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얄 블러드-151화 (152/226)

1화

“그건 여기로 옮겨. 빨리빨리 움직이지 못해?”

“예, 알겠습니다.”

구호국의 신경질적인 외침에 성호 그룹 본사 직원들은 재빨리 다리를 놀렸다.

괜히 앞에서 얼쩡거리다가 어떤 불호령이 떨어질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성호 그룹 본사 건물은 현재 대변혁기를 거치고 있었다.

암살 실패와 더불어 타격대의 정체가 드러나 버렸기에, 혹시나 있을지 모르는 역습을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이렇게까지 하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문득 구호국 회장의 곁으로 다가온 누군가가 손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질문을 던졌다.

눈을 부라리며 옆을 돌아보았으나, 구호국은 놀랍게도 벌컥 화를 내지 않았다.

평소 성격대로라면 정강이를 걷어차고도 남았겠지만, 상대는 자신의 휘하에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저 비밀리에 힘을 실어 주기 위해서 파견된 고용 헌터 대장일 뿐이었다.

성호 그룹으로 치면 이규영 타격대장 정도의 위치지만, 함부로 할 수는 없는 인물이었다.

그랬기에 화를 삭이며 나직이 말을 이어야만 했다.

“그놈은 무조건 옵니다. 무조건이요.”

“하긴 미국과 러시아의 2차 냉전 때도 본거지까지 쳐들어갔지요.”

“확실히 끈질긴 면이 있는 놈입니다.”

“그나저나 타격대도 실패했는데, 예비 병력만으로 상대할 수 있겠습니까?”

“타격대에는 헌터뿐이었지만, 우린 아니지요. 보십시오.”

구호국 회장은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본사 건물의 각 층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엄청난 양의 부비 트랩과 현대 무기들이 설치된 상태였다.

누구든 건물 안에 발을 들인다면, 흔적조차 남지 않을 만큼 대량의 화력이 준비되어 있었다.

“아무리 세계 최고의 헌터라고 해도 버틸 수 없을 겁니다.”

“제가 보기에는 저 건물 또한 버티지 못할 것 같은데요.”

“물론 저것도 날아가겠죠. 하지만 성호 그룹은 그 유명한 블라드 유진과의 싸움에서 승리했다는 명성을 얻게 될 겁니다. 새로운 고용 헌터를 받아들이고, 사세를 키우는 건 일도 아니겠지요.”

“생각해 보니, 금방 손해를 메꾸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린 어떡할까요?”

“이쪽에서 지원만 해 주시면 됩니다. 옆 건물까지 신경 쓰지는 못할 테니, 그리 위험하지 않겠지요. 게다가 몸을 숨길 수 있도록 미리 조치도 해 두었습니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그럼.”

정체불명의 파견대 대장이 고개를 끄덕이자, 구호국은 넥밴드의 버튼을 누르며 중얼거렸다.

“관측 팀. 놈의 위치는?”

치직!

그러자 잠깐의 잡음과 함께 살짝 불안정한 음성이 이어폰으로 들려왔다.

아무래도 거의 송수신 한계 거리까지 가 있는 대상과 연락하는 중인 모양이었다.

―아직 아무런 낌새도 없습니다. 차는 물론이고, 입구 초소의 덩어리 놈도 그대로입니다.

“그놈 특징도 모르고 감시하러 갔어? 이 새끼야! 불타는 말 타고 다니잖아.”

―아, 예. 말은 관측되지 않습니다. 워낙 저택 안쪽에 있어서…….

“당연히 하늘로 날아갈 때를 노려야지. 눈 똑바로 뜨고 감시해. 알았어?”

―예, 알겠습니다.

구호국 회장과 소통하는 관측 팀은 블라드 유진의 집 근처에 숨어 있는 듯했다.

그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서 일찌감치 보내 둔 것이리라.

만반의 준비를 마친 구호국은 거대한 화약고가 된 본사 건물을 쳐다보며 나직이 으르렁거렸다.

“본사를 날려 먹는 한이 있더라도 네놈은 꼭 잡고 만다. 그때의 치욕을 반드시 갚아 주마.”

* * *

치직!

“어휴! 이 개 같은 새끼. 회사에서 대출받은 거만 아니면…….”

청담역 근처의 건물 옥상에 숨어서 망원경과 감시 카메라를 돌리던 타격대원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송신 버튼에서 손을 떼자마자 욕설은 자동으로 튀어나왔다.

