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엔세데스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스터들 리자드의 머리통을 후려쳤다.
몸길이 8m짜리 이 거대 도마뱀은 목 주변에 활짝 펼쳐지는 프릴(Frill)이 달려 있었다.
저 피막을 부풀리며 상대를 놀라게 함과 동시에 독액을 내뿜는 성가신 몬스터였다.
화룡왕은 미궁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녀석들이 나올 때마다 연신 기절시키는 중이었다.
콰앙!
방금도 엔세데스는 머리통을 후려갈겨서 한 녀석을 혼절시킨 다음, 옆으로 툭 던졌다.
그곳에는 수많은 스터들 리자드가 쌓여 있었는데, 문득 누군가가 사체 더미에서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그자는 놀랍게도 시뻘건 피로 칠갑을 한 전시영이었다.
“엉? 네가 왜 여기 있어? 어디 건설사랑 뭔 개발한다고 안 했나?”
“그러고 있어. 현재는 개발 중이라, 잠시 공략이 멈춘 거고. 근데 지금 이게 뭐 하는 거지?”
“효율적인 사냥? 얘네는 산 채로 프릴을 잘라야 상품성이 있거든. 안 그러면 쭈글쭈글해서 아무도 안 사가. 대신에 온전한 프릴은 구하기가 어려워서 엄청나게 비싸지. 흐흐!”
그녀는 그를 데리고 옆쪽으로 이동하더니, 수십 개의 빨랫줄을 보여 주었다.
큼지막한 나무에 설치한 줄에는 스터들 리자드의 온전한 프릴이 수도 없이 널려 있었다.
여긴 마기 때문에 벌레가 없으니, 가죽 같은 걸 말리는 데 최고의 장소였다.
“얼추 정리되면, 가지고 가서 팔고 다시 돌아오는 거지. 그럼 저 안에서 도마뱀 녀석들이 왕창 기어 나와 있다고.”
―이런 게 바로 화수분이지. 으하하하!
전시영과 엔세데스는 한마디씩 하며 자신들의 사업을 자랑했다.
스터들 리자드 같이 강력한 몬스터를 오랫동안 기절시키기란, 어렵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녀석들의 프릴은 고가의 아이템 재료라서 날개 돋친 듯이 팔려나갔다.
두 사람은 그야말로 돈을 갈퀴로 쓸어모으는 중인 것이다.
―이제 나오는 속도가 너무 느려졌군. 마기의 농도도 확실히 하락했어.
“오늘은 이 정도로 하고 이제 팔러 가자. 마침 유진도 왔으니, 우리가 어떻게 하는지도 보여 주고 말이야.”
―크흐흐! 깜짝 놀랄 거다. 따라와.
화룡왕은 마법을 부려 스터들 리자드의 프릴을 한꺼번에 거둬들이더니, 공간 확장 주머니에 꽉꽉 눌러 담았다.
그러고는 미궁 근처의 위장막을 들추고, 시커먼 물체의 뚜껑을 여는 게 아닌가.
드르륵!
엔세데스는 공간 확장 주머니 몇 개를 집어넣더니 사람 형상으로 변하며 상부 해치를 통해 쏙 들어갔다.
텅텅!
“어때? 죽여주지 않아?”
전시영은 오프로드 차량 몇 대를 합쳐 놓은 듯한 크기의 쇳덩이를 두드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이건 뭐지?”
“장갑차야. 에너지 코어 파워팩을 탑재한 K808, 쓸 만한 녀석이지.”
유진종합건설에서도 오프로드 차량 대신, 장갑차를 활용하려 했다.
아무래도 완전한 미개발 지역인 마기 오염 지대로 들어가야 하다 보니, 장갑차가 훨씬 유용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가용 대수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반려되었다.
일반적인 경로로는 구할 수 없었을 테지만, 전시영의 위치라면 한두 대쯤은 빼낼 수 있었을 터였다.
물론 유진 또한 그 정도 능력은 있었다.
전화 한 통이면 장갑차 따위야 수백 대라도 갖다 줬을 것이다.
유진종합건설을 위해서 그렇게까지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에 가만히 있었지만.
