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갑자기 그놈이 뭐? 다시 말해 봐. 이 새끼야.”
대낮부터 사무실에서 위스키를 홀짝거리고 있던 구호국은 인상을 쓰며 이를 드러냈다.
조심스럽게 들어온 부하의 보고가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서슬 퍼런 눈빛이 전신을 훑고 지나가자, 검은 정장을 입은 큰 덩치의 남자가 한차례 몸을 떨었다.
구호국이 저런 표정을 지을 때마다 꼭 사달이 나곤 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성난 회장의 질문에 입을 다물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그랬다간 저 성질머리 더러운 놈이 손에 잡히는 대로 뭔가를 던져 머리통을 맞힐 터.
딱 봐도 지금은 얼음이 반쯤 담긴 술잔이나, 묵직한 재떨이가 날아올 게 뻔했다.
“그, 그것이 더 이상 그 자식에게 뇌물이 먹히지 않습니다. 추가로 케이크 상자 다섯 개를 더 제시했지만…….”
“그만큼 더 얹어 줬는데도 거절했다?”
“예.”
“그 새끼 그거 도박으로 모은 돈 다 날려 먹고, 대출 이자에 허덕거리는 놈 아니었나?”
“그렇습니다.”
“뒷구멍으로 처먹을 궁리만 하는 놈이 깔끔하게 세탁된 뇌물을 거절한다? 이거 말이 안 되는데?”
“그 밑에 김인규라는 7급이 하나 있는데, 그놈도 똑같은 반응이었습니다. 자기들은 손 떼겠다면서, 다시는 연락하지 말라더군요.”
“분명 뭔가 있군. 일단 정보망 최대한 가동해서 무슨 일인지 알아봐.”
“알겠습니다.”
일이 상당히 꼬였지만, 의외로 오늘은 회장의 발작이 이어지지 않았다.
부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황급히 사무실을 나섰다.
그러는 동안 구호국은 온더락에 위스키를 거칠게 부으며 상념에 잠겼다.
“꼼수가 안 통하면, 남은 건 정공법뿐이겠지. 세계 최고의 헌터? 그래 봐야 제깟 놈이 혼자서 별수 있겠어? 크크크!”
성호 그룹 회장은 부하가 갖다 줬던 누텔라 크레페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쓰디쓴 술맛을 중화하는 데에는 단 음식 만한 게 없었다.
그런데 크레페를 씹던 얼굴이 점점 일그러지는 게 아닌가.
삐이이!
호출 버튼을 누른 구호국은 사무실로 들어온 부하가 고개를 숙이기도 전에 접시를 집어 던졌다.
“부르셨……. 으헉!”
휙! 쨍그랑!
접시에 얻어맞지는 않았지만, 부하는 분해된 음식물을 뒤집어쓰고 말았다.
“야, 이 새끼야! 이거 맛이 왜 이래? 상했잖아!”
“죄, 죄송합니다. 다시 해 올리겠습니다.”
작전이 실패했다는 이야기에는 별말 없다가, 엉뚱한 데에서 터지는 성호 그룹 회장이었다.
텅!
씨근거리며 위스키를 벌컥벌컥 들이켜던 구호국은 술잔을 거칠게 내려놓으며 허공을 응시했다.
“감히 날 그따위 눈빛으로 쳐다봐?”
구호국은 요전에 만난 블라드 유진을 떠올리는 중이었다.
제안을 거절하며 잠깐 마주쳤던 시선에는 분명히 경멸의 감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비인가 헌터로 시작한 성호 그룹을 여기까지 끌어 올리면서 구호국은 그와 같은 눈빛을 꽤 자주 접해 왔다.
자신과 비슷한 체급의 사업가들로부터 말이다.
기업의 핵심 인재가 비인가 헌터와 조직 폭력배로 구성되다 보니, 그런 시선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성호 그룹이 이만큼 성장하여 어마어마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면서부터는 완전히 달라졌다.
이제 근본이 양아치라고 욕하기에는 덩치가 너무 커져 버린 것이다.
그런 와중에 며칠 전, 오랜만에 경멸의 눈빛과 마주하게 되었다.
그것도 세력 없이 활동하는 한낱 헌터 놈에게 말이다.
“개자식이 뭐라도 되는 줄 알아? 네놈의 영혼까지 탈탈 털어 주마.”
연신 술잔을 기울이며 독심을 키워 가고 있던 바로 그때였다.
띠디디딕!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 놓았던 휴대 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짜증스럽게 눈살을 찌푸렸던 구호국은 전화를 거절하기 위해서 왼손을 뻗었다.
누가 건 것인지 확인조차 하지 않고서 말이다.
그런데 문득 화면에 찍힌 이름이 우연히 시야에 스쳤다.
“음? 오호! 이 사람 봐라?”
