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얄 블러드-148화 (149/226)

23화

분화를 저지하려던 그때, 미궁 입구 쪽에서 약간의 소란이 발생하는 게 아닌가.

최종 보스를 찾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기에, 유진은 이곳저곳을 수색하며 몬스터들을 상당 부분 줄여 놓았다.

그래서 그런지 대성체 미궁에 진입한 무리는 꽤 빠른 속도로 진격하는 중이었다.

중간에 걸리적거리는 몬스터가 없지는 않았지만, 한두 놈이 튀어나오더라도 순식간에 갈려 나갔다.

이 대성체 미궁에서 생산되는 혈거인(血巨人)은 최상위급 길드에서도 버거워하는 몬스터인데도 말이다.

“실력이 상당한 모양인데? 뭐 하는 놈들일지 궁금하군.”

잠깐 뒤를 돌아보는 사이, 최종 보스는 분화를 거의 끝마치고 있었다.

애초에 그가 발견했을 때부터 막바지 단계에 들어갔던 모양이었다.

괜히 입구 쪽의 움직임에 신경 쓰느라, 분화를 저지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일이 살짝 꼬였지만, 블라드 유진은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어차피 분화해서 최종 보스가 둘이 되어 봤자 조금 귀찮아질 뿐이지, 크게 곤란한 건 아니기 때문이었다.

‘분화한 개체부터 처리하는 게 우선인가.’

이대로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새로이 생성된 최종 보스는 어디론가 발사될 터였다.

마치 미궁의 파편처럼 상당한 거리를 날아가 처박히게 될 것이다.

기껏 여기까지 밀고 올라왔는데, 되돌아가서 새로운 성체 미궁을 해결해야 할 수도 있었다.

“그딴 헛짓거리를 할 수는 없지.”

두두두두두!

그는 녹턴을 몰아 이제 막 분화를 마친 보스 몬스터에게 접근했다.

녀석은 마기를 뿜어내 마치 고치처럼 온몸을 칭칭 감싸는 중이었다.

유진은 그런 최종 보스를 향해서 시뻘건 칼날을 들이밀었다.

츠츠츠츠츠!

피의 권능을 듬뿍 머금은 소수혈인은 불에 달군 쇠꼬챙이처럼 섬뜩한 빛을 뿌려 댔다.

카가가가각!

‘저항감이 아예 없진 않아.’

대성체 미궁에서 최종 보스의 분화를 목격한 건 이번이 두 번째.

그때도 그는 소수혈인으로 갓 만들어진 육각 기둥을 조금 어렵사리 베어 냈다.

하지만 지금은 최전성기의 경지를 넘어서 2천 레벨을 목전에 둔 상태가 아니었던가.

마기로 이루어진 육각 기둥은 소수혈인을 어느 정도 밀어내는 듯하더니, 이내 침범을 허락하고 말았다.

콰지직! 푸슛―!

“크뤠에엑?”

공격이 최종 보스의 몸뚱이를 꿰뚫고 들어가는 순간, 암흑화가 풀리며 블라드 유진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는 바닥에 다리를 박아 넣고 체중을 실어 가며, 가재를 닮은 보스 몬스터를 반으로 쪼개 버렸다.

무려 10m에 달할 만큼 거대한 칼날에 내려 찍히자, 단단한 갑각을 보유한 몬스터라 해도 버틸 재간이 없었다.

그런데 문득 분화를 끝내고 쉬던 보스 혈거인이 벌떡 몸을 일으켜 어디론가 달려가는 게 아닌가.

쿠구구궁! 쿵!

“허! 뭐지?”

굉음을 일으키며 도주하는 모습에 그는 헛웃음을 내뱉고 말았다.

이제껏 미궁 내부에서 유진을 보자마자 도망치는 녀석은 처음이기 때문이었다.

‘다른 최종 보스는 저러지 않았는데, 저놈만의 특성인가?’

황급히 진득한 독기 속으로 숨는 보스 혈거인을 보며 유진은 문득 관조 스킬을 떠올렸다.

괴상한 행동을 하는 녀석의 종족 효과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고작 저런 수준의 적에게까지 펑펑 쓸 수는 없었다.

관조는 무려 재사용 대기 시간 한 달짜리 스킬이었으니까.

“일단 저놈은 놔두고, 이제 이쪽이로군.”

녹색 독무(毒霧)에서 시선을 거둔 그는 이곳으로 빠르게 접근 중인 일단의 무리에게로 신경을 집중했다.

그들의 수효는 대략 100명으로 유진종합건설의 공략대보다 좀 더 많았다.

