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얄 블러드-152화 (153/226)

2화

종로구 종각역 근처의 성호 그룹 사옥은 15층 높이의 신축 건물이었다.

그룹의 핵심 인력이 비인가 헌터로 구성되어 있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말끔한 기업체로 보였다.

양아치 티를 벗기 위한 구호국의 무던한 노력이 이어졌기 때문이었다.

물론 여전히 비인가 헌터들이 실권을 잡고 있어서 내부적으로는 별반 차이가 없었지만.

“생각보다 멀쩡한데?”

블라드 유진은 흥미로운 눈빛으로 호열 빌딩 1층을 둘러보았다.

무슨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작전이 실행되고 있다더니, 평소와 비슷할 것 같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내 그는 주변의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해 냈다.

‘차이가 있긴 하겠군. 사람이 영 보이지 않아.’

원래라면 성호 그룹 직원들이 돌아다녀야 했으나, 1층에는 정말이지 아무도 없었다.

안내 창구는 물론이고 입구를 지키는 보안 팀 직원까지, 마땅히 누군가가 있어야 할 곳이 텅텅 빈 상태였다.

유진은 기감을 확장하여 1층 곳곳을 수색했다.

그러자 요소요소에 몸을 숨긴 헌터들이 대번에 감지되었다.

숨은 ‘음식’을 찾아내는 건 뱀파이어에게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으니까.

척! 척!

그가 계단 쪽으로 걸어가자, 성호 그룹 고용 헌터들은 은신이 들켰음을 눈치챘다.

바리케이드를 향해서 똑바로 다가오는 자의 의도가 대체 뭐겠는가.

“발각됐다! 발사!”

헌터들은 잽싸게 천을 걷으며 숨겨 두었던 물체를 가동하기 시작했다.

위이이잉! 드르르르륵!

모터가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여섯 정의 M134 미니건이 각각 분당 4천 발의 탄환을 쏟아 냈다.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총탄 세례가 호열 빌딩 1층을 휩쓸고 지나간 것이다.

이만한 공세가 집중된다면, 너덜너덜해지고도 모자라 아예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을 터였다.

하지만 놀랍게도 블라드 유진의 모습은 처음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

대략 2m 길이의 날렵한 도를 느릿하게 돌리며 계속 쭉 걸어올 뿐이었다.

“뭐, 뭐야?”

“이 새끼들아 뭐 해! 쏴! 일단 쏘라고!”

전혀 예상치 못한 결과에 용병 헌터들은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채로 재차 방아쇠를 당겼다.

미니건은 헬기에 부착할 때 말고는 제약이 꽤 큰 무기였다.

탄약 소모량이 과도하게 많은 데다가, 모터 구동에 필요한 전력을 공급받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도 화력 수준이 대인 제압용이라, 운용상의 명확한 한계가 존재했다.

하지만 탄약과 전력을 마음껏 공급받을 때는 확실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게다가 지금은 정확히 미니건의 역할인 대인 제압을 하고 있지 않은가.

“발사!”

위이이잉! 드르르르르륵!

바리케이드에 설치된 여섯 정의 미니건이 동시에 불을 뿜었다.

15층 건물이 뒤흔들릴 정도의 화력이 몇 분간 투사되었지만, 여전히 유진의 모습은 처음 그대로였다.

벌써 용병 헌터들이 쏘아 낸 탄환만 해도 수만 발이었다.

“이, 이럴 수가……. 무슨 슈퍼맨도 아니고, 7.62mm 탄환에 맞고도 사람이 어떻게 멀쩡해?”

“우리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거지?”

그들이 입을 쩍 벌린 채 서로를 돌아보는 순간, 바리케이드 뒤에서 이질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뭘 보긴, 허상이지.”

음산한 기운이 가득 담긴 음성을 듣자, 용병 헌터들은 전신에 소름이 쫙 돋는 걸 느꼈다.

분명 자신들의 뒤편에는 이제껏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홱 돌리자, 블라드 유진의 아름다운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물론 가공할 속도로 휘둘러지는 시뻘건 칼날도 함께 포착되었다.

스피잇―!

미약한 파공성에 이어, 호열 빌딩 1층에는 기이한 적막이 찾아왔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는 상황에서 가장 먼저 변화한 건, 느릿하게 흘러내리는 미니건의 파편이었다.

터덩! 쿠웅!

