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으으……!”
도재한은 댕댕 울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대체 어떤 뿅망치에 얻어맞으면 북 터지는 소리가 나고, 사람이 기절할 수 있단 말인가.
도재한 사장은 마지막으로 시야에 들어왔던 두 백인 여성과 흑발 소녀를 떠올리며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처음에는 그저 아름답기만 한 미녀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뿅망치를 든 악마였던 모양이었다.
“정신이 좀 드십니까?”
“헉? 아, 변호사님이셨군요.”
문득 곁에서 웬 목소리가 들려오자, 깜짝 놀랐던 도재한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이 방에 같이 있는 사람이 무시무시한 세 여자가 아니라, 조낙범 변호사임을 뒤늦게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조낙범 또한 자신과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에 도재한 사장은 입을 떡 벌리고 말았다.
“그……. 여긴 블라드 유진 님의 집 아닙니까?”
“맞습니다.”
“조 변호사님은 그분의 고문이시고요.”
“네, 고용된 관계죠.”
“그런데 어째서 이런 꼴을 당하신 겁니까? 게다가 대체 그분들은 누구시죠?”
“여기 있다 보면, 항상 이상한 상황과 마주하게 되죠. 처음에는 당황스럽지만, 금방 적응되실 겁니다. 물론 이곳에 들르실 일은 그리 많지 않겠지만요.”
“…….”
도재한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상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조낙범 변호사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침대에서 일어나 옷매무새를 정돈했다.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바깥의 동태를 살폈다.
“아, 아직 있는 겁니까?”
“아뇨. 이제 뿅망치 전쟁은 질린 모양입니다. 사냥감이 다 기절해 버렸거든요.”
“설마 저희가 사냥감이라는 말씀은 아니시겠지요?”
“아, 실언했군요. 정확하게는 두더지 머리라고 해 두죠.”
“두, 두더…….”
“얼른 갑시다. 그분들이 또 올지도 모릅니다.”
꿀꺽!
조낙범의 말에 도재한 사장은 마른침을 삼키며 작은 인기척이라도 들릴까 귀를 기울였다.
두 사람은 마치 첩보 작전을 방불케 하는 은밀한 발걸음으로 복도를 지나, 세 여인을 만났던 옆방에 접근했다.
똑똑!
“들어와.”
조심스럽게 노크하자, 안에서 반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게 아닌가.
조낙범과 도재한은 혹시 누가 볼까 싶어서 황급히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러자 길쭉한 식탁 끄트머리에 앉아서 자그마한 알갱이들을 살펴보는 유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도재한 사장, 도착했습니다.”
“늦었군.”
“절차를 착각하여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 거기도 손을 좀 봐야겠네. 쓸데없이 찾아오는 놈들이 너무 많으니, 적당히 걸러서 내쫓으라고 해.”
“예, 알겠습니다.”
조 변호사에게 지시를 내린 그는 그제야 도재한 사장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마치 흑요석을 박아 넣은 것처럼 요사스러운 빛을 발하는 눈동자와 잡티 하나 없는 피부.
거기에 조각 같은 얼굴형이 더해지자, 형언할 수 없는 신비함이 묻어 나왔다.
기절하기 전에 보았던 두 미녀와 귀여운 소녀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듯한 느낌이었다.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힌 도재한은 인사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자는 한동안 블라드 유진의 얼굴만 홀린 듯이 쳐다보고 있었다.
“뭐 문제 있나?”
“아닙니다! 바, 반갑습니다. 유진종합건설의 사장 도재한이라고 합니다.”
그가 심드렁한 눈빛으로 말을 걸자, 도재한 사장은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리며 공손하게 인사했다.
하지만 유진은 자기소개를 생략한 뒤,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그러자 조낙범이 잽싸게 다가와 그의 앞에 유진종합건설이 보낸 제안서를 펼쳐 놓았다.
“계약 조건으로 중심가 토지 7.5%를 내걸었더군. 맞나?”
