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아, 아닙니다. 그럴 리가요. 하하! 뭔가 착오가 있었던 게 분명합니다. 최대한 빨리 정상화될 수 있도록 조치하겠습니다.”
의문의 전화를 받은 장진석 대통령은 당황한 듯, 말까지 더듬으며 변명했다.
마침 회의를 위해서 청와대로 올라온 이상식 협회장이 그 모습을 보고 의문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대체 누구기에 일국의 대통령이 저런 모습을 보이게 했는지, 너무도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장진석의 떨리는 입가를 보자, 섣불리 질문을 던질 수가 없었다.
뭔가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늘 회의가……. 지원안을 조정하고 특수본에 힘을 더 실어 주기 위함이었지요?”
장진석 대통령은 번들거리는 눈빛으로 탁자 위에 놓인 개선안 자료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눈치를 보던 이상식 협회장이 얼른 설명했다.
“아무래도 비협조적인 기업이 많다 보니, 보상을 좀 더 늘릴까 하고 있었습니다. 행정 지원 및 정보 제공도 팍팍 해 주고요.”
“그 지원 사업, 전부 미궁 개발 특수본에서 하고 있지요?”
“예, 그렇습니다.”
“거기 지금 허가 담당자가 누구요?”
“어…….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협회 산하에 설치되었지만, 미궁 개발 특수본부는 전원 국가직 공무원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상식이라고 해서 특수본에 누가 배치되었는지 바로 알 수는 없었다.
휴대 전화를 켠 협회장이 빠르게 자료를 검색하고 있을 때, 옆에 조용히 앉아 있던 단신의 남자가 입을 열었다.
“강지섭 사무관입니다.”
짧은 머리에 금테 안경을 쓴 유승일 비서실장이었다.
장진석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으로 말했다.
“혹시 보고 계시는 게 특수본 조직도입니까?”
“넵.”
“본부장이 아마…….”
“전민성 본부장입니다.”
“후우! 통화 좀 해야겠습니다.”
긴 한숨을 내쉰 대통령은 비서실장을 향해서 오른손을 내밀었다.
어서 전화를 걸어 보라는 의미였다.
항상 점잖게 부탁하던 평소와 전혀 다른 모습에 유승일 비서실장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불현듯 찾아온 긴장감에 가슴을 졸이면서도 그는 미궁 개발 특수본부장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뚜르르르르! 달칵!
신호음이 몇 번 가기도 전에 통화가 연결되었다.
대통령 비서실장이 건 것이다 보니, 전민성 본부장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전화를 받았다.
―안녕하십니까? 비서실장님, 잘 지내시죠?
“안녕 못 하고, 잘 못 지내고 있습니다만.”
―예?
“다시 말해 줘야 합니까? 그쪽들 덕분에 잘 못 지내고 있다고요.”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아니, 그보다 실장님 목소리가 아닌데 대체 누구시죠?
전민성의 불쾌한 음성이 휴대 전화에서 흘러나오자, 회의실에 앉아 있던 모든 사람이 꽝꽝 얼어붙고 말았다.
냉각된 분위기에 아무도 말을 하지 못하고 있던 바로 그 순간, 장진석 대통령이 대뜸 사자후를 내질렀다.
“야이! 쓸모없는 자식들아! 대체 일 처리를 어떻게 하는 거야!”
* * *
“음흠흠. 흠흠.”
미궁 개발 특수본부 사무실에 앉아 있던 강지섭 사무관은 오늘따라 기분이 좋은지 콧노래를 불러 댔다.
최근에 아주 큰 건을 손도 안 대고 날름함으로써 뒷주머니가 두둑해졌기 때문이었다.
“그래. 이런 날도 있어야지. 언제까지 월급만 받아먹고 살 거야?”
지옥 같은 행정 고시를 통과하고 5급 사무관이 되었지만, 강지섭의 형편은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사실 공무원 월급이라는 게 뻔하지 않은가.
머리털 빠지게 공부해서 얻은 게 고작 300만 원 남짓의 월급이라니.
업무가 쌓이기라도 하는 날에는 일이 하기 싫어 죽을 것 같았다.
“이러니 공무원들이 일 안 한다는 소리가 나오지. 빡세게 하면 뭐 합니까? 그만한 보상이 없는데. 안 그래요?”
“하하! 그럼요.”
