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뭐, 뭐? 궤멸? 거기 인원이 얼마나 투입되었는데,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야?”
전화로 보고를 받은 현성 건설 부사장 신헌영은 평소답지 않게 소리를 빽 질렀다.
그도 그럴 것이 은밀하게 지원했던 그룹의 원거리 딜러들이 몰살에 가까운 타격을 입었기 때문이었다.
표면적으로는 구호국만 움직인 것처럼 보였으나, 사실은 신헌영 또한 이 일의 주모자나 다름없었다.
성호 그룹이 블라드 유진의 암살에 나서길 바라면서 자금과 병력을 팍팍 밀어주지 않았던가.
“그래서 살아남은 건 강효일 대장뿐이다?”
―그렇습니다. 경상은 아닌 듯합니다. 혼수상태로 병원에 왔는데, 아직 수술 중이라…….
“일단 얼마나 다쳤는지는 모르지만, 그룹 차원에서 힐러를 보내도록 하지.”
―예.
“자네는 강효일한테 딱 붙어 있어. 혹시나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하고.”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신헌영은 손톱을 물어뜯으며 사무실을 초조하게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문제는 살아남은 강효일의 안위 따위가 아니었다.
그깟 A급 헌터쯤이야 돈만 있다면 얼마든지 구할 수 있었다.
문제는 앞으로 현성 건설과 그룹이 받을 피해였다.
“그놈들이 양아치긴 하지만, 실력은 확실한데 말이야.”
구호국 회장은 휘하의 전력을 대부분 비인가 헌터로 채워 넣었다.
어차피 그룹의 고용 헌터가 몬스터를 사냥할 일은 별로 없었으니 말이다.
PVP에 특화된 비인가 헌터들이라면, 제아무리 세계 최고의 헌터라도 거꾸러뜨릴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성호 그룹이 궤멸당하고 말았다.
그러니 유진의 실력은 다시 한번 백일하에 증명된 거나 다름없었다.
소문만 무성할 뿐인 실력자가 아니라, 재벌도 무너뜨릴 만큼 압도적인 힘을 지닌 존재로 말이다.
“이걸 어떻게 수습하지?”
골똘히 생각에 빠져 있던 신헌영은 입술을 꽉 깨문 채, 휴대 전화를 꺼내 들었다.
현성 건설 부사장이자 그룹의 후계자로서 이제 할 수 있는 건 인맥을 활용하는 것뿐이었다.
암만 독보적인 실력을 지닌 헌터라도 권력 앞에서는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리라.
블라드 유진의 보복을 막으려면, 좀 치사해도 이 방법밖에는 없는 것 같았다.
뚜르르르!
생각을 마친 신헌영은 어디론가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여보세요?
“오랜만입니다. 유 간사님.”
―하하! 이거 부사장님이 먼저 연락을 다 주시고, 정말 영광입니다.
“전화 한번 하는 게 뭐 대수라고요.”
신헌영 부사장이 연락한 사람은 헌터 협회의 간사(幹事) 유재섭이었다.
일반적으로 고용 헌터를 보유한 기업은 협회 직원들과 긴밀한 소통을 하고 있었다.
몰래 각성자들의 정보를 받는 거야 업계의 오랜 관행이었다.
그러다 보니, 물밑에서 검은돈이 여러 번 오가기도 했다.
유재섭 간사 또한 그런 식으로 현성 그룹의 뇌물을 받아먹은 인사 중 하나였다.
지금껏 먹이를 열심히 찔러 준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이럴 때 힘을 한 번 발휘해 보려고, 이제껏 세탁기에 여러 바퀴 돌린 돈을 갖다 바친 거였다.
조금 선을 넘는 부탁을 해도 기분은 나쁠지언정, 한 번쯤은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실컷 자초지종을 설명하던 신헌영이 들은 건, 상당히 의외의 대답이었다.
―쓰읍……. 그건 좀 곤란하겠는데요?
다름 아닌 거절.
그만큼 돈을 많이 먹였는데, 어찌 이런 답변이 나올 수가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지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곤란하다니요?”
―아무래도 그렇지요. 도심에서 폭탄까지 터트리면서 유혈 사태를 일으키는데, 그걸 무마하기는 어렵지 않겠습니까?
“러시아하고 미국이 그럴 때는 언론까지 동원해서 잘만 축소하시더니, 갑자기 왜 이러십니까?”
―그거야. 아무래도 강대국이고 자기들끼리 치고받은 사안이다 보니…….
“그때와 지금이 뭐가 다르냐고요!”
신헌영이 벌컥 역정을 냈지만, 휴대 전화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여전히 부정적이었다.
―아무래도 다른 방법을 써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경복궁 근처에서 폭발 테러 사건이 있었다면, 여론도 상당히 안 좋을 겁니다. 그럼 끊겠습니다.