“타.”
전시영이 후면 해치를 열고 손짓하자, 그는 장갑차 안쪽을 구경하며 올라탔다.
기이이이잉!
17.5t짜리의 큼지막한 쇳덩이였지만, 에너지 코어 파워팩의 힘은 엄청났다.
이런 야지에서도 눈앞의 모든 것을 마구 짓밟으며 이동하는 괴력을 보였다.
쿠르르르르!
“플렉스 하러 가즈아아!”
“가즈아아!”
세 사람을 태운 K808은 남동쪽으로 쭉 이동하더니, 대뜸 강물로 뛰어들기 시작했다.
워터젯 추진을 이용한 수륙 양용이 가능한 장갑차였기에, K808은 물 위에 떠서 손쉽게 도하를 마쳤다.
“저쪽으로 가면, 다리가 있는데 굳이 강을 건너온 이유가 뭐지?”
“귀찮잖아. 요즘에 저쪽 절차가 되게 까다로워졌더라고. 일반 헌터들은 접근도 못 하게 해.”
“음. 그렇군.”
아무래도 미궁 개발 지원안 때문에 통일대교를 막아 둔 듯했다.
흥미로운 눈으로 내부를 살펴보는 사이, 장갑차는 금세 목적지에 도착했다.
기이이이잉! 척!
에너지 코어 파워팩 특유의 소음이 멈추자, 엔세데스는 후면 해치를 발로 차며 밖으로 나갔다.
“내가 돌아왔다!”
그러자 K808을 둘러싼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미친놈처럼 호기롭게 소리치는 화룡왕을 따라서 내리자, 유진은 이곳이 어딘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파주로군.”
“맞아. 여긴 경계 지역 시장이 있거든.”
척! 척!
엔세데스와 전시영은 싱글벙글한 얼굴로 공간 확장 주머니들을 어딘가로 옮겼다.
아마 주로 거래하는 상점이 있는 모양인지, 두 사람의 움직임에는 거침이 없었다.
그들이 사라지자, 장갑차를 구경하던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이런 장갑차를 대체 어디서 구했지? 일부러 시커멓게 도색 한 거 봐. 죽이지 않냐? 좀 만져 볼까?”
“아서라. 괜히 건드렸다가 저 매드 맥스 듀오한테 얻어터져. 지난번에 비인가 헌터가 시비 걸었다가 거의 반병신 된 거 못 봤냐?”
“아, 통천파 그 자식들? 어차피 진 연합체에 밀리기 직전이었잖아.”
“반격 준비한다고 떠들썩했는데, 매드 맥스 듀오한테 털려서 그대로 끝장났지.”
“쟤네가 가져오는 재료 가격이 장난 아니라며? 아예 시장을 뒤흔들 정도라던데.”
“요즘에 생산직 헌터들 노난 거 안 보이냐? 희귀 재료들 왕창 들어왔다고 온갖 아이템 다 만들고 있단다.”
장갑차에 기대 있자니, 여러 다양한 정보가 귀에 흘러들어 왔다.
자기들 딴에는 소곤거리는 목소리였겠지만, 유진의 예리한 감각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의외로 잘 적응하는 모양이로군. 돈도 꽤 버는 듯하고. 구경은 이 정도면 되겠어.’
스윽!
그는 화룡왕과 전시영이 돌아오기 전에 암흑화로 모습을 감춘 뒤, 경계 지역 시장을 떠났다.
두 사람의 명성이 워낙 대단해서 그런지, 장갑차를 건드리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 * *
“아니, 지금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립니까? 건설 허가가 나지 않는다니요!”
한 통의 전화를 받은 유진종합건설 사장 도재한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크게 소리 질렀다.
―진척 속도가 너무 빠릅니다. 이런 식의 날림 공사와 졸속 공략은 허가해 줄 수가 없어요.
휴대 전화를 통해 들려오는 심드렁한 음성에 도재한은 이를 악물었다.
대체 어떻게 따낸 수주인데, 개성도 못 가서 멈춰야 한단 말인가.
