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얄 블러드-153화 (154/226)

3화

“이건 좀 신선한 느낌이로군.”

어마어마한 폭발과 함께 호열 빌딩이 폭삭 주저앉았지만, 블라드 유진은 아무런 부상도 없었다.

그저 돌가루와 먼지만 조금 뒤집어썼을 뿐.

고작 그 정도 폭발력으로 강체 특성이 있는 뱀파이어 로드를 해하는 건 불가능했다.

게다가 무너지는 철근 콘크리트 구조물쯤이야 그의 힘으로 가볍게 밀어낼 수 있는 수준이었다.

스각! 쿠웅!

눈앞에 걸리적거리는 것들을 소수혈인으로 깡그리 베어 낸 유진은 건물 잔해에서 유유히 빠져나왔다.

무너진 빌딩 앞에는 성호 그룹의 고용 헌터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블라드 유진을 보자마자 흉흉한 기세를 뿜어내며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그때 그 합격진이로군.’

놈들의 정체를 깨달은 그는 핏빛 칼날을 여유롭게 빙글빙글 돌렸다.

“목표가 나왔다. 개진(開陳)!”

드드드드드!

대장으로 보이는 자가 크게 외치자, 기묘한 진동과 함께 그의 전신에 강한 압력이 가해지기 시작했다.

물론 개성 인근의 대성체 미궁에서 느꼈던 것보다는 위력이 훨씬 약한 것 같았다.

아무래도 그때만큼 정예가 아니라서 그런 모양이었다.

‘건물을 터트리는 건 마음에 들었지만, 이건 영 진부하군.’

성호 그룹 고용 헌터들의 합격진은 강자를 굴복시키는 데 특화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상식 범위에 있는 수준이어야 통하는 거지, 초월적인 인물에게는 제 위력을 발휘하기가 어려웠다.

당장 유진만 하더라도 합격진을 고작 한 번밖에 겪지 않았음에도 나름의 파훼법을 터득하지 않았던가.

“준비한 것이 이게 다라면, 조금 실망인데.”

후우웅! 츠리릿!

그가 소수혈인을 가볍게 휘두르자, 시뻘건 운무가 일어나며 무형의 기운을 밀어냈다.

허공에 흩어진 피의 권능이 합격진의 힘을 찢어발기면서, 일시적으로 공백을 만든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블라드 유진의 앞에 일종의 방어막이 형성된 듯한 느낌이었다.

이건 그냥 압도적인 힘으로 받아쳐서 압력을 해소해 버린 것에 불과했지만.

어쨌거나 합격진이 발생시키는 힘의 흐름이 뒤틀린 것만은 확실했다.

“이, 이런! 뚫린다!”

대략 100명에 달하던 예비 타격대를 통솔하던 대장은 이상 징후를 느끼자마자 크게 소리 질렀다.

하지만 그자의 음성은 그저 허공에 의미 없이 울려 퍼지는 한 종류의 메아리에 지나지 않았다.

어느새 십여 미터 길이로 늘어난 핏빛 칼날이 예비대를 휩쓸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쿠콰콰콰콰! 콰직! 스가각!

“크아악!”

“으악! 사, 살려…….”

사람의 몸뚱이가 쪼개지는 소리와 함께 날카로운 비명이 이곳저곳에서 터져 나왔다.

그런 상황에서 명령을 내린다 한들 들어먹을 대원이 어디 있겠는가.

“이 새끼들아! 정신 차리고 막으란 말이다!”

그렇게 외치는 순간, 소수혈인을 휘두르던 유진과 대장의 시선이 딱 마주쳤다.

예비대 대장의 발악이 잠깐 그의 흥미를 잡아끈 것이다.

“그나마 강단은 있는 놈인가. 이 상황에서도 합격진을 유지하려는 걸 보면 말이야.”

입꼬리를 말아 올린 블라드 유진은 손목의 스냅을 이용하여 붉은 칼날을 통통 튕겨 올렸다.

소수혈인이 움찔거리며 기괴한 움직임을 보일 때마다, 놀랍게도 아슬아슬하게 이어지던 합격진이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그가 허공에 흐르던 힘의 맥을 끊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마치 음식 재료를 손질하는 것처럼 말이다.

“아…….”

합격진이 와해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예비대 대장은 얼빠진 표정으로 가만히 서 있었다.

그러더니 영혼 없는 눈으로 허공을 올려다보며 뭐라고 조용히 중얼거렸다.

“이, 이 정도일 줄이야. 본대가 궤멸당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대로 내뺐어야 했나?”

성호 그룹 고용 헌터의 최고참인 이규영이 죽었다는 소식은 솔직히 반갑기 그지없었다.

