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쉬이이익! 퍼엉! 콰과광!
형형색색의 빛줄기가 하늘 높이 솟구치더니, 블라드 유진을 노리고 다발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어떤 것들은 연쇄 폭발을 일으켰고, 일부는 그의 육신을 꿰뚫을 것처럼 짓쳐 들었다.
유진은 소수혈인을 놀려서 공격을 쳐 내고, 암흑화를 응용하여 폭발 범위에서 신속하게 벗어났다.
하지만 회피 동작을 펼치는 바람에 합격진 파훼 시도는 무산되어 버렸다.
‘이런 역할이었군. 그러고 보니, 전원 원거리 딜러인가.’
대장 근처에 자리 잡은 나머지 인원은 혹시 있을 불상사에 대비하기 위함인 듯했다.
서른 명의 원거리 딜러들이 작정하고 뿜어내는 집중 공세는 상당히 버거운 수준이었다.
원래라면 공격을 깡그리 무시하고 접근하여 모가지를 날려 버렸을 테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합격진에서 발생하는 압력이 유진의 움직임을 제약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정도는 되어야 싸울 맛이 나지. 아주 좋아.”
대군주의 역병을 시전하고도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했으나, 그는 조금도 실망하지 않았다.
자신을 진심으로 싸우게 만든 100인의 습격자들을 되레 반기는 중이었다.
최근에는 쉽사리 느끼지 못했던 짜릿한 전투의 쾌감을 저들이 선사해 주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습격자들과 어울려 주는 건 여기까지였다.
“재롱은 끝났다.”
[EX급 스킬 ‘천계도살검(天界屠殺劍)’이 시전되었습니다.]
[‘권능 폭발’로 인해 ‘천계도살검’이 EX급 최대치의 위력으로 적용됩니다.]
[주변의 인간들이 끝없는 공포를 느낍니다.]
츠츠츠츠츠!
이미 권능 폭발이 적용되었기에, 천계도살검은 그야말로 한계까지 강화된 상태였다.
무조건 크다고 강한 건 아니지만, 지금 블라드 유진에게는 거대한 무기가 필요했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손에서 시작된 시커먼 검신은 무려 10m가 넘게 뻗어 나오고 있었다.
천계도살검의 주변으로 뿜어져 나온 보랏빛 오라가 요사스러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끊어 내고 파괴한다.”
츠팟―! 쿠콰콰콰콰콰!
유진이 간결하게 검식(劍式)을 전개하자, 암자색 섬광이 사람 허리 어림 높이를 휩쓸고 지나갔다.
지면에 직접 닿지 않았는데도 조각조각 부스러진 자갈과 모래가 저절로 튀어 올랐다.
공간을 장악하고 모든 물질을 분쇄하는 마기의 위력에 휘말려 버린 것이다.
“크아악! 지, 진법이……!”
“붕괴한다! 도망쳐!”
“으아아악!”
최초로 천계도살검에 적중당했던 십수 명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두 토막이 나 버렸다.
이후로 합격진의 여력을 동원하여 무형의 장벽을 만든 습격자들은 간신히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상태 또한 그리 멀쩡하지는 못했다.
원래라면 공격에 쓰였어야 할 진법의 힘이 엉뚱한 곳으로 흘렀기 때문이었다.
“역시 한쪽을 무너뜨리니, 압박이 확 줄어드는군.”
전신에 가해지던 압력이 줄어들자, 블라드 유진은 좀 더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다.
그 말인즉, 천계도살검을 펼치는 검술이 훨씬 흉포하고 위력적으로 변했다는 뜻이었다.
하늘을 향해 솟구쳤던 암자색 섬광이 지면으로 내리꽂히려 했다.
“마, 막아야 해!”
그러자 간신히 합격진을 구성하고 있던 습격자들이 무형의 장막을 더욱 굳건히 다졌다.
하지만 유진의 입가에 걸린 미소는 그런 놈들의 행태를 가볍게 비웃고 있었다.
‘설마 그리 간단할까?’
스슥―!
강력한 힘의 파장을 뿜어내며 내려쳐지던 천계도살검은 한순간에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어?”
습격자들은 잽싸게 그의 손으로 시선을 옮겼으나, 암자색 기운은 찾아볼 수조차 없었다.
마치 스킬을 취소한 것처럼 그야말로 완벽하게 사라졌다.
하지만 블라드 유진이 천계도살검을 거두어들이지 않았다는 사실은 이내 모두가 알 수 있었다.
무형의 장막으로 방어를 굳히고 있던 습격자들의 뒤에서 난데없이 시커먼 칼날이 튀어나왔으니까.
스가가가각! 콰칭!