하지만 도형욱이 이끄는 공략대가 벌써 이곳에 도착했을 리는 없었다.

그들은 한창 이블 빅혼 무리와 전투를 벌이고 있을 테니까.

‘뭐 하는 놈들일지 궁금한데.’

소수혈인을 흩어 버린 블라드 유진은 팔짱을 낀 채, 그들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일단의 무리는 기척을 숨기고 은밀하게 접근해 왔다.

멀찍이 떨어져서 동태만 살피는 걸 보니, 그가 최종 보스와 전투를 벌이는 순간을 노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유진이 짙은 어둠이 깔린 뒤편을 응시하며 서 있자, 슬금슬금 다른 움직임을 보였다.

아마 무리를 이끄는 수뇌부끼리 은밀하게 의견 교환이라도 하려는 듯했다.

하지만 그는 놈들이 뭔가를 준비할 시간을 줄 마음이 전혀 없었다.

‘이러면 어떤 반응이 나올까?’

스윽! 츠츠츠츠!

블라드 유진은 양손을 슬쩍 들어 올리며 마기를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불청객들이 몸을 숨기고 있던 컴컴한 독무가 급속도로 걷히는 게 아닌가.

“허! 이 타이밍에 마기가 갑자기 사라진다고? 재수도 더럽게 없군.”

혼자만 흰 복면을 쓴 습격대의 대장이 난감한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주변으로 검은 옷을 입은 자들이 모여들었다.

계획이 틀어졌으니, 다음 명령을 하달받으러 온 것이다.

“이미 들켰습니다.”

“기습은 물 건너갔다. 플랜 B를 발동하는 수밖에.”

“예.”

마기의 이상 현상으로 손쉽게 발각되고 말았으나, 습격자들은 당황한 기색 없이 곧바로 다음 행동을 개시했다.

애초부터 유진의 뒤통수를 치기 위해 치밀한 계획을 짜고 온 모양이었다.

일사불란한 그들의 움직임에 그는 눈에 이채를 띠며 주먹을 꽉 쥐었다.

파스스스!

블라드 유진의 강력한 의지에 끌려오던 마기가 시커먼 연무로 변해 흩어져 버렸다.

‘대략 30명 정도는 느낌이 다르군. 마치 위장을 위해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 같다.’

그는 습격자들이 두 패로 나뉘었다는 것을 한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똑같은 옷을 갖춰 입었지만, 30%의 인원은 왠지 겉도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 유진의 판단이 옳았던 모양인지, 70명의 습격자가 먼저 공격을 가해 왔다.

나머지 30명은 반원을 그리며 둘러선 상태로 간간이 원거리 공격만 날릴 뿐,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시작하라!”

스스스슥!

습격자들은 빠른 속도로 그의 주변을 에워싸더니, 일정한 패턴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놀랍게도 중심을 향해서 기이한 압력이 발생하는 게 아닌가.

전신을 압박하는 힘을 느낀 블라드 유진은 신기하다는 듯이 습격자들을 둘러보았다.

“호오? 이런 게 가능하다니, 굉장히 신기하군. 합동 스킬 같은 건가.”

일반적으로 헌터들의 스킬은 개인이 에너지를 소모하여 직접 사용하는 형식이었다.

패시브 스킬의 경우에는 자원 소모 없이 항시 적용되기도 했다.

결과가 어떻든 간에 스킬 사용의 주체는 헌터 한 명에 국한되는 게 정상이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한 가지 스킬을 사용하기 위해서 70명이 힘을 합친 듯한 느낌이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B급 상위에서 A급 초반대 수준으로 보이는 헌터들이 이토록 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는 없을 테니까.

그는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스킬 전개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드드드드드!

중심을 향해서 가해지던 압력이 정점에 달하는 순간, 습격자들의 진형이 급격하게 변했다.

전방위에서 동일하게 느껴지던 압박감이 들쭉날쭉하게 바뀐 것이다.

그와 동시에 날카로운 기운이 유진을 노리고 마구 쏘아지는 게 아닌가.

무형의 기운이지만, 위력은 그의 예상을 아득히 초월할 정도로 강력했다.

스이잉! 스잉―! 카강! 쩌저정!

그는 잽싸게 두 자루의 소수혈인을 만들어서 날아들던 기운을 닥치는 대로 쳐 냈다.

투명한 기운이라 대응하기 매우 까다로웠으나, 블라드 유진은 놀랍도록 침착하게 칼날을 움직였다.

마치 무형의 기운을 눈으로 직접 보고 때려 내는 듯한 느낌이었다.

‘갈수록 패턴이 어려워지는 데다가, 점점 위력이 올라가고 있다.’