그렇다면 다음번 타격대 대장으로는 자신이 들어갈 테니까.

하지만 바꿔 말하면, 이규영과 본대가 궤멸당할 만큼 이번 임무가 위험하다는 사실을 뜻했다.

그걸 뒤늦게 깨달은 예비대 대장은 회한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후회는 항상 뒤늦게 하는 법이지.”

블라드 유진은 그자의 얼굴을 아주 잠깐 응시하더니, 이내 소수혈인을 횡으로 그어 버렸다.

푸확―!

그러자 예비대 대장의 머리가 댕강 잘려서 빙글빙글 돌다 바닥에 떨어졌다.

철퍽!

* * *

“이, 이거 어떡합니까? 그러게 바로 지원했어야죠!”

구호국이 돌아보며 질책했지만, 파견대 대장 강효일이 해 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솔직히 성호 그룹에서 조금이라도 버텨 줘야 원거리 딜러나 저격수로 지원을 해 줄 거 아닌가.

저렇듯 손 쓸 틈도 없이 쓸려 나가면, 되레 현성 그룹 측에서 불만을 제기해야 할 판이었다.

하지만 워낙 말도 안 되는 장면을 본 탓인지, 강효일은 반박조차 하지 못하고 상황을 멍하니 지켜보기만 했다.

구호국 회장 또한 남 탓을 해 봐야 소용없다는 걸 깨달은 듯, 이후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제는 꼬리를 자르고 도망칠 시기였으니까.

“일단 이렇게 하시죠. 이 일에 현성은 아예 개입하지 않은 겁니다. 대신 그룹 차원에서 재기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 드리죠.”

강효일의 제안에 구호국의 미간에 세 개의 긴 골이 파였다.

누가 봐도 면피성 발언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지금 그쪽만 쏙 빠지겠다는 겁니까? 우리가 터트리면, 현성 그룹도 무사하지 못할 텐데요.”

“아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우린 어차피 공범인데요. 그저 피해를 최소화하자는 거지요. 물밑에서 피해 복구 자금을 대 드리겠습니다. 어떻습니까?”

“고작 파견대 대장이 할 수 있는 약속은 아닌 듯한데요.”

“저희는 일이 잘못되었을 때의 대응책을 항상 준비해 둡니다. 이것도 그런 매뉴얼의 일환이지요. 당연히 제게도 현장 책임자로서 권한이 있습니다.”

“음…….”

구호국 회장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만약 상대가 자신과 비슷한 비인가 헌터 조직이나 조폭 출신이었다면, 두말할 것도 없이 거절했을 터였다.

하지만 현성 그룹은 국내 굴지의 건설사와 유통, 조선, 자동차, 반도체 등의 알짜배기 자회사를 보유한 재벌.

성호 그룹의 손해를 보전해 줄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확실히 문서로 남길 수 있다면, 동의하겠습니다. 대신 피해 복구 비용은 우리가 정하죠.”

“너무 과도한 요구는 수용할 수 없습니다. 아시지요?”

“만약 실제로 그만큼 피해가 발생했다면요? 그래도 과도하다고 하실 겁니까?”

“6 대 4로 하시죠. 이 일을 시작한 건 성호 그룹이니, 만약 책임 소재를 따진다면 그쪽이 더 클 겁니다.”

“당연히 우리가 4겠지요? 그 정도는 되어야 그냥 보내 드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합시다.”

잠깐 머뭇거린 강효일의 대답이 떨어지자, 구호국은 휴대 전화 화면을 보여 주더니 녹음을 끊었다.

제안 이야기가 나올 때부터 미리 녹음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나중에 딴말하기 없습니다.”

“애초에 그런 생각은 하지도 않았습니다.”

“당신이야 그럴지 몰라도 윗사람들은 아닐 수 있잖아요?”

“…….”

구호국 회장의 능글맞은 말에 강효일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솔직히 현성에서 모른 척 입을 싹 닦아 버리면, 성호 그룹만 독박을 쓸 수도 있었다.

블라드 유진이라는 자가 이 일에 연루된 모든 조직에 보복할지 안 할지 어떻게 안단 말인가.

이해는 하지만 사전 동의 없이 녹음한 건 썩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다.

물론 구호국은 강효일의 속이 어떻든 간에 도망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일단은 최대한 흔적을 지우면서 오리발을 내밀어 볼 작정이었다.

그런데 문득 그런 두 사람의 뇌리에 이상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뭐 해? 도망치는 거야?

어디서 들려오는지 알 수 없는 음성에 구호국과 강효일은 순간적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스윽!

그러자 뒤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인기척이 느껴졌다.