성호 그룹에서 공수해 온 미니건은 M134D―H로, 티타늄 소재가 혼용된 개량형이었다.

하지만 소수혈인의 절삭력 앞에서는 티타늄이고 뭐고 모조리 갈려 나갈 뿐이었다.

그 단단하다는 헌터들의 방어구까지도 일격에 쪼개지는 판국인데, 합금 따위는 종잇장과도 같았다.

“크윽?”

철퍽! 쩍!

미니건이 박살 난 이후에는 용병 헌터들이 우수수 쓰러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흉갑과 함께 상체가 통째로 잘려 나간 것도 모르고, 황급히 물러나려다가 처참하게 나동그라졌다.

폐가 토막 났기 때문에, 그들은 바람 빠진 소리밖에 내지 못했다.

단말마의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용병 헌터들은 그렇게 운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딱! 스슷!

1층에서 총탄을 쏘아 대던 놈들을 몰살시킨 유진은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그러자 천군압쇄로 만들어진 분신이 그대로 모습을 감추었다.

애초에 용병 헌터들은 분신을 향해서 공격을 퍼부은 것이었다.

천군압쇄의 분신은 공격력을 발휘하면서도 동시에 실체가 없었다.

일정 이상의 에너지로 이루어진 충격에는 소멸하지만, 총탄은 그냥 통과하기만 할 뿐이었다.

“꽤 위력적인데, 녹턴에다 달고 날아다녀 볼까?”

그는 미니건을 꽤 유심히 살펴보다가, 문득 이규영의 기억을 떠올리고는 가볍게 단념했다.

이 총을 사용하려면, 전기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상기했기 때문이었다.

금방 흥미를 잃은 블라드 유진은 천장을 향해서 고개를 쳐들었다.

그는 두 가지 선택지를 두고 잠시 고민에 빠졌다.

성호 그룹 헌터들의 재롱을 좀 더 맛볼 건지, 곧장 구호국의 머리통을 아스팔트에 쑤셔 박을 것인지를.

주변에서 회장의 기척은 전혀 없었으나, 찾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터였다.

‘준비한 성의를 봐서 어울려 주는 것도 나쁘지 않지.’

하지만 그 녀석을 붙잡아서 그냥 응징하는 것보다 훨씬 재미있는 방법이 있었다.

이제껏 쌓아 올린 금자탑이 눈앞에서 박살 나는 것만큼 억장 무너지는 일이 있겠는가.

그는 곧바로 호열 빌딩 2층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미, 미친 저게 말이나 되는 일인가?”

맞은편 건물의 옥상에서 본사 건물을 살피던 구호국은 뜨악한 표정으로 망원경을 내려놓았다.

요란한 미니건 소리가 들린 이후, 무전에 답하는 용병들은 아무도 없었다.

1층에 배치된 자들은 내로라하는 민간 군사 기업(PMC) 출신의 용병 헌터인데 아무런 손도 못 쓰고 당해 버렸다.

거기다 잠시 후, 호열 빌딩 2층에서 난데없는 폭음이 들려왔다.

콰아아아앙!

“뭐, 뭐야?”

술병을 집어 던진 구호국 회장은 잽싸게 망원경을 들어 사옥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하지만 햇빛을 반사하는 유리창 때문에, 내부의 상황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띠디디딕! 치직!

“상황 보고해. 그놈 그거 어디 있어?”

답답한 마음에 구호국은 타격대 채널로 무전을 보내 보았다.

하지만 답신을 보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무래도 무전기를 만질 만한 상황이 아닌 모양이었다.

구호국 회장은 불안한 눈빛으로 뒤를 홱 돌아보았다.

그러자 파견대 대장이 굳은 표정으로 망원경을 내려놓고 있었다.

“얼른 투입해야 할 것 같습니다만.”

“아직 내부 상황을 잘 모르지 않습니까? 예비대가 전부 당한 것도 아니고요.”

“내부 상황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같이 보시죠.”

“네.”

탁!

노트북을 열어 프로그램을 실행하자, 곧장 수십 개의 CCTV와 연동된 영상이 화면에 떠올랐다.

구호국은 교전이 포착되는 CCTV를 클릭하여 4분할 화면으로 만들었다.

그러자 호열 빌딩 내부의 상황을 일목요연하게 알 수 있었다.

“이래도 투입 안 할 겁니까?”

