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뭐, 뭣이?”
뚝!
뭐라고 대답을 하기도 전에 통화는 그대로 끊어져 버렸다.
사무실에서 타격대 대장의 전화를 받고 있던 구호국은 순간적으로 멍청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인간적인 감정 따위는 개나 줘 버린 무미건조한 목소리.
구호국 회장은 그리 어렵지 않게 한 사람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 음성을 어찌 잊을 수 있으랴.
최근 들어 자신에게 깊은 모멸감을 느끼게 해 준 인물인데 말이다.
“블라드 유진? 이 버러지 같은 새끼가 이규영이 전화기를 왜 가지고 있어!”
와장창!
책상 위에 놓인 명패를 홧김에 집어 던진 구호국은 씩씩거리며 휴대 전화 화면을 켜 보았다.
하지만 몇 번을 들여다봐도 최근 통화 목록에 찍힌 이름과 번호는 타격대 대장 이규영의 것이 확실했다.
“거기 누구 없어?”
사무실 문을 바라보며 신경질적으로 외치자, 누군가가 노크를 하며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왔다.
똑똑!
“무, 무슨 일이십니까? 회장님.”
“타격대 애들한테 싹 전화 돌려서 상황 좀 알아봐. 결과 나오면 나한테 곧바로 보고하고.”
“예, 알겠습니다.”
“나가 봐.”
“넵!”
얼굴에 노기가 가득했지만, 구호국은 의외로 정상적인 지시만 내렸다.
화풀이 대상이 되지 않았다는 안도감 때문인지, 부하는 사무실을 나가려다가 문을 쾅 닫고 말았다.
창문을 열어 뒀기에 바람이 세게 불어 문이 생각했던 것보다 빨리 닫힌 것이다.
덜컥!
“바, 바람이 불어서…….”
놀란 마음에 제 발을 저린 모양인지, 부하는 다시 문을 열고 들어와 어설픈 변명을 늘어놓았다.
“누가 뭐래? 가서 시킨 일이나 잘하라고! 이 새끼야!”
그러자 상념에 잠겨 있던 구호국이 눈알을 번들거리며 재떨이를 집어 던졌다.
휙! 콰앙!
“히익!”
헌터의 힘으로 던져진 유리 재떨이는 대포처럼 날아가 나무 문에 큼지막한 구멍을 뚫어 버렸다.
깜짝 놀란 부하는 혼비백산한 얼굴로 잽싸게 문을 닫았다.
씨근거리는 숨소리를 내던 구호국은 얼굴을 마구 일그러뜨리며 담배를 꺼내 물었다.
띵! 칙! 칙!
“어찌 된 게 쓸 만한 놈이 하나도 없어. 그나마 이규영이 좀 괜찮았는데……. 설마 죽은 건 아니겠지?”
재떨이가 저 멀리 날아가 버렸기에, 재는 바닥에 아무렇게나 털었다.
비싼 카펫이 담뱃재에 더러워졌지만, 그딴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지금은 타격대의 작전 성공 여부와 앞으로의 일로 머릿속이 복잡할 뿐이었다.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뭔가 대비를 해 둬야 해. 아무래도 그 인간에게 연락해 봐야겠군.”
그렇게 중얼거린 구호국 회장은 이내 어디론가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 * *
“이놈은 조만간 손봐 주기로 하고. 문제는 숨바꼭질 마스터인가.”
구호국과의 통화를 마친 블라드 유진은 대성체 미궁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통화를 위해 잠깐 나갔다 온 사이, 습격자들의 시체는 대부분 치워져 있었다.
그새 생성된 몬스터들이 시체를 죄다 주워 먹은 모양이었다.
그는 미궁 내부를 기웃거리는 혈거인들을 가만히 살펴보았다.
‘희한하군.’
놈들은 이제 막 나타난 개체임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를 찾는 것처럼 이곳저곳을 수색하며 돌아다녔다.
이곳의 몬스터들을 도륙하고, 분화한 최종 보스까지 썰어 버린 유진을 찾는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혈거인들의 보스가 내린 명령 때문에 저런 행동을 하는 것이리라.
멀찍이 떨어진 상태로도 부하 몬스터들을 조종할 수 있는 듯했다.
“귀찮게 하네.”
일반적으로 미궁의 보스는 영역을 지키려는 경향이 매우 강한 편이었다.
하지만 보스 혈거인 녀석은 위험을 감지하자마자 곧바로 내빼 버렸다.
그냥 도망쳤다면 따라가서 모가지를 따 버리면 그만인데, 문제는 이놈이 짙은 독무 속에 숨었다는 사실이었다.
강력한 독기에는 블라드 유진의 예리한 감각마저도 일정 부분 차단하는 힘이 있었으니까.
결국에 그는 놈이 있을 만한 곳을 모조리 뒤져야만 했다.
대성체 미궁의 범위는 무지막지하게 넓었기에, 찾는 데 시간이 꽤 걸릴 수밖에 없었다.
