발동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사람의 생명력이 필요했으니까.
안드레아가 황급히 자리를 피한 건, 이런 현상이 벌어진다는 사실을 미리 알았기 때문이었다.
교황은 가브리엘을 향해서 머리를 조아리며 빠르게 답했다.
“마계의 발호로 지구는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더 이상은 버틸 수 없다고 판단하여 부득이하게 편법을 사용했습니다. 제가 지옥에 떨어지더라도 벌을 달게 받겠나이다.”
대의를 위해서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다는 구구절절한 이야기는 죄다 공허한 변명일 뿐이었다.
예언과 계시의 대천사라면, 안드레아의 궤변에 숨은 욕망과 악의를 단번에 파악할 수 있으리라.
당장 불호령이 떨어질 거라 생각한 교황은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푹 숙였다.
하지만 가브리엘의 입에서 튀어나온 건 예상과 전혀 다른 내용이었다.
―잘했다.
“예?”
―희생은 숭고한 것. 저들은 모두 천주의 세상에서 구원받게 된다.
“아아……!”
천 명에 달하는 사람이 한순간에 시체가 되었으나 가브리엘은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자애로운 영웅으로 묘사되는 대천사가 할 법한 행동이 아니었지만, 교황은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어찌 천상계의 존재가 하는 말을 의심할 수 있으랴.
안드레아는 희생된 천 명의 영혼이 진정으로 천국에 입성했다고 믿었다.
“대천사 가브리엘이시여. 아뢸 것이 있나이다.”
―말하라.
“현재 지구에는 미궁을 퍼트리는 마족 말고도 사악한 종자가 돌아다니는…….”
―잠깐.
가브리엘은 교황의 말을 끊으며 오른손을 슬쩍 들었다.
귀를 쫑긋하는 거로 보아, 뭔가 이상 징후를 느낀 모양이었다.
이윽고 대천사는 무지개색 날개를 펼치더니 가볍게 날아올랐다.
거세게 홰를 치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가브리엘의 육신은 자유롭게 허공을 유영했다.
머리 위에 뜬 헤일로(Halo, 광륜)가 공동을 밝히자, 구석진 자리에 웅크린 인형이 드러났다.
“이런! Mother F…….”
자신이 들킬 줄은 몰랐던 모양인지, 의문의 존재는 잽싸게 몸을 날려 동굴을 빠져나가려 했다.
하지만 가브리엘의 움직임은 그자의 생각보다 훨씬 빨랐다.
스핏!
미약한 파공성이 들려옴과 동시에 탈출로가 막혀 버렸다.
마치 순간 이동하듯 나타난 대천사가 감정 없는 눈빛으로 남자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쥐새끼가 있었구나.
“어, 어찌 이런 일이! 분명 추적이 없음을 확인했거늘!”
뒤늦게 따라온 안드레아가 노한 얼굴로 염탐꾼을 노려보았다.
얼굴이 다 드러나 있음에도 교황은 그자의 정체를 알아내지 못했다.
이제껏 한 번도 보지 못한 자였기 때문이었다.
“죄송합니다. 이자는 빠르게 처리를…….”
―되었다. 재미있는 놈이로군. 이름이……. 아마르 코너.
아무것도 묻지 않았으나, 가브리엘은 염탐꾼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대천사의 권능으로 상대의 내심을 꿰뚫어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도망칠 생각만 하고 있던 DK가 눈을 크게 떴다.
이제 막 차원문을 통과한 상대에게서 대뜸 자신의 본명이 튀어나올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와, 이거 더럽게 꼬인 듯한데.”
딱!
DK는 손가락을 튕기며 잽싸게 옆으로 몸을 날렸다.
두 대상에게 벨티아의 현혹을 걸면서 곧바로 도주하려는 것이었다.
상대가 대천사니만큼 스킬이 통하지 않을 수도 있어서 한 시도였다.
아니나 다를까, 가브리엘은 현혹 능력을 가볍게 무시해 버리며 엄청난 속도로 접근해 왔다.
스핏! 덥석!
그러고는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마치 공간을 넘나드는 것처럼 불쑥 튀어나와 DK의 목을 단번에 거머쥐었다.