“생각보다 훨씬 심각하군요. 차라리 건물을 폭파한 다음에 예비 타격대와 합치는 게 어떻습니까? 힘을 좀 빼고 싸워야 가능성이 있을 것 같은데요.”

“거참, 희생을 엄청나게 강요하시네.”

“이게 저희의 싸움은 아니라는 걸 알려 드리고 싶군요.”

“우리만의 싸움도 아닐 텐데요? 이 일이 현성 그룹과 관련 있다는 걸 저자가 알게 된다면, 그쪽에는 불똥이 안 튈 거 같습니까?”

“…….”

구호국 회장의 신랄한 비판에 파견대 대장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암살 시도와 폭사 유인 작전에 가담했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현성 그룹 또한 무사하지 못할 터였다.

성호 그룹도 대놓고 박살 내러 왔는데, 같은 일을 두 번 하는 것쯤이야 뭐가 어렵겠는가.

어차피 외부의 시선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는 듯한데 말이다.

콰광! 콰아앙!

현성 그룹의 파견대 대장 강효일이 고민에 빠져 있을 때, 호열 빌딩에서 재차 굉음이 터져 나왔다.

아까보다 폭발음과 시각 효과는 작았지만, CCTV로 보는 내부 상황은 더욱 심각했다.

소형 합격진을 구성할 수 있는 예비 고용 헌터들이 모조리 도륙당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구호국이 노트북의 화면을 가리키며 눈을 부라리자, 강효일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작하시죠.”

“좋습니다.”

파견대 대장의 허락이 떨어진 직후, 구호국 회장은 바쁘게 무전기의 채널을 변경했다.

본사 건물 각 층에 대기하고 있던 인원들에게 즉각 탈출 명령을 내린 것이다.

어마어마한 양의 폭약이 건물에 설치되어 있다는 사실은 극소수만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성호 그룹 고용 헌터들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탈출을 시도했다.

유진이 함정을 파훼하는 속도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엄청나다는 걸 몸소 느꼈으니까.

그들도 눈과 귀가 있어서 자사의 용병 헌터들이 어떻게 생을 마감했는지, 대충은 주워들은 게 있었다.

즈이이이잉!

옥상에 설치된 집라인을 탄 헌터들은 순식간에 건물을 빠져나왔다.

그들이 탈출하는 모습과 5층 CCTV에 잡힌 블라드 유진을 확인한 구호국은 득의의 미소를 지었다.

“네놈이 청와대에 나타났다던 용이 아닌 이상, 이것까지 버티지는 못할 것이다.”

삑!

구호국 회장은 손에 들린 기폭 장치를 꾹 누르며 화면 속의 은발 남자를 비열한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그러자 이윽고 지축을 뒤흔드는 굉음과 함께 호열 빌딩이 와장창 무너지기 시작했다.

쿠콰콰콰콰!

마치 철거 예정 건물을 폭파할 때처럼 15층 빌딩은 순식간에 내려앉고 말았다.

아마 저 안에 사람이 있었다면, 그게 누구든 결단코 무사하지 못할 터였다.

하지만 구호국은 승리를 속단하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상대의 명성이 너무도 높았으니까.

띠디디딕! 치직!

“예비대, 전투 준비. 잔해를 둘러싸고 합격진을 발동하라.”

무전을 보냈지만, 명령에 반응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구호국 회장은 노기 가득한 목소리로 재차 송신 버튼을 눌렀다.

띠디디딕!

“왜 대답이 없어!”

―……예, 알겠습니다.

그제야 예비대 대장의 목소리가 무전기를 통해서 흘러나왔다.

아무래도 근처에서 건물이 폭파되다 보니, 그 기세에 질리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구호국은 어깨를 으쓱하며 강효일을 향해서 슬쩍 고갯짓했다.

얼른 원거리 딜러들의 위치를 잡지 않고 뭐 하냐는 의미였다.

하지만 파견대 대장은 구호국 회장을 보고 있지 않았다.

강효일의 시선은 건물 잔해 근처에 자리 잡은 성호 그룹 고용 헌터들을 향하고 있었다.

“그런데 목표에 아무런 피해가 없으면 어떡합니까?”

“뭐라고요?”

구호국은 눈을 휘둥그레 뜨면서 난간을 붙잡고는 건물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러자 큼직한 철근 콘크리트 잔해를 가볍게 치우며 걸어 나오는 은발 사내가 보였다.

“이런 빌어먹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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