블라드 유진이라는 전설적인 인물을 영입했는데, 고작 3천 헥타르만 확보하고 끝낼 수는 없었다.
적어도 개성 북서쪽의 해주까지는 밀고 가야 유진종합건설이 도약할 기반이 되어 줄 터였다.
“자, 잠깐만요. 진척 속도가 빠르다니요? 우린 전선 구축 때문에, 일부러 공략을 멈춘 상태란 말입니다.”
―아, 글쎄 그건 제가 알 바 아니고요. 상식적으로 무슨 하루 만에 공략 끝났다면서, 중장비 동원하는 데가 어디 있어요? 다른 지역은 아직 손도 못 댔는데.
“그렇게 못 믿으시면, 직접 가서 확인해 보십시오! 그러면 공략 진척 현황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아, 진짜. 바빠 죽겠는데……. 사람 보낼 테니까 좀 기다려 보세요. 결정은 보고 받으면 그다음에 하겠습니다.
“아,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언성 높여서 죄송합니다. 담당관님.”
젊은 놈이 싹수없게 구시렁대고 있었지만, 거기다 대고 화를 낼 수는 없었다.
상대는 미궁 개발 지원안의 원활한 전개를 위해서 특별 임명된 담당 허가권자기 때문이었다.
이자에게 밉보였다가는 기껏 품을 들인 사업을 날려 먹을 수도 있었다.
북한 땅이라는 특수성을 감안하여 새로 만든 부서라 그런지, 행정 체계가 이상하게 잡혀 있었다.
일을 빨리 진행하기 위해서라지만, 일개 공무원에게 너무 많은 권한을 준 것이다.
―그냥 일하는 건데, 뭘 감사까지야. 끊습니다.
뚝.
“이런 미친 새끼가!”
도재한은 전화가 끊어지고 나서야 욕지거리를 크게 내뱉었다.
시뻘게진 얼굴에 충혈까지 된 눈을 보아하니, 열이 머리끝까지 뻗친 모양이었다.
솔직히 그럴 만도 했다.
대통령이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했는데, 며칠이나 지났다고 이딴 갑질이라니.
숨을 씩씩거리던 도재한 사장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며 주섬주섬 서류를 챙겼다.
텅! 부르릉!
그러더니 곧장 차에 타서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그 고급 인력들을 놀리고 있을 수는 없지. 할 수 있는 모든 걸 해 보자.”
뚜르르르! 달칵!
―여보세요?
“안녕하십니까? 선배! 저 도재한입니다.”
―이야! 바쁜 사람이 이 시간에 전화를 다 해 주고. 갑자기 무슨 일이야. 한창 일할 때 아닌가? 큰 건 하나 따냈다고 들었는데.
“아, 예. 그게 말이죠.”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선배는 알아보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도재한은 본인의 인맥을 총동원하여 미궁 개발 지원안 허가 담당관을 옭아매려 했다.
전방위적인 압박이 이어지면, 한낱 공무원이 뭘 어쩔 수 있겠는가.
하지만 상황은 도재한 사장이 생각한 것과는 영 딴판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뚜르르르! 달칵!
“예, 선배님.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 일단 관련 부서에 말해보긴 했는데, 거기가 건드리기 좀 어려운 곳이라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대통령 직속인 데다가, 헌터 협회하고 협업하는 부서라 영 씨알도 안 먹히네. 자네도 알잖나. 요즘에 거기보다 파워 센 데 있어?
“허…….”
미안한 기색이 역력한 선배의 말에 도재한은 공허한 헛웃음만 지을 뿐이었다.
―뭐가 좀 꼬인 모양인데, 찾아가서 좋게 풀어 봐. 예전에 네가 도움 참 많이 줬는데, 필요할 때 제 역할을 못 해 줘서 미안하다.
“아닙니다. 선배. 또 연락드릴게요.”
―그래. 수고해.
뚝. 뚜르르르!
선배와의 통화가 끝난 이후로 도재한 사장은 여기저기 계속 전화를 걸어보았다.
인맥을 최대한 끌어모아서라도 어떻게든 허가를 받아 볼 작정이었다.