* * *
허가가 난 이후로 유진종합건설의 베이스캠프는 활기를 되찾았다.
이제 전선 장벽이 건설되기를 기다렸다가, 공략을 재개하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물론 장벽의 건설 속도는 엄청났기에, 공략대는 이내 개성을 향해서 북진할 수 있었다.
“가는 길에 성체 미궁이 셋, 대성체 미궁이 하나 있더군요. 차례로 정리하면 될 것 같습니다.”
유진이 잘 볼 수 있도록 지도를 펼친 도형욱은 시원시원하게 설명을 이어 갔다.
그의 무력도 확인했고 거리낄 것이 없어졌으니, 공략에 자신감이 붙은 것이다.
한데, 아직도 공략대는 83명 그대로였다.
압도적인 블라드 유진의 활약을 보았다면, 단기 계약직 헌터들은 싹 쳐 내도 이상할 게 없었다.
하지만 도재한 사장은 그들을 내보내지 않고, 일차적으로 계약한 개성 공략까지는 함께하기로 했다.
원래라면 거기까지 진행하고 인원을 충원하며 재계약할 계획이었으나,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유진 혼자서도 공략 가능함을 확인했으니까.
개성까지 같이 가는 것은 도의적인 측면에서 한 결정이었다.
“슬슬 시작하지.”
“예, 부탁드립니다.”
“방해되니까 얼쩡거리지 말고 저쪽으로 빠져 있어.”
“혹시 모르니 힐러 한 명은 배치하는 게…….”
“필요 없다.”
“아, 넵.”
도형욱은 유진의 말에 그대로 고개를 숙였는데, 마치 진 연합체의 부하들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공략대장이라며 쓸데없이 주도권 싸움 같은 헛짓거리를 완전히 배제한 채, 고분고분 잘 따랐다.
그냥 이름만 보고 뽑은 거였는데, 의외로 유진종합건설은 그의 마음에 드는 편이었다.
‘레니의 선택이 제대로 적중한 건가.’
물론 세계 최고의 헌터로 인정받는 유진을 섣불리 통제하려는 곳은 거의 없을 터였지만.
쉬익―! 두두두두두!
녹턴을 타고 성체 미궁을 향해서 쏘아져 나가던 블라드 유진은 공략대를 힐끔 돌아보았다.
그들은 엄청난 속도로 전진하는 그의 뒷모습을 멀뚱멀뚱 바라보고 있었다.
유진이 혼자서 다 하는 장면을 구경이나 하려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가만히 놀게 놔둘 마음이 전혀 없었다.
“잔반 처리 정도는 남겨 둬야겠지.”
그는 오염 지대 주변의 몬스터들을 일절 건드리지 않고, 그대로 성체 미궁에 진입했다.
스윽!
블라드 유진이 사라지자, 뒤에 남겨진 공략대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원래대로라면 주변의 몬스터를 얼추 정리한 다음에 진입해야 했다.
미궁이 정화되면, 잔여 몬스터들이 와르르 쏟아져 나올 테니까.
하지만 그는 표면이 이글이글 불타는 육각 기둥으로 혼자 쏙 들어가 버렸다.
“잠깐만요. 이거 설마…….”
뭔가 이상함을 감지한 도형욱은 손을 펼쳐 보이며 웅성거리는 대원들을 조용히 시켰다.
그러자 몇몇 헌터들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는지, 공략대장 대신에 한 마디씩 의견을 내뱉었다.
“원래 저분 전문이 들어가서 최종 보스만 따고 나오는 거 아니었나? 지금처럼 아무것도 안 건드리고 미궁으로 들어가신 거라면…….”
“남은 건 우리가 알아서 처리하라는 의미 같은데?”
유진종합건설의 완전 고용 헌터들의 의견에 도형욱은 심각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그들의 말이 옳은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미궁이 정화되기 전에 주변 몬스터를 제거해야 합니다. 다들 전투 준비하세요!”
공략대원들은 빠르게 진형을 갖추며 오염 지대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도형욱 부사장의 외침에서 진지한 다급함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도 설마 단번에 성체 미궁을 터트리겠냐는 생각이 머릿속 한구석에서 스멀스멀 올라왔다.
하지만 자신들의 판단이 옳았단 사실을 확인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쿠구구구구구!
블라드 유진이 들어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성체 미궁 붕괴 현상이 나타났으니까.
“이런 미친! 말이라도 해 주고 출발했어야지!”
도형욱을 비롯한 공략대원들은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미친 듯이 몬스터들을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 * *
‘의외로 잘하는군. 좀 더 속도를 높여도 되겠어.’
첫 번째 성체 미궁을 반나절도 되지 않아서 공략한 유진은 공략대를 잠시 지켜보았다.