“커헉!”
“끄어어!”
허리가 양단된 수십 명의 헌터들이 우수수 쓰러지자, 앞을 가렸던 무형의 장막이 산산조각으로 깨져 버렸다.
천계도살검에 박살 난 것이 아니라, 합격진이 와해하면서 자연스럽게 흩어진 것이다.
방금의 일격으로 인해, 진을 구성하던 습격자들은 절반 이상이 유명을 달리했다.
그러자 상황을 지켜보던 대장이 그들을 향해서 크게 소리쳤다.
“정신 차려! 침착하게 다음 단계로 넘어가라!”
그자의 외침에는 심신을 뒤흔드는 것처럼 웅혼한 울림이 있었다.
아무래도 뭔가 스킬을 써서 혼란에 빠진 습격자들을 한순간에 일깨운 모양이었다.
놀랍게도 그들은 대장의 음성을 듣고 난 이후, 평정심을 되찾고 일사불란하게 합격진을 재구축했다.
확연하게 소규모가 되었지만, 목표를 향한 압력은 제대로 들어가는 중이었다.
물론 이전보다 힘이 훨씬 약해서 압박감이 극명하게 줄어들었지만.
“방금의 대응은 칭찬해 줄만 하군. 재미있네.”
스윽!
천계도살검은 오른팔의 움직임에 따라 옆으로 쭉 늘어뜨려졌다.
그런데 길게 뻗었던 암자색 빛줄기가 극단적으로 단축되더니, 순식간에 자취를 감춰 버리는 게 아닌가.
블라드 유진의 손으로 회수되었던 시커먼 기운은 이내 무시무시한 기세로 재차 발산되었다.
그의 주먹이 내뻗어지는 방향에 맞춰, 수십 개로 나뉜 채 말이다.
스피이이잉! 촤좌좌좍!
“막아!”
심상치 않음을 감지한 대장이 다급하게 소리치자, 습격자들은 합격진을 가동하여 무형의 에너지를 발산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격 자체를 떨구어 버리는 천계도살검의 위력에 합격진의 힘은 와르르 무너져 버렸다.
게다가 유진은 그저 암자색 섬광을 여러 개로 나누기만 한 게 아니었다.
그중 일부에는 시공투절을 시전하여, 합격진과 전혀 상관없는 장소로 천계도살검을 이동시켰다.
푸쉭! 퍼버벅!
“커헉!”
“끄어억!”
그곳은 바로 대장의 근처에서 정교하게 견제를 넣던 원거리 딜러들의 등 뒤였다.
갑자기 후방에서 튀어나온 암자색 칼날에 서른 명의 습격자들은 혼비백산하여 나자빠졌다.
전혀 예상조차 하지 못한 공격에 반응하느라, 스텝이 꼬여 버린 것이다.
헌터로 각성하여 뛰어난 운동 능력을 지녔더라도 당황했을 땐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이, 이런 젠장……!”
피를 뿌리며 우수수 쓰러지는 부하들을 바라보며 대장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합격진을 믿고 세계 최고의 헌터라는 자에게 도전했으나, 그 결과는 참담하기 그지없었다.
사실 PVP를 중점적으로 연마한 자들은 동급 헌터를 상회하는 실력을 갖췄다고 알려져 있었다.
블라드 유진이라는 자가 제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100명의 정예 헌터를 당해 내지는 못하리라 생각했다.
그런 판단을 내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세간에 그의 등급은 S급으로 알려져 있었으니까.
“뭐 저따위로 강하단 말인가. 이, 일단 후퇴부터 해야겠군.”
대장은 부하들을 내버려 두고 허겁지겁 도망치기 시작했다.
이미 죽은 놈들을 조사해 봐야, 죄다 비인가 헌터들이니 소속을 알아내기는 매우 어려울 터였다.
자신만 붙잡히지 않는다면, 어디서 온 병력인지 알려질 위험성은 거의 없었다.
지금은 적당한 수준에서 꼬리 자르기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타다닷!
대장의 판단은 매우 빨랐고 시의적절했으나, 한 가지를 간과하고 말았다.
그들이 대적하려는 자가 상상을 아득히 초월하는 수준의 능력을 지녔다는 걸 말이다.
“헙!”
헛바람을 들이켠 습격대 대장은 급히 발걸음을 멈춰야만 했다.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은발을 흩날리는 남자가 자신의 눈앞에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분명 어마어마한 속도로 이동했을 텐데도 유진은 숨결조차 거칠어지지 않았다.
그저 담담하게 서서 오만한 눈빛으로 대장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뭐 하는 놈들인지 궁금하구나.”