그만큼 구호국 회장에게 쌓인 것이 많았던 모양이었다.

“이런 게 뭐 한두 번입니까? 대출 다 갚고 퇴사할 때까지는 참아야지요.”

“그래. 아주 그냥 돈이 원수다. 이런 썩을 곳인 줄 알았으면, 애초부터 입사 자체를 안 하는 건데.”

“조건이 워낙 좋았잖습니까?”

“혜택만 보고 들어왔는데, 그게 되레 발목을 잡을 줄이야.”

“사실 고용 계약서의 독소 조항이야 별거 아니잖습니까? 다들 보복이 두려운 거죠. 내부 고발이라도 했다간 쥐도 새도 모르게 시체가 될 텐데요.”

“하긴 여긴 핵심 직원들이 다 개막장이지. 그냥 돈 모아서 조용히 뜨는 수밖에.”

“주식 대박 아니면, 답도 없는 거 아닙니까?”

“그래서 지금도 열심히 하잖아.”

관측팀장은 구호국에 관한 불만을 중얼거리며 휴대 전화로 시선을 돌렸다.

후배가 감시하는 동안, 코인 거래나 하고 있을 참이었다.

“나 말고 다른 사람 있을 때는 회장 욕하지 말아라. 괜히 뒷담화한다는 소문 나돌면, 우리만 피곤해져. 알지?”

“아, 그 정도 눈치는 있습니다. 제가 뭐…….”

그런데 문득 후배의 대답이 들려오다가 불현듯 뚝 끊기는 게 아닌가.

상당히 절묘한 시점에서 멈추는 바람에 관측팀장은 피식 미소를 짓고 말았다.

“네가 뭐 바본 줄 아냐고? 맞잖아. 그렇게 팔라고 해도 버티더니, 결국에 지하실 뚫고 나락 간 흑우. 큭큭!”

빈정거리면서 그래프를 살펴보던 관측팀장은 이제 매도 시점을 잡고자 했다.

삐뚤빼뚤하며 쭉쭉 오르던 종목을 슬슬 정리하려는 것이다.

고점에 물렸던 코인이라, 조금만 이득을 보면 바로 발을 빼려던 참이었다.

자신이 산 이후로 몇 달간 바닥을 빌빌 기기만 해서 기회가 왔을 때 청산해야 했다.

한데, 휴대 전화를 만지작거리던 관측팀장은 귓전을 스치는 한기에 손가락을 멈추고 말았다.

불길한 기운이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너 왜 대답이 없어?”

태연한 척 일부러 고개를 돌리지 않고 질문을 던졌지만, 목소리는 이미 떨리고 있었다.

그러나 후배에게서는 아무런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대신 뭔가 육중한 것이 바닥에 쓰러지는 소리만 들려왔을 뿐이었다.

털썩!

“헉!”

깜짝 놀란 관측팀장은 품속에서 권총을 뽑아 들며 잽싸게 몸을 날렸다.

그리곤 옆으로 한 바퀴 구르면서 후방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따다다닥!

소음기가 달린 자동 권총은 기이한 소리와 함께 탄환을 쏟아 냈다.

하지만 후배를 쓰러뜨린 목표는 제자리에 가만히 서서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자는 손끝에서 시작된 붉은 칼날을 가볍게 옆으로 그어서 납탄을 모조리 튕겨 낼 뿐이었다.

놀랍도록 신속하고 정확한 동작이었다.

팅! 티디디딩!

반으로 쪼개진 권총 탄환들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오자, 관측팀장은 사격을 중단하고 말았다.

총을 쏴 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은발을 길게 늘어뜨리고 서 있는 남자는 세계 최고의 헌터, 블라드 유진이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저자는 방금 5m 거리에서 발사한 총알을 모조리 튕겨 내지 않았던가.

“하, 항복입니다.”

관측팀장은 바닥에 총을 내려놓은 뒤, 조심스럽게 양손을 펼쳐 보였다.

이미 들킨 이상, 목숨이라도 부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라도 투항하면 살려 줄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니까.

툭!

“이놈은 별거 없군.”

쓰러진 후배를 발끝으로 살짝 건드린 유진은 관측팀장을 향해서 걸음을 옮겼다.

어느새 그의 손은 투명하게 변한 상태였다.