마치 자신을 발견하지 못하는 두 사람이 답답해서 일부러 소리를 낸 듯한 느낌이었다.

고개를 홱 돌려 보자, 신장이 허리춤에나 올 법한 소녀가 눈에 들어왔다.

지직거리는 암청색 무언가에 팔꿈치를 올려놓고, 꽃받침을 한 새카만 머리칼의 어린아이.

폭발과 전투로 인해 아수라장이 된 도심지에 있을 법한 분위기는 절대로 아니었다.

대체 어떤 소녀가 헌터들이 우르르 몰려 있는 건물 옥상에 홀연히 나타나 말을 건단 말인가.

게다가 꽃받침이라니.

손바닥에 눌린 볼살이 주변 분위기와 대비되게도 살인적인 귀여움을 자아내고 있었다.

물론 구호국과 강효일에게는 그저 귀찮은 장애물에 불과할 뿐이었지만.

“애가 대체 어디로 들어온 거지?”

강효일이 대원들을 돌아보며 질문했지만, 대답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들 또한 저 아이가 어떻게 이곳에 존재할 수 있는지,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옥상 문은 한 번도 열린 적 없습니다. 지금도 잠겨 있고요.”

“젠장, 이제 별 게 다 거슬리게 하는군. 얼른 내보내고 흔적부터 지웁시다.”

현성 그룹 고용 헌터들이 고개를 갸웃하자, 구호국은 인상을 쓰며 신경질적으로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건장한 성호 그룹 비서실 직원들이 소녀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눈을 가리고 대충 인파 속에 던져 놓을 요량이었다.

스칵!

하지만 아이의 팔에 손을 갖다 대려는 순간, 난데없이 섬뜩한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인간의 살덩이와 뼈가 예리한 무언가에 잘려 나가는 듯한 파열음이었다.

푸쉬이이! 투두둑!

“크아아악!”

소녀에게 손을 뻗었던 비서의 팔이 통째로 바닥에 떨어지더니, 펄떡이며 경련을 일으켰다.

당연히 오른팔을 잃은 비서는 공포에 질린 얼굴로 새된 비명을 질러 댔다.

반면에 건물 옥상을 점거하고 있던 고용 헌터들은 침묵에 잠겨 있었다.

너무도 놀라운 광경에 할 말을 잃고 만 것이다.

이윽고 얼어붙은 현성 그룹 측 고용 헌터 하나가 입을 열자, 이곳저곳에서 한마디씩 터져 나왔다.

“……봤어?”

“너무 빨라서 그림자만 얼핏 본 것 같군.”

“무슨 몬스터라도 되는 건가? 저렇게 빠르다고?”

“아무래도 그런 느낌이야. 사람 형상의 몬스터가 없다고는 할 수 없지.”

“그래. 애가 어떻게 저런 짓을 할 수 있겠어?”

“모습은 문제 되지 않아. 일부러 저런 형태를 취해서 방심을 유도할 수도 있으니 말이야.”

저마다 의견을 내기 시작했지만, 사실상 실속은 없었다.

아무도 나서서 저 소녀를 치워 버리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으니까.

그림자만 살짝 보일 정도로 무지막지한 움직임을 보이는 상대인데, 섣불리 다가설 수가 있겠는가.

하지만 상급자의 명령이 떨어졌을 때는 이야기가 달라질 터였다.

“뭣들 하는 건가? 포메이션 구성하고 공격 퍼부어!”

“아……. 예!”

강효일의 벼락같은 호통이 떨어지자, 현성 그룹 고용 헌터들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그들은 전원 성호 그룹 예비대를 지원하기 위한 원거리 딜러로 구성되어 있었다.

애초부터 접근하여 상대를 공략할 필요가 없었다.

그저 멀리서 강한 화력을 쏟아부어서 분쇄해 버리면 그만이었다.

“전개 완료! 공격 개…….”

원거리 딜러 중 하나가 명령을 전달하려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스윽!

빛나는 암청색 무언가를 만지작거리던 소녀가 돌연 자취를 감추는 게 아닌가.

그러더니 구호국과 강효일의 코앞에 불쑥 나타나며 머릿속으로 말을 걸어왔다.

―나는 레니야. 너는?

“으으…….”

분명 얼굴은 귀여웠지만, 소녀의 전신에서는 무시무시한 살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A급 최상위의 강효일은 어느 정도 버텼으나, B급에 불과했던 구호국은 오금을 바들바들 떨었다.

강력한 살기에 짓눌려 입도 벙끗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구호국이면 살려 줄게.

하지만 이어진 레니의 말에, 구호국 회장은 공포를 이겨 내며 큰소리로 외치고 말았다.

“나, 나요! 내가 구호국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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