“훗! 내게서 정보를 캐낼 수 있을 것 같나? 으득!”
습격대 대장은 입 안에 숨겨 두었던 무언가를 깨물더니, 이내 얼굴이 시커멓게 변했다.
이윽고 그자는 옆으로 힘없이 고꾸라지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크크크! 네놈은 보이지 않는 검에 영원히 고통받게 될 것이……. 크르륵!”
그 말을 끝으로 대장은 힘없이 눈을 감아 버렸다.
아무래도 독단(毒丹) 같은 것을 숨기고 있다가 깨무는 고전적인 자결 방식인 듯했다.
하지만 그자를 내려다보던 블라드 유진의 표정에서 당혹감 따위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원래라면 단서가 모조리 사라졌기에 불쾌해해야 정상이었다.
그러나 그는 투명하게 변한 손으로 축 늘어진 대장의 육신을 가볍게 들어 올릴 뿐이었다.
“요란하기만 하고 아주 재미없는 쇼였어.”
츠츠츠츠츠!
흡혈 스킬이 발동되자, 대장의 얼굴에 가득했던 시커먼 기운이 삽시간에 사라지기 시작했다.
유진의 손을 통해서 독 기운이 빠져나감과 동시에 놈의 의식이 회복되었다.
“커헉……!”
“죽은 척 따위를 하다니, 설마 그딴 것에 속으리라고 생각했나?”
습격대 대장은 독단을 깨물고 자결한 것이 아니었다.
입 속에 숨겨 두었던 것은 그저 죽은 것처럼 보이게 하는 특별한 약물에 불과했다.
평범한 헌터라면 속을 수밖에 없을 정도로 정교하게 죽음을 위장하는 포션이었다.
게다가 이곳은 미궁의 내부가 아니었던가.
언제나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곳이라, 십중팔구는 시체를 놔두고 이동할 것이 뻔했다.
그러면 한참 뒤에 제정신이 돌아온 대장은 유유히 도망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블라드 유진은 뱀파이어 로드, 피와 어둠의 군주였다.
식량인 피 주머니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를 구분 못 할 리가 없었다.
“어, 어떻게…….”
“별거 아니야. 상대를 잘못 고른 거지.”
츠츠츠츠츠!
그는 습격대 대장의 혈액을 모조리 빨아들였다.
건강한 성인 남자라면 보통 5L의 혈액을 보유하고 있지만, 유진에게 흡수되는 것은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팽팽했던 대장의 피부는 급격하게 쪼그라들며 비쩍 마른 미라가 되어 버렸다.
털썩!
바닥에 시체를 아무렇게나 던져 버린 블라드 유진은 눈을 감고 피 맛을 음미하기 시작했다.
대상의 기억을 좀 더 명확하게 빼앗기 위함이었다.
이윽고 그는 눈을 번쩍 뜨며 시뻘건 안광을 줄기줄기 쏟아 냈다.
지이이잉! 파스스스!
붉은 빛줄기가 주변을 훑고 지나가자, 대지에 널브러져 있던 시체들이 마치 들썩거리는 것 같았다.
물론 그렇다고 죽은 자들이 벌떡 일어나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저 강력한 피의 권능이 발산됨으로 인해, 시체 속에 잔류하던 혈액이 일순간 반응한 것뿐이었다.
이윽고 유진은 천계도살검을 거두며 비쩍 마른 대장의 시체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이규영. A급 비인가 헌터. 성호 그룹의 그림자 속에서 암약하는 놈이었군.”
그에게 습격자들의 정체를 알아내는 거야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짧게 혀를 찬 블라드 유진은 이규영의 몸을 뒤져서 휴대 전화를 찾아냈다.
화면을 켜 보았지만, 미궁 내부라 그런지 신호가 전혀 잡히지 않았다.
힐끗 녹색 독기가 가득한 미궁의 안쪽을 쳐다본 그는 발걸음을 돌려 입구로 되돌아갔다.
자욱한 독무 속에서 최종 보스를 찾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스윽!
육각 기둥을 통해서 대성체 미궁 바깥으로 나온 유진은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 전선과 그리 멀지 않은 곳이라 휴대 전화 신호가 제대로 잡혔다.
뚜르르르! 달칵!
연결음이 몇 번 가기도 전에 상대는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
아무래도 전화가 걸려 오기를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았다.
―어떻게 되었나? 잘 끝난 거겠지? 왜 말이 없어! 사람 답답하게.
마치 호통을 치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그는 한동안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상대도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꼈는지, 주절거리던 입을 멈추었다.
그러자 블라드 유진은 그제야 살기 가득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재미있는 짓거리를 하는구나. 기다려라. 내가 곧 찾아갈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