놀랍게도 70명의 헌터들은 그의 움직임을 제대로 차단하는 중이었다.

오로지 방어 일변도로밖에 대처할 수 없도록 위력적인 파상공세를 펼친 것이다.

유진은 SS급일 때도 수십 명의 헌터들과 맞붙어 압도한 적이 있었다.

미국과 러시아의 정예 헌터들이 얼마나 허무하게 그의 앞에서 쓰러져 갔던가.

한데, 지금은 그 당시보다 레벨이 거의 두 배나 늘어난 상태임에도 의외의 결과가 나왔다.

“재미있는 현상이로군.”

공격이 무수히 쏟아지고 있었지만, 그의 눈빛은 차분하기 그지없었다.

아니, 되레 주변을 감싼 기묘한 기파(氣波)를 흥미로운 듯이 쳐다보고 있었다.

카가가가강!

소수혈인을 교차하며 무시무시한 속도로 떨쳐 내자, 폭죽을 터트리기라도 한 듯 주황색 불똥이 튀었다.

쇄도해 올 땐 무형의 기운이었지만, 충돌한 이후로는 번쩍이며 진면모를 드러낸 것이다.

화려한 불빛에 시야가 어지러워졌으나, 굳건한 방어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의 뛰어난 기감(氣感)은 눈으로 확인하지 않고도 에너지의 방향을 판별해 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일정한 규칙에 따라 움직이면서 거대한 힘의 흐름을 만들어 내고 있다.’

70명의 습격자가 만들어 낸 합격진(合擊陣)은 EX급 실력자를 잠시 잡아 둘 수 있을 정도로 강력했다.

아마 화룡왕 엔세데스가 이 자리에 있었어도 흥미롭게 합격진을 살펴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본 실력을 꺼내야 할 만큼 귀찮아졌을 뿐이지, 진짜로 블라드 유진의 목숨을 위협할 수는 없었다.

“볼 맛이 있긴 한데, 내가 써먹을 수는 없는 종류로구나. 이 정도면 적당히 잘 논 듯하니, 이제 끝을 내야겠군.”

오로지 소수혈인과 검술만으로 공격을 막아 내던 그는 슬슬 합격진에서 벗어나려 했다.

진법 내부에 몰아치던 힘의 흐름은 확실히 막강한 위력이었다.

섣불리 탈출 시도를 못 할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유진에게는 합격진을 약화할 매우 간단한 방법이 있었다.

‘구성원의 힘을 줄여 버리면 그만이지.’

[‘권능 폭발’로 인해 ‘대군주의 역병’이 EX급으로 적용됩니다.]

[대군주의 역병이 범위 내의 모든 생명체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각각 30%의 스킬 효과 감소와 체력 감소의 저주가 적용됩니다.]

츠츠츠츠! 촤라라락!

EX급으로 적용된 대군주의 역병은 무려 30%의 스킬 효과와 체력을 깎아 버렸다.

그 말인즉, 70명의 습격자가 만든 합격진 또한 30%만큼 약화했다는 사실을 뜻했다.

역시나 그를 향해 쏟아지던 무형의 기운이 상당 부분 줄어든 것이 느껴졌다.

날아드는 공격의 수효뿐만 아니라, 위력마저도 3할 이상 감소한 것이다.

“이제 좀 낫네.”

카강! 카가강!

블라드 유진은 소수혈인을 여유롭게 휘두르며 발걸음을 옮겼다.

이전에는 제자리에 서서 압박을 견디는 것에 그쳤지만, 이제는 꽤 여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었다.

슬쩍 위치를 바꾼 그는 합격진의 오른편에서 에너지를 보태고 있던 습격자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마치 한 몸처럼 움직이고 있었으나, 습격자들은 각각이 엄연하게 다른 개체였다.

어느 한쪽이 뒤틀리기 시작하면, 전체가 어그러지는 건 당연한 일.

유진은 한쪽을 집중 공략함으로써 합격진을 와해해 버릴 작정이었다.

길이만 10m에 이르는 소수혈인이 번득이자, 습격자들의 눈이 크게 치켜 떠졌다.

저 거대한 칼날이 작렬한다면, 적어도 열댓 명은 반 토막 난 채로 죽음에 이르게 되리라.

쉬이이이익!

이윽고 붉은 칼날이 단두대처럼 무자비하게 떨어져 내렸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콰칭―!

날카로운 소음과 함께 소수혈인의 방향이 옆으로 홱 틀어져 버리는 게 아닌가.

손아귀에 찌릿한 통증을 느낀 그는 합격진의 측면을 돌아보았다.

“그래. 언제 움직이나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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