블라드 유진이 성큼성큼 다가왔지만, 관측팀장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항복 이후부터 강력한 압박감이 심장을 비롯하여 전신을 옥죄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문득 바닥에 떨어진 휴대 전화 화면이 관측팀장의 눈에 딱 들어왔다.

“어어? 떠, 떨어진다! 안 돼. 지금 팔지 않으면…….”

기분 좋은 우상향 그래프를 그리던 코인이 한순간에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한 번 주춤하며 잠깐 등락을 반복했다.

지금이라도 팔면 어느 정도 만족할 만한 손절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관측팀장은 도무지 움직일 수가 없었다.

지척까지 다가온 유진이 투명하게 변한 손으로 목을 움켜쥔 탓이었다.

츠츠츠츠츠! 덥석!

“끄르륵!”

혈액이 순식간에 빨려 나가자, 관측팀장은 순간적으로 극심한 현기증과 환각을 경험했다.

반면에 블라드 유진은 상대의 정보를 받아들이기 바빴다.

털썩!

이윽고 관측팀장을 아무렇게나 던져 버린 그는 도시 한 곳을 응시하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재미있는 짓거리를 벌이고 있군.”

관측팀장의 기억을 받아들인 유진은 성호 그룹의 전쟁 준비를 알아차렸다.

녀석이 지닌 정보는 단편적인 것뿐이어서, 놈들의 정확한 규모까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저 감시만 하는 게 아니라, 자신을 음해하려 한다는 건 명확했다.

‘어디 한 번 어울려 줘 볼까?’

그런데 그의 시선에 문득 관측팀장의 휴대 전화가 걸려들었다.

급격한 우하향 곡선만 그리는 화면을 바라보다가 어깨를 으쓱하며 발길을 돌렸다.

관측팀장의 상황을 뒤늦게 알아차린 것이다.

“힘내라고. 언젠가 다시 기회가 오겠지.”

피식 미소를 지은 블라드 유진은 녹턴의 등에 타고 허공으로 휙 솟구쳐 올랐다.

그러고는 성호 그룹 본사가 있는 종로 쪽으로 빠르게 날아갔다.

* * *

“작전 준비 완료. 관측 팀에서 연락이 올 때까지 자유롭게 대기한다.”

“예!”

구호국은 손님맞이 준비를 완벽하게 해 두고, 타격대원들에게 휴식을 지시했다.

그러고는 살짝 초조한 눈빛으로 혼자 이곳저곳을 돌아보았다.

블라드 유진은 러시아와 미국의 헌터들도 개박살 낸 인물.

게다가 성호 그룹의 정예 타격대마저도 몰살시키지 않았던가.

절대로 허투루 상대할 수 없는 자였으니, 이만큼 준비해 놓고도 심란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구호국 회장은 자신이 있었다.

“이번에는 다르지. 아주 크게 다를 거다.”

스르릉!

비열한 웃음을 머금은 칼날이 허리춤에서 빠져나와 번들거렸다.

오랜만에 잡아 본 거였지만, 구호국은 의외로 능숙하게 무기를 다루었다.

예전에 비인가 헌터로 날렸던 게 그저 허명은 아닌 모양이었다.

“웬만하면 끼어들지 마시죠. 너무 위험합니다.”

그러자 근처에서 그 장면을 바라보던 파견대 대장이 슬쩍 만류하는 게 아닌가.

혹시나 저 다혈질 회장의 눈깔이 뒤집혀 블라드 유진에게 달려들면 어쩌나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아마도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여차하면……. 아시죠?”

“예, 이후의 일을 무마하는 것쯤이야 그리 어렵지도 않으니까요. 안전하게 하는 편이 낫지요.”

“그래도 웬만하면 건물은 살립니다. 어영부영 지원하는 거 못 참습니다.”

“물론입니다. 소임은 다해야지요.”

“허허! 긴장감도 끌어 올릴 겸 한잔하시렵니까?”

구호국이 술병을 흔들어 보았지만, 파견대 대장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임무를 앞두고 술을 마실 수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성호 그룹 회장은 아랑곳하지 않고 독한 위스키를 연거푸 들이켰다.

드르르르륵!

그런데 바로 그 순간, 건물의 하단부에서 돌연 굉음이 터져 나오는 게 아닌가.

“으웨에엑! 콜록! 콜록!”

독주를 기도로 잘못 삼킨 구호국은 크게 기침을 하다가, 시뻘게진 눈으로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이, 이게 갑자기 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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