그들은 한창 미궁이 정화되면서 쏟아져 나온 이블 빅혼(Evil Bighorn) 무리와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이블 빅혼은 마치 검붉은 양처럼 생긴 몬스터였다.
전체적인 생김새가 양을 닮았을 뿐, 놈들은 결단코 온순하지 않았다.
대략 4m쯤 되는 신장에 이족 보행을 하고, 거대한 낫이나 망치를 들고 떼 지어 다니는 괴물.
그게 바로 이블 빅혼의 진면모였으니까.
“크와아악!”
콰직―! 쿠웅!
미궁이 정화되어 정신이 없을 텐데도, 녀석들은 순식간에 무리를 구성하고 공략대에 대항하기 시작했다.
몇 마리씩 뭉쳐 다닐 때는 사냥하기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무리 규모가 수백을 넘어가자, 공략대는 좀처럼 승기를 잡을 수가 없었다.
이블 빅혼 무리의 조직력이 상당했기 때문이었다.
비등비등한 전황에 한 번쯤 지원해 줄 만도 하건만, 블라드 유진은 단호하게 방향을 틀었다.
‘힐러가 있어서 결국에는 이길 거다. 난 다음 장소에 가 있어도 돼.’
거금을 주고 영입했다던 힐러의 존재 덕분에 전투 유지력은 공략대가 훨씬 뛰어났다.
일격에 죽지만 않으면, 금방 회복하고 다시금 전력에 보탬이 될 수 있으니까.
결국에 먼저 쓰러지는 쪽은 이블 빅혼 무리가 될 터였다.
다그닥! 다그닥!
녹턴을 타고 유유자적 날아가던 그는 두 번째 목표 근처에서 이동을 멈췄다.
이대로 곧장 정화 작업에 들어간다면, 하루에 두 개의 미궁을 처리하게 되는 것이다.
공략대가 소화하기에는 상당히 빠른 속도였지만, 유진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곳에서 시작될 몬스터 웨이브는 혼자서 깡그리 도륙해 버릴 예정이었으니까.
그런데 문득 그런 그의 감각에 익숙한 반응이 감지되었다.
두둥! 두둥!
“이건……. 분화로군.”
프랑스 몽펠리에 인근에서 보았던 것처럼 개성 인근의 대성체 미궁 또한 분화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마기가 누적되어 최종 보스가 만들어지고, 그로 인해 새로운 성체 미궁이 탄생하는 현상.
조만간 저 거대한 육각 기둥에서는 마기의 덩어리가 발사될 예정이었다.
마치 미궁의 파편처럼 어디론가 날아가 또 다른 성체 미궁이 될 터였다.
물론 일반적인 미궁의 파편보다는 덩치가 훨씬 커서, 생성하는 오염 지대의 범위도 어마어마할 것이다.
‘여기보단 저기가 우선이다.’
분화 징조를 확인한 블라드 유진은 곧장 녹턴을 이끌고 대성체 미궁으로 접근했다.
어차피 거리가 그리 멀지 않았기에, 그는 목적지까지 순식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대성체 미궁이라. 한국에서는 별로 못 본 것 같은데.”
일반적으로 대규모 미궁의 근처에는 대성체 미궁이 잘 나타나지 않았다.
성체 미궁들이 성장할 마기를 대규모 미궁이 모조리 장악해 버리기 때문이었다.
드라코 도무스가 정화됨으로써 되레 대성체 미궁 발생 빈도가 올라간 것이다.
엔세데스라면 고가의 재료를 드랍하는 몬스터가 나올 확률이 생겼다면서 좋아하겠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유진종합건설의 목표는 새로운 땅을 개척하고, 개발 우선권을 따내는 것이니까.
스윽!
그는 꿈틀거리며 분화 중인 대성체 미궁으로 진입해 보았다.
어두컴컴한 붉은 하늘과 끝없이 펼쳐진 시커먼 대지는 마치 드라코 도무스를 연상케 했다.
두두두두두!
녹턴을 타고 허공을 질주하던 유진은 꽤 시간이 흐른 뒤에야 분화 중인 최종 보스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번 대성체 미궁의 내부는 생각보다 훨씬 넓은 데다가, 독특한 녹색의 마기로 가득했기 때문이었다.
‘짙은 독기(毒氣)로 인해 기운을 읽을 수 없었던 거로구나.’
스이잉! 처적!
그는 소수혈인을 뽑아 들며 녹턴의 등에서 뛰어내렸다.
최종 보스가 분화하기 전에 모가지를 따 버릴 요량이었다.
분화가 끝나고 한 놈이 어디론가 멀리 발출되어 버리면, 상당히 귀찮아질 테니까.
그런데 문득 최종 보스에게로 접근하던 블라드 유진의 감각에 의외의 움직임이 감지되었다.
‘음? 저놈들은 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