“커헉!”
스릉! 취리릿!
대천사의 손아귀에 붙잡힌 DK는 지팡이 검을 뽑아 들며 반격하려 했다.
하지만 무기를 제대로 휘두르기도 전에 녀석의 몸은 축 늘어져 버렸다.
가브리엘의 광륜이 무시무시한 빛과 함께 초월적인 신성력을 뿜어냈기 때문이었다.
너무도 강력한 힘에 짓눌린 DK는 눈을 까뒤집으며 기절하고 말았다.
대천사는 그런 녀석을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마치 기계처럼 감정 없는 눈을 빛냈다.
―꽤 쓸모가 있겠군.
* * *
“이 모든 게 저의 불찰입니다. 이렇게 엎드려 빌 테니, 용서해 주십시오. 저와 현성 그룹은 선제공격을 가한 책임을 지고, 복지부동하겠습니다.”
현성 건설 부사장 신헌영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거의 절을 하듯 고개 숙인 상태였다.
당연히 사죄의 대상은 블라드 유진이었다.
신 부사장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의 집에 찾아와 공식적인 사과를 전했다.
현성 건설 임원들을 비롯하여 꽤 많은 사람이 이 자리에 함께했지만, 외부의 시선은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오로지 사과와 배상에만 집중하겠다는 의지의 발로였다.
조낙범 변호사조차도 이런 상황은 예상치 못했는지, 사뭇 당황한 듯했다.
현성 그룹의 가장 유력한 후계자가 자존심까지 다 버리고 사죄하러 올 줄 누가 알았겠는가.
얼마 전에 찾아온 구호국 회장보다는 비굴하지 않았으나, 그래도 상당히 의외였다.
“음?”
그런데 사과를 받는 중인 블라드 유진은 신헌영을 쳐다보지 않았다.
그는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허공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마치 뭔가가 심기를 건드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런 이상한 분위기 때문에, 고개를 팍 숙였던 신 부사장은 좀처럼 일어나지 못했다.
블라드 유진의 답변이 있을 때까지, 엎드린 채로 눈알만 뒤룩뒤룩 굴렸다.
이미 준비해 온 말이 다 끝난 상태라, 저택 거실에는 기묘한 정적만이 흘렀다.
보다 못한 조낙범이 슬쩍 그의 곁으로 다가와 운을 떼 보았다.
“슬슬 배상 이야기를 하시는 게 어떠신지요.”
“쯧! 아깝게 되었군.”
“예?”
난데없이 튀어나온 뜬금없는 말에 조 변호사가 되물었다.
신헌영 또한 대체 뭐가 아깝다는 말인지, 궁금한 표정으로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됐다. 어디까지 이야기했지?”
“용서와 배상 차례입니다.”
유진은 강단 있던 신 부사장의 첫인상을 떠올리며 작게 주억거렸다.
재벌 후계자쯤 되는 인물이 이런 모습을 보이기란 쉽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진심 어린 사과만 받고 끝낼 생각은 전혀 없었다.
“돈 대신 아이템이 좋겠군. 내 마음에 드는 거로 가져와라. 그럼 한 번 생각은 해 보지.”
“가장 좋은 거로 구해 오겠습니다!”
“그래. 가 봐.”
“예!”
그의 허락이 떨어지자, 신헌영은 무슨 국왕을 알현하는 것처럼 뒷걸음질로 물러났다.
부사장이 그러고 있으니, 머리를 푹 숙이고 있던 임원들 또한 눈치를 보며 뒤로 걸음을 옮겼다.
아무래도 그렇게 해야 할 것만 같은 분위기 때문이었다.
현성 건설 임원진이 큰 보상을 약속하고 물러났지만, 블라드 유진의 표정은 풀어질 줄 몰랐다.
그의 기분이 좋지 않아 보이자, 조낙범이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그건 왜 묻는 거지?”
“평소와 조금 달라 보이셔서 말입니다.”
“특별한 일이 있긴 했지. 하지만 신경 쓸 것 없다.”
“그럼 저도 이만 가 보겠습니다. 성호 그룹 측하고 만나 볼 일이 있어서요.”
“2차 협상인가?”