“예, 그렇습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건 최소로 잡은 양입니다. 일정 부분까지는 조정해 드릴 수 있습니다.”
“당연히 그래야겠지. 다른 업체들도 10% 이상씩은 불렀는데.”
“그, 그렇죠.”
자신의 것을 가져가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대답에 도재한은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치열한 협상 끝에 어느 정도 조정할 생각은 이곳에 올 때부터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토록 간단하게 내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초월적인 아름다움과 전신을 짓누르는 듯한 위엄에, 반사적으로 그런 대답이 나와 버린 것이다.
블라드 유진의 앞에 서니, 마치 고양이 앞의 쥐가 된 기분이었다.
“평균값을 내니 11%더군. 전부 중심가로 해서 말이야.”
“그렇습니까?”
“그 정도면 알맞은 거래가 될 거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나?”
“어…….”
머릿속으로는 조건을 좀 더 완화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차마 입 밖으로 그 말이 나오지 않았다.
사실상 유진종합건설의 입장에서는 11%의 중심가를 내어 줘도 엄청난 이득이었다.
개발 우선권을 따낸다는 것 자체가 무지막지한 경제 부흥 효과를 창출하게 될 테니까.
땅이 없어서 못 했던 온갖 개발들을 마음껏 진행할 수 있으리라.
그것도 별다른 규제 없이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서 말이다.
도재한 사장은 다부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겠습니다.”
긍정적인 답변이 나오자, 유진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손가락을 까딱했다.
그러자 조낙범 변호사가 두 부의 계약서를 내밀며 말했다.
“그 외의 계약 조건은 마음대로 짜도 좋습니다. 공략 일시나 범위, 인원 등은 알아서 하십시오.”
“저, 정말입니까?”
살짝 불리한 토지 분배 조건에 시무룩했던 도재한은 눈을 번쩍 뜨며 그를 바라보았다.
방금의 말은 조낙범이 했지만, 결정권자는 블라드 유진임을 명확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빠릿빠릿한 반응에 그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래.”
“여, 열심히 하겠습니다!”
“나머지 것들이 결정 나면, 바로 연락해. 웬만하면 최대한 빨리 진행하고 싶군.”
“예! 감사합니다.”
잽싸게 일어난 도재한 사장은 테이블에 박을 것처럼 머리를 푹 숙였다.
그러고는 재빨리 계약서에 서명하고 조 변호사에게 넘겨주었다.
이로써 유진과 유진종합건설 사이의 미궁 정화 사업 계약이 체결되었다.
도재한은 두근거리는 표정으로 계약서를 품에 안은 채 저택을 나섰다.
* * *
유진종합건설의 업무 추진은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다.
계약하기 전부터 미리 미궁 정화 사업 계획을 세워 두었기 때문이었다.
도재한이 1차 목표로 노리는 곳은 바로 임진강 너머의 파주 장단면 일대.
이 근방은 군사 접경 지역에 더불어 논밭이 있는 곳이었으나, 이제는 얼마든지 쓸 수 있는 땅이었다.
북한의 위협은 사라졌고, 요즘 평지란 평지는 온통 개발 붐이 일어나고 있었으니까.
“하하! 반갑습니다. 도형욱입니다.”
공략대장은 도재한의 친동생인 도형욱 부사장이었다.
블라드 유진이 지휘는 맡지 않겠다고 못 박아 두었기 때문이었다.
살짝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도형욱의 인사를 받은 그는 팀원들의 면면을 살펴보았다.
필드에서 활동하던 헌터들은 대부분 기업에 고용되기를 바랐다.
용병 헌터가 되면, 위험하게 오염 지대를 넘나드는 개고생을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었다.
유진종합건설처럼 작은 회사에 고용되는 것도 자리가 없어서 온갖 경쟁을 치러야 할 판이었다.
‘고용 헌터가 대략 20명 전후라고 들었는데, 못해도 그 네 배는 되어 보이는군.’