“녹턴.”
“푸르르! 푸릇!”
하지만 유진에게는 허공을 질주할 수 있는 유령 군마, 녹턴이 있었다.
두두두두두!
그는 독무가 퍼진 곳을 빠르게 훑으며 지나갔다.
암흑화를 시전한 채로 날아갔기에, 혈거인들은 블라드 유진을 감지하지 못했다.
덕분에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수색을 이어 갈 수 있었다.
아무리 독기가 기감(氣感)의 전개를 차단한다 해도, 지척에 다가온 그의 감각까지 속일 수는 없었다.
독무가 넓게 퍼진 곳을 살펴보던 유진은 이내 보스 혈거인을 포착할 수 있었다.
놀랍게도 녀석은 입구 근처에 펼쳐진 매우 좁은 독무 속에서 발견되었다.
하도 안 나오기에 혹시나 해서 돌아와 봤더니, 의외의 이득을 본 것이다.
‘이런 곳에 있을 줄이야.’
등잔 밑이 어둡다고, 당연히 저런 곳에는 숨어 있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의표를 찌른 덕분에 꽤 오래 살아남았지만, 최종 보스는 어차피 죽을 운명이었다.
살심을 품은 그에게서 벗어날 수는 없을 테니까.
차라리 미궁을 터트리고 바깥으로 도주하는 게 훨씬 생존 확률이 높았을 것이다.
터덕! 두두둣!
“크익!”
블라드 유진에게서 어마어마한 압박감을 느낀 보스 혈거인은 또다시 도주를 시도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사냥을 방해하는 존재가 전혀 없었다.
스이잉! 푸확―!
소수혈인을 뽑아 든 그는 녹턴을 타고 날아가서 보스 혈거인의 목을 가볍게 베어 버렸다.
아마 이 녀석은 제주도에서 보았던 사이클롭스와 비슷하거나 좀 더 강한 녀석일 터였다.
하지만 유진은 그때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졌다.
그저 핏빛 칼날을 한 번 긋는 것만으로도 명줄을 끊어 버릴 수 있을 만큼 말이다.
쿠우웅!
[대성체 미궁의 최종 보스 식인 혈거인 카프록스 처치!]
[보상이 주어집니다.]
보스 혈거인의 거대한 몸체가 지면에 처박히자, 저 멀리서 기묘한 진동이 느껴졌다.
존재의 구심점이나 다름없는 최종 보스가 목숨을 잃으니, 미궁이 급속도로 붕괴하기 시작한 것이다.
익숙한 현상이라 그는 무너지는 공간에는 시선조차 주지 않고, 최종 보스에게서 나온 아이템을 살펴보았다.
<아이템 정보>
명칭 : 식인 혈거인의 가죽
등급 : S
방어력 : S+
내구도 : S+
효과 : 제작 재료, 충격 흡수, 방수
여덟 겹으로 되어 있는 가죽. 방어력이 우수하고, 기본적으로 방수 기능이 있음. 의외로 가볍다는 것이 장점이자 단점.
‘제작 재료는 처음인가.’
이제껏 그가 얻은 아이템은 대부분 완성품이었다.
양산의 드라코 도무스와 스페인 마드리드의 미궁 군체까지 길을 뚫을 때 이따금 제작 재료가 나오기도 했다.
생산 스킬을 전혀 갖추지 않았던 블라드 유진은 그것들을 모조리 처분해 버렸다.
하지만 방어구의 중요성을 절감하던 중이라, 이번에는 제작 재료로 뭔가 다른 걸 해 볼 참이었다.
직접 아이템을 만들지는 못해도 생산직 헌터들에게 맡기면 될 일 아니던가.
쿠구구구구!
대성체 미궁이 완전히 붕괴하고 나자, 도형욱을 비롯한 공략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습격대의 합격진을 상대한 데다가, 보스 혈거인이 도망치는 바람에 시간이 꽤 흐른 것이다.
“버, 벌써 공략을 끝내신 겁니까?”
“그래. 저기 뒤에 기어 나오는 거나 처리해.”
“몬스터 웨이브인가요?”
“몇 놈 안 되니까 어렵지는 않을 거야.”
“아! 이번에는 몬스터를 정리하고 공략한 모양이군요.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배려는 무슨, 귀찮은 놈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처리한 거지.”
유진은 공략대를 남겨 두고 녹턴의 등으로 훌쩍 뛰어올랐다.
그러자 도형욱이 그런 그에게 황급히 말을 붙였다.
“어디 가시는 겁니까? 이 뒤의 계획은 어떡하고요?”
몬스터 웨이브와 전선 이동에 블라드 유진이 필요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공략대장의 입장에서는 무조건 그와 함께하는 편이 좋았다.
미궁을 정화하긴 했지만, 경계 지역에서는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까.
전선도 아직 한참 뒤에 있지 않은가.