하지만 누구도 도움을 주겠다는 사람이 없었다.
그만큼 작금의 미궁 개발 특수본부는 무소불위의 권력이 집중된 부서기 때문이었다.
“젠장, 어쩔 수 없지. 선배 말씀대로 찾아가 보기라도 하자.”
자유로를 타려던 도재한은 방향을 꺾어 곧장 헌터 협회로 향했다.
미궁 개발 특수본부가 바로 그곳에 설치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도재한 사장은 사무실 내부에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입구에서 차단당해 버렸다.
“여기부터는 못 들어가십니다.”
“예?”
“기밀 유지가 필요한 장소라서요. 부서 사람을 만나러 왔으면, 전화로 불러내십시오.”
“아, 알겠습니다.”
경호원에 의하여 내몰린 도재한은 얼른 담당관에게 전화를 걸어 보았다.
하지만 되돌아온 건 차디찬 냉대뿐이었다.
―대통령 각하 지시로 청탁 금지된 거 모릅니까? 괜히 만났다가 문제 되면, 책임지실 거예요? 아니, 책임을 질 수나 있으세요?
“아, 아닙니다.”
―결과 나오기 전에는 연락하지 마십시오.
“예.”
뚝. 뿌드득!
담당관과의 전화를 끊은 도재한 사장은 이를 갈며 눈을 질끈 감았다.
속으로 화를 삼키는 듯한 모습이었다.
“이것 좀 드시면서 근무하십시오.”
이내 도재한은 차에서 가져온 비타민 음료수 박스를 경호원에게 건넸다.
협회를 나선 도재한은 자유로를 타고 북진하여 곧장 통일대교를 지났다.
그러자 그나마 깔끔하게 정리된 비포장도로와 함께 한창 건설이 진행 중인 전선이 눈에 들어왔다.
흙과 자갈이 튀어서 차가 엉망이 되었지만, 도재한 사장은 아랑곳하지 않고 베이스캠프를 찾았다.
굽이치는 길을 따라 한참을 들어가자, 드디어 공략대의 베이스캠프가 나왔다.
끼익! 텅!
그런데 문득 처음 보는 젊은이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차에 타고 있는 것이 아닌가.
베이스캠프에 외부인이 있을 리 없으므로 저자는 분명 특수본부에서 보낸 공무원이리라.
도재한은 황급히 그 사람에게 달려가며 손을 흔들었다.
“이, 이거 어떻게 되었습니까?”
“예?”
“파견 나오신 거 아니에요?”
“그런데요?”
“저 유진종합건설의 도재한 사장입니다. 공략 제대로 된 거 확인하셨죠? 전선 건설도 착실히 진행 중인데…….”
“저야 보고서만 올릴 뿐인데요. 결과는 저도 모릅니다.”
“모쪼록 확인하신 대로 정확하게 보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예, 뭐 그러죠.”
텅! 부우웅!
직원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베이스캠프를 떠났다.
그런데 차량이 통일대교를 지나기도 전에 허가 담당관에게서 전화가 오는 게 아닌가.
―부실 공사 정황이 확인됐고요. 허가는 반려 처분합니다.
“아니, 지금 그게 무슨 말입니까? 아직 기반 공사도 안 했는데, 날림 공사라니요?”
―예, 전부 시정하고 다시 신청하십시오.
뚝.
담당관은 자기 할 말만 하고 전화를 끊어 버렸다.
“으아아악!”
그러자 스트레스가 한계에 달한 도재한 사장은 괴성을 빽 지르고 말았다.
한데, 문득 지척에서 누군가의 음성이 들려오는 게 아닌가.
“무슨 일이지?”
퍼뜩 고개를 돌려 보니, 신비로운 조각상 같은 은발의 미남자가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엔세데스와 전시영이 뭘 하는지 확인하고 돌아온 블라드 유진이었다.
잠깐 생각에 잠겼던 도재한은 한숨을 쉬며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고용 헌터에게 할 만한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지독한 답답함을 아무에게라도 털어놓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자 유진은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휴대 전화를 꺼내더니,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뚜르르르! 달칵!
“일 똑바로 안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