“담배나 한 대 할까요?”
“예, 그러시죠.”
강지섭의 말에 부하 직원 하나가 동조하며 나섰다.
최근 미궁 개발 특수본 내부에 떠도는 은밀한 떡고물을 함께 받아먹은 7급 김인규 주사보였다.
나이가 강지섭과 비슷한 데다가 죽이 잘 맞아서 매일같이 붙어 다니고 있었다.
둘 다 호봉 몇 방울 묻지 않은 30대 공무원이었지만, 정장과 시계는 꽤 이름 있는 명품이었다.
금수저가 아닌 이상에야 애 딸린 공무원이 직장에 하고 다닐 수준은 아니었다.
평범한 외투로 가려 놓았지만, 눈썰미 있는 사람은 금방 알아보고 의문을 가질 테니까.
바깥으로 나온 두 사람은 담배를 피우며 은밀하게 대화를 나눴다.
사무실에서와는 달리, 강지섭은 표정과 말투를 싹 바꾸며 목소리를 낮췄다.
“슬슬 조심해야겠어. 주변 시선이 예사롭지 않아.”
“이번에 받은 것들은 중고로 내다 팔아 버릴까요? 아예 현금화해 놓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아니, 일단은 짱박아 둬. 오늘 받은 거라 입고 오긴 했지만, 내일부터는 이러면 안 돼. 알지?”
“에이! 사무관님, 원데이 투데이 합니까? 척하면 척이죠.”
“그래. 오늘은 외근 갔다가 일찍 퇴근하자고. 남들 눈에 띄어서 좋을 건 없으니까.”
“예, 마침 연천에 갈 일이 있잖습니까? 거기 들렀다가 오면, 무조건 종일입니다. 지금 출발해도 될 정도죠.”
“그래? 그럼 본부장님께 보고 올릴 테니까, 바로 가지.”
“알겠습니다.”
작당 모의를 마친 강지섭과 김인규는 담배를 비벼 끄고 사무실로 올라갔다.
그런데 이게 웬걸?
본부장실에서 난데없이 큰 소리가 터져 나오는 게 아닌가.
우당탕탕!
뭔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당황한 직원들의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마침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던 두 사람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죠?”
“그러게. 갑자기 뭔 일이지? 일단 가 보자고.”
“예.”
그런데 사무실 문 앞에 도착했을 무렵, 강지섭의 휴대 전화가 요란하게 울려 댔다.
띠리리릭! 띠리리릭!
평소와 다름없는 벨 소리였지만, 오늘따라 왠지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문득 화면을 확인해 보니, 전민성 본부장의 이름이 찍혀 있었다.
“쯥!”
불편한 표정으로 짧게 입맛을 다신 강지섭은 잠깐 그대로 멈춰 있다가 발걸음을 옮겼다.
전화를 받는 대신 본부장실로 곧장 들어가는 것을 택했다.
똑똑!
“누구야!”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날카로운 음성이 들려왔다.
전민성 본부장의 오늘 기분은 확실히 저기압인 듯했다.
그래도 들어가지 않을 수는 없었다.
저렇게 길길이 날뛰는 상관의 전화를 피하고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간 큰 후환이 있을 테니까.
아무것도 모르는 것보다야 무슨 일인지 알아본 다음, 필요하면 얼른 수습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저 강지섭입니다. 바로 앞에 있어서…….”
“들어와.”
“예.”
덤덤한 표정으로 문을 열고 들어가자, 난장판이 된 본부장의 책상이 가장 먼저 보였다.
홧김에 전화기와 함께 집기들을 냅다 집어 던진 모양이었다.
원래도 불같은 성격이긴 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강지섭을 본 본부장은 살기등등한 눈빛으로 으르렁거렸다.
당장이라도 잡아먹을 것 같았으나, 화를 억누르는 듯 말은 또박또박하고 있었다.
“너 유진종합건설 허가 건 알아?”
“예? 아, 네. 제 담당입니다.”
“그거 왜 허가 안 내 주고 일 질질 끌었어? 분명 대통령 지시로 수주 업체에 지원을 아끼지 말라고 했는데 말이야.”
“아, 그거요? 하하! 난 또 왜 화가 나셨나 했네요. 별거 아닙니다. 공략이 너무 급하게 돌아가는 것 같아서 조절 좀 하라고 반려했을 뿐입니다. 그러다 사고 나면 어쩐답니까?”