하지만 유진은 그런 도형욱의 의견을 깡그리 무시했다.
“끝나면 전화해. 이 근방을 정리하는 것도 꽤 시일이 걸릴 것 같군.”
“그렇긴 합니다만.”
“금방 끝내고 돌아올 것이다. 네놈들도 돈 받은 만큼은 해야지?”
“……예.”
두두두두두!
녹턴이 남쪽 하늘 너머로 사라지자, 공략대는 미궁이 있던 장소를 주시했다.
곧이어 저곳에서 몬스터들이 쏟아져 나올 것이기 때문이었다.
수효가 얼마 안 될 거라는 말을 들어서 그런지, 대성체 미궁이라 해도 별로 긴장되지 않았다.
80명이 넘는 공략대 인원으로 그 정도는 가뿐할 터였으니까.
하지만 이내 도형욱을 비롯한 대원들의 얼굴은 시커멓게 썩어 들어갔다.
쿠구궁! 쿵!
“그워어어어!”
20m는 가뿐히 넘을 듯한 혈거인들이 무더기로 기어 나온 탓이었다.
공략대원들은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아니, 몇 놈 안 된다면서요?”
“그, 그러게나 말입니다.”
아무래도 블라드 유진과 일반적인 헌터들의 기준이 너무도 달랐던 모양이었다.
“어려워도 할 일은 해야죠. 갑시다.”
도형욱은 그런 대원들을 다독이며 전진하기 시작했다.
* * *
공략대에 뒤처리를 맡긴 유진은 전선에서 벗어나며 흑룡에게 텔레파시를 보냈다.
혈성쇄혼술이 EX급으로 성장함에 따라, 그는 이제 하수인과 직접 소통을 할 수 있었다.
―쓸 만한 생산직 헌터를 저택으로 보내라.
놀랍게도 흑룡은 엄청난 속도로 뛰어난 제작 각성자를 섭외했다.
집에 도착하여 커피를 한 잔 내리고 있으니, 생산직 헌터가 벌써 도착한 것이다.
정웅철과 함께 들어온 빼빼 마른 남자는 연신 주변을 힐끔거렸다.
항상 전설적인 행보를 보이는 블라드 유진의 집이다 보니, 모든 게 신기해 보이는 듯했다.
하긴 외부에는 워낙 신비로운 이미지라 그럴 만도 했다.
“진 연합체 원로의 추천으로 온 조영준이라고 합니다. 이것저것 많이 만드는데, 방어구가 전문입니다. 특히…….”
“알고 있으니 소개는 필요 없다. 한번 살펴보도록.”
툭!
그는 방금 얻은 식인 혈거인의 가죽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자 조영준은 눈을 반짝이며 불그스름한 가죽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무두질이 되지 않아 지방과 살 조각이 그대로 붙어 있었지만, 이자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순식간에 장갑을 낀 조영준은 꽤 오랫동안 유심하게 확인하더니,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상등품이군요. 아니, 이 정도면 최고 등급입니다. 흠! 갑자기 이 물건을 제게 보여 주신 이유가 있으시겠지요.”
“눈치가 빠르군.”
“무엇을 원하십니까? 이만한 크기면 전신 레더 아머를 만들고도 남을 겁니다.”
“그렇게까지 거추장스러운 건 필요 없다. 흉갑 하나면 충분해.”
“그러면 재료가 상당히 남을 텐데요? 겹쳐서 방어력을 높이는 게 어떻습니까?”
“되도록 얇았으면 좋겠는데. 겉으로 거의 드러나지 않게 말이야.”
“알겠습니다. 대금은……. 진 연합체를 통해서 받으면 되겠습니까?”
“그래.”
필요한 지시를 모두 내린 유진은 얼른 물러가라는 표시로 손을 슬쩍 내저었다.
한데, 조영준은 갈 생각은 하지 않고 대뜸 고개를 조아리는 게 아닌가.
“돈 말도 더 원하는 게 있나?”
“그, 그렇습니다.”
“생산직 헌터에게 돈보다 중요한 게 있다니, 신기한 일이로군. 듣기로는 의뢰, 계약, 결과가 끝이라던데 말이야.”
“때로 좋은 물건이 있으면 계약 내용이 달라지기도 하지요. 혹시나 남는 재료는 제가 유용해도 될는지 여쭙고 싶습니다.”
“어렵지 않은 요구로군. 좋다.”
“당연히 재료비만큼의 단가는 깎겠습니다.”
“그러든지.”
“그리고 하나만 더 말씀드려도 괜찮을까요?”
요구가 자꾸만 늘어나자, 그의 눈빛이 미묘하게 일변했다.
귀찮음과 함께 날카로운 기세가 일어 상대를 압박한 것이다.
“뭐지?”
살기등등한 블라드 유진의 목소리에 조영준은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끝까지 말을 이었다.
“사인 한 장만……. 패, 팬입니다.”
“…….”
7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