“아니, 이보세요. 제가 보도를 막으라고 했습니까? 블라드 유진 그자를 저지…….”
뚝!
헌터 협회의 유재섭 간사는 신헌영의 말이 끝나지 않았음에도 전화를 끊어 버렸다.
뇌물을 먹은 공무원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할 만큼 매몰찬 행태였다.
“허!”
현성 건설 부사장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휴대 전화 화면을 쳐다보았다.
협회의 꽤 굵직한 연줄이 날아가는 순간이어서 그런지, 어느새 신헌영의 눈에는 살기가 떠올라 있었다.
“돈을 그만큼이나 받아 처먹고도 이따위로 행동해? 네놈도 그 자리를 계속 보전하지는 못할 거다.”
헌터 협회와의 부정한 관계가 드러나면 현성 그룹으로서도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일개 공공기관의 임원과 대기업이 받는 피해의 규모는 천지 차이일 터였다.
이쪽은 쇼 몇 번 해 주고 여기저기 물 좀 치면 굴레를 벗어나는 건 금방이었다.
반면에 저쪽은 인생 자체가 날아가게 될 것이다.
게다가 유재섭 간사를 실각시킬 수단이야 얼마든지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이럴 때가 아니지.”
복수심을 불태우던 신헌영은 이곳저곳에 전화를 돌리기 시작했다.
가용 인맥을 모두 동원하여 사태를 해결해 보려는 요량이었다.
하지만 헌터 협회는 물론이고, 장관이나 차관급 인사와 접촉해 봐도 곤란하다는 답변만 되돌아올 뿐이었다.
다들 처음에는 우호적으로 전화를 받았다가, 블라드 유진이라는 이름만 튀어나오면 학을 뗐다.
그러자 슬슬 분노에 가려져 있던 불안이라는 녀석이 슬그머니 고개를 쳐들었다.
그런데 문득 그런 신헌영의 휴대 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종일 누군가에게 걸기만 했지, 전화를 받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화면에 찍힌 이름을 본 신 부사장의 미간이 미묘하게 찌푸려졌다.
“배현민?”
대학 동기라서 번호는 있지만, 한 번도 연락해 본 적 없는 녀석.
신헌영에게 친구라고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기 때문에, 그나마 연락처에 남아 있는 존재였다.
아마 배현민이 헌터 협회 직원이라서 번호를 지우지 않은 모양이었다.
말단이긴 하나, 언젠가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신 부사장은 ‘이런 놈이 있었지.’ 하는 표정으로 화면을 바라보다가 녹색 버튼을 옆으로 그었다.
지푸라기라도 잡아 보자는 심정으로 말이다.
“여보세요?”
―어……. 헌영이냐?
“그래.”
거의 2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흔한 명절 안부 인사도 안 했을 만큼 통화는 어색했다.
하지만 잠깐의 정적 이후 배현민이 한 말은 서먹한 분위기를 순식간에 박살 낼 정도로 파급력이 컸다.
―너 요즘 그 사람에게 대항하기 위해서 세력을 모으고 있단 이야기는 들었다.
“……그 사람?”
―블라드 유진 말이야.
예상치 못한 이름이 튀어나오자 소스라치게 놀랐지만, 신헌영은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말을 이었다.
“별거 아니야. 조금 틀어졌을 뿐이지.”
―그냥 산들바람이 아니라, 삭풍이던데. 저쪽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뭐가 어떻길래?”
―성호 그룹 다음 목표는 현성 건설이라는 이야기가 공공연히 나돌고 있어. 지금 구호국 회장이 어떻게 박살 나고 있는지는 잘 알지?
“…….”
실제로 성호 그룹은 공중분해 되는 중이었다.
휘하의 고용 헌터들이 몰살함은 물론이고, 보유한 부동산과 사업체까지 가루가 되어 갔다.
본사 사옥은 구호국 스스로 터트렸지만, 그 이후로는 블라드 유진이 직접 깨부숴 준 것이다.
주춧돌까지 다 날아갈 지경이라, 성호 그룹은 무조건 항복만을 부르짖고 있었다.
그렇게 되는 데는 고작 하루밖에 걸리지 않았다.
―듣고 있냐?
잠시 아무런 말도 없자, 배현민의 걱정스러운 음성이 들려왔다.
신헌영은 목소리의 떨림을 감추려 괜히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어.”
―될 수 있으면 너도 구호국 회장처럼 행동해.
“그놈이 뭘 했는데?”
―숨겨 둔 비자금까지 털릴 위기에 처하자마자, 블라드 유진한테 달려가서 싹싹 빌었다고 하더라. 그래서 목숨은 살려 줬대.
“성호 그룹은?”
―파산 절차 밟겠지. 너덜너덜한 휴지 조각을 누가 사 가겠어?