“제반 서류나 조사에서 미비한 점이나 문제가 발견된 게 아니고?”
“진척도가 너무 빨라서 날림 공사 의혹이 있습니다. 그것도 문제라면, 문제일 수 있지요.”
“날림 공사?”
“네, 김인규 씨가 가서 확인하고 왔습니다.”
“하…….”
전민성 본부장은 긴 한숨을 내쉬더니, 이윽고 이마를 짚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지는 걸 보면,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만 같았다.
강지섭은 뭔가 일이 잘못되었음을 느끼고 눈알만 뒤룩뒤룩 굴렸다.
“야! 이! 육시를 할 새끼야! 내가 지금 누구 전화를 받았는지 알아?”
한 자 한 자 끊어서 소리치는 전민성의 음성에는 마치 깊은 내공이 담겨 있는 것만 같았다.
큰 소리에 깜짝 놀란 강지섭은 억울한 표정으로 양손을 번쩍 들었다.
“예? 예?”
“너 뒈지기 싫으면, 당장 허가 내. 내가 직접 하기 전에 네놈 손으로 해결하라고!”
“아니, 그게 무슨……. 졸속으로 허가를 해 주란 말입니까?”
“내가 확인했을 때, 졸속 아니면 어떡할래? 네가 책임지고 옷 벗으실래요? 강, 지, 섭! 사무관님?”
전민성이 가슴을 쿡쿡 찌르며 소리를 지르자, 강지섭은 잔뜩 주눅 든 표정으로 답했다.
일단 꼬리를 내리기는 하지만, 그래도 알 건 알아야겠다는 태도였다.
“아닙니다. 한데, 대체 누구한테서 전화 왔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허! 그건 또 궁금한가 보지?”
“하하. 그래야 뭔가 일하는데, 동기도 생기고 그러지 않을까요?”
“그깟 허가서 내 주는 게 무슨 일이라고. 오냐. 대답해 주마. 대통령 각하께서 직접 전화하셨다. 네놈 이름 석 자 정확하게 말씀하면서, 왜 일을 그따위로 하냐고 하시더라.”
“예에?”
“너 올해 딱 11년 차지? 4년 안에 4급 되기는 글러 먹었다. 이때까지 근평 쌓은 거 다 날리게 됐어.”
“어…….”
청천벽력 같은 본부장의 말에 강지섭은 얼어붙은 채로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생각보다 일이 너무 커진 데다가, 자신이 다 뒤집어쓰게 생겼기 때문이었다.
* * *
“버, 벌써 된 겁니까?”
“그래. 가서 확인해 봐.”
초조하게 기다리던 도재한 사장은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블라드 유진을 바라보았다.
자신은 어떤 인맥을 동원해도 소용이 없었는데, 그는 단 한 방에 성공한 것이다.
그것도 고작 몇 시간이 지나지도 않았건만, 이렇게 일이 해결되었다니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도재한은 얼른 허가 담당관과 통화해 보고 난 뒤,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예? 허가가 났다고요? 갑자기?”
―아, 예. 저희 쪽에서 착오가 있었던 거 같습니다. 제출하신 대로 전선 작업 끝나면, 곧바로 공략 들어가십시오.
“아까는 안 된다면서요?”
―착오가 있었다고 했지 않……. 그게 저희 직원이 보고를 잘못 올렸습니다.
살짝 부아가 치민 듯한 목소리로 말하려던 허가 담당관은 이내 말투를 나긋나긋하게 바꾸었다.
앞뒤 꽉 막힌 젊은 꼰대 같던 강지섭의 태도는 이제 도저히 찾아볼 수가 없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그대로 진행하죠.”
―예, 예.
뚝.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전화를 끊는 개 같은 버릇은 여전했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건지 이해할 수 없었던 도재한은 궁금증 가득한 눈빛으로 유진을 쳐다보았다.
“허, 허가가 났답니다. 이게 어찌 된 건지. 참……. 허허! 대체 누구한테 전화하면 이리되는 겁니까?”
상당히 껄끄러운 질문이었으나, 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답했다.
“대통령.”
“…….”
도재한을 비롯한 공략대원들은 눈을 크게 뜨며 서로를 돌아보았다.
그들은 블라드 유진이 전화로 무슨 말을 했는지 다 듣고 있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