“예, 그렇습니다. 확실하게 뜯어내고 오죠.”
“그래. 수고해.”
조 변호사까지 자리를 비우고 나자, 유진은 그제야 혼자가 되었다.
주방으로 걸어간 그는 에스프레소 머신에서 커피를 한 잔 추출했다.
그러고는 창밖을 바라보며 쓰디쓴 검은 물로 입술을 적셨다.
오늘따라 커피의 텁텁한 맛이 더욱 강한 것 같았다.
블라드 유진은 머그잔을 내리며 눈앞에 떠오른 글귀를 쭉 읽었다.
[하수인 ‘아마르 코너’와의 연결이 끊어졌습니다.]
[현재 하수인 슬롯 20/30]
조낙범을 받아들이면서 그의 하수인은 총 21명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DK가 떨어져 나감으로써 다시 20명으로 줄어든 상태였다.
이는 전혀 예정에 없던 결과인 탓에 유진은 조금 당혹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S급 비인가 헌터인 데다가, 극강의 현혹 능력까지 갖춘 DK가 당한다는 건 상상하기 어려웠으니까.
그의 머릿속은 복잡하기 그지없었다.
‘유능한 녀석이었는데, 아쉽게 되었군. 그나저나 대체 뭐가 DK의 혈성쇄혼술을 지워 버린 거지?’
이제껏 하수인과의 연결이 끊긴 적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교황청으로부터 도망치면서 살 때, 종종 그런 경우가 있었으니까.
혈성쇄혼술이 해제되는 상황은 대략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었다.
첫 번째는 당연히 하수인이 죽었을 때.
그리고 두 번째는 피의 권능과 대척점에 서 있는 강력한 에너지가 연결 고리를 끊었을 경우였다.
둘 다 가능성이 있었지만, 유진은 후자일 거라고 판단했다.
위기의 순간이 닥친 모양인지, DK가 뭔가 의지를 전달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쌍방향 소통이 자연스럽도록 교육을 해 둘 걸 그랬군.’
그는 하수인에게 직접 의념을 전달할 수 있지만, 반대의 경우에는 그리 원활하지 않았다.
하수인이 주인에게 텔레파시를 보내는 건 따로 고도의 훈련이 필요했다.
하지만 휴대 전화라는 문명의 이기가 있었기에, 굳이 그럴 이유가 없었다.
시간을 들여 훈련을 거치는 것보다 전화 한 통이면 쉽게 의사를 전달할 수 있었으니까.
“이게 나비 효과를 일으킬 줄은 몰랐는데.”
블라드 유진은 검은 화면의 휴대 전화를 내려다보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 그는 커피를 홀짝이며 허공을 가만히 응시했다.
‘DK는 교황을 따라갔다가 당했다. 아마 그 원흉은 교황청에 있을 테지. 직접 가 보기에는 귀찮은데.’
녀석을 구하겠다면서 바티칸 시국까지 갈 마음은 전혀 없었다.
유진이 고작 하수인 하나 때문에 그럴 위인도 아니고 말이다.
하지만 혈성쇄혼술을 날려 버린 힘의 정체는 파악해 두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교황이 그랬을 리는 없고……. 설마 성검 그놈인가?”
현실적으로 교황청에서 DK를 거꾸러뜨릴 수 있는 존재는 바티칸의 성검 요한뿐이었다.
하지만 그자는 유럽의 전선을 떠돌며 대가 없이 도움을 주는 존재.
교황과 성기사단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 완벽한 중립이었다.
그런 자가 안드레아 교황 주변을 감시하고 있을 리는 거의 없었다.
물론 우연히 요한에게 염탐하는 걸 걸렸을 수도 있었다.
아무래도 그럴 확률은 매우 낮았지만.
게다가 DK가 바티칸의 성검에게 질 것 같지도 않았다.
어쨌거나 현지에 가 보지 않는 이상, 한국에서 바티칸 시국의 상황을 알아보는 건 상당히 제한적이었다.
‘이럴 때 써먹을 만한 패가 하나 있긴 하지.’
남은 커피를 한꺼번에 마시고 머그잔을 내려놓은 그는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뚜르르르! 달칵!
“당장 튀어 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