“알려 줘서 고맙군.”
―그래. 조심해라. 그 사람, S급을 넘어섰다는 소문까지 돌고 있어.
“……끊는다.”
뚝!
신 부사장은 서둘러 통화를 끊었다.
그러지 않으면 의연한 척하는 자신의 연기가 들킬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휴대 전화를 내려놓자, 어느새 양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지금은 고작 건설사 부사장 자리에 있지만, 신헌영은 현성 건설의 내정된 후계자였다.
독보적인 실적으로 아버지와 주주들의 신임을 얻었기에 다음 회장 자리는 떼어 놓은 당상이었다.
하지만 현성 건설이 풍비박산 나고도 그 자리를 유지할 수 있을까?
그러다 화마가 건설사뿐만 아니라, 그룹의 계열사 전체로 번지기라도 한다면?
아마도 모든 책임을 지고 물러나야 할 것이다.
그럼 호시탐탐 신 부사장의 자리를 노리는 형제들이 물 만난 고기처럼 드잡이질할 터였다.
“빌어먹을.”
쿵!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친 신헌영은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띡!
“차 대기시켜요.”
* * *
바티칸 시국, 교황청 지하로부터 이어진 깊은 공동.
미로처럼 구불구불한 동굴을 따라 이동한 일단의 무리가 원을 그리며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교황처럼 새하얀 제의를 입고 머리에 주케토를 쓰고 있었다.
거의 천 명에 달하는 수효의 사람들은 손에 손을 잡고 기도를 이어 갔다.
사박! 사박!
경건한 목소리가 공동을 가득 채우는 동안, 웬 노인이 원의 중심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자의 정체는 교황 안드레아였다.
철컥!
가방에서 갈색 무언가를 꺼낸 안드레아는 중앙의 동그란 제단 위에 조심스럽게 올려놓았다.
그것은 미궁 사태가 벌어지면서 진짜 신성력을 머금게 된 토리노의 수의였다.
성물의 옆에는 삼각형 여덟 개로 만들어진 정팔면체가 놓여 있었다.
안드레아는 신비한 빛을 뿜어내고 있는 팔면체를 슬쩍 들어 올렸다.
그러자 기묘한 진동과 함께 토리노의 수의가 빛나기 시작했다.
비유우웅!
“되, 된다!”
안드레아의 눈에는 순간적으로 희열이 떠올랐다.
성배가 있어야만 발동 가능한 성물의 세트 효과, 차원문 개방이 시작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게 다 성자들을 온갖 미궁에 투입하여 얻은 ‘사기꾼의 옥타헤드론’ 덕분이었다.
이 정팔면체 주사위가 있으면, 세트 아이템이 하나만 있어도 전체 효과를 발동시키는 게 가능했다.
교황은 토리노의 수의와 사기꾼의 옥타헤드론으로 천상계와 통하는 차원문을 개방하려는 것이었다.
“이럴 때가 아니지.”
안드레아는 빛나는 주사위를 제단에 내려놓고 황급히 원 밖으로 이동했다.
그렇게 구석으로 가서 잠시 기다리자, 공동의 중앙에서 신성한 빛이 터져 나오는 게 아닌가.
번―쩍! 촤하아악!
신성력으로 이루어진 충격파가 사방을 휩쓸자, 교황은 순간적으로 바닥에 나자빠질 뻔했다.
그만큼 천상계와 연결된 파급 효과는 어마어마한 수준이었다.
이윽고 공동을 가득 채운 빛이 점차 줄어들자, 일렁이는 차원문의 앞에 웬 인형이 모습을 드러냈다.
츠츠츠츠츠!
성스럽게 빛나는 제의를 걸친 금발의 미남자가 차원문을 빠져나온 것이다.
그자는 지상으로 천천히 떨어져 바닥에 맨발을 디뎠다.
그와 동시에 백광이 동심원을 그리며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스팟―!
아주 잠깐 유지되던 차원문이 소멸하며 벌어진 현상이었다.
천상계와의 지속 연결은 실패했지만, 그래도 소정의 성과는 있었다.
안드레아는 감격한 표정으로 한달음에 달려가 부복했다.
“반갑습니다. 천상계의 존재이시여. 저는 당대의 교황 안드레아라고 합니다. 어떤 분인지 성함을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매우 조심스럽고 극진한 질문이었지만, 미남자의 표정은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그자는 품에 안고 있던 백합 한 송이를 교황의 눈앞에 떨어뜨려 주며 말했다.
―나는 천주를 모시는 시종이다.
“가, 가브리엘 대천사……!”
안드레아는 첫 마디를 듣자마자 상대가 누군지 알아차렸다.
스스로 천주의 시종이라 소개하고 상징물이 백합인 존재는 가브리엘밖에 없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