하지만 도형욱과 함께 온 헌터들은 총 83명이었다.
유진과 같은 단기 계약 방식으로 경계 지역에서 활동하는 헌터들을 왕창 끌어들인 것이다.
보통 100명 이하는 팀이라 칭하지만, 유진종합건설은 규모가 작음에도 공략대를 고수했다.
인원이 다소 부족하나, 그래도 성체 미궁을 공략하는 집단이라서 그런 모양이었다.
“저희의 1차 목표는 여기 장단면 능선이고, 최종적으로는 개성까지 밀고 올라갈 계획입니다.”
“그 이후로는?”
“본사와의 상의 후에 더 서쪽을 노려 볼까 합니다.”
북한은 북동쪽으로 갈수록 높은 산지가 많았다.
이익을 극대화하려면, 개발이 쉬운 평지를 공략하는 게 상식적인 판단이었다.
고개를 끄덕인 그는 도형욱을 따라 움직였다.
공략대는 바퀴가 큼지막한 오프로드 차량에 나눠 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북쪽은 제대로 된 길이 없기에, 혹시나 해서 만반의 준비를 해 온 것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전차를 빌려 오고 싶었습니다. 무한궤도가 있다면, 어디든 나다닐 수 있을 테니까요.”
“그런 것도 빌릴 수 있나?”
“물론이지요. 한데, 다른 업체에서 이미 다 빌려 갔답니다. 에너지 코어로 만든 파워팩을 장착한 전차라, 재고가 별로 없었다더군요.”
정부로부터 전차를 빌리지는 못했지만, 유진종합건설 측은 정말이지 최선을 다했다.
무려 60명의 단기 계약 헌터를 끌어들이고, 그 희귀하다던 힐러까지도 고용하는 기염을 보여 주었다.
게다가 오늘 동원된 차량만 20대가 넘었다.
이 정도면 미국과 러시아의 제2차 냉전 때처럼 전쟁이라도 하러 가는 듯한 모습이었다.
물론 현대전이 아니라, 초인들이 엄청난 속도로 움직이며 스킬을 쏟아 내는 헌터 전쟁 말이다.
“북쪽에는 경계 지역 시장이 없군.”
통일대교를 건너자마자 곧장 오염 지대였지만, 군인들이 지키고 있는 전선만 있을 뿐이었다.
헌터나 상인들은 도저히 찾아볼 수가 없었다.
블라드 유진의 중얼거림에 도형욱은 웃는 낯으로 설명해 주었다.
“아무래도 북쪽은 우리 영토가 아니라는 인식이 강하니까요. 지금까지는 정부에서도 굳이 임진강을 넘어갈 생각을 안 했습니다. 그럴 능력이 없었거든요.”
“드라코 도무스가 제거된 이후로는 할 만해졌다?”
“그렇습니다. 영토가 넓어지니, 다른 곳으로 시선이 돌아간 거죠.”
“하지만 그리 쉽지만은 않을 텐데.”
“예? 최근에는 민간에서도 성체 미궁 정화에 성공하고 있지 않습니까? 저번 주에는 리브라 길드에서 단독으로 공략을 완수했다던데요.”
“거긴 남쪽이지만, 여긴 북쪽이지.”
“아……. 대규모 미궁이 정화된 효과가 미약할 수 있다는 말씀이로군요.”
“이해가 빠르군.”
“그래도 뭐, 우리에겐 유진 님이 계시지 않습니까? 미궁 박멸자를 믿고 가는 거지요. 하하!”
도형욱 부사장과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공략대는 전선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정부에서 발행한 통행증을 보여 주자, 무장한 군인들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아마 이쪽으로는 헌터가 온 적이 없다 보니, 판단을 상부로 미루려는 모양이었다.
“통과하셔도 됩니다. 충성.”
“고생하십시오.”
잠시 후 명령이 내려왔는지, 군인들이 큼지막한 철제 게이트를 열어 주었다.
쿠구구구구!
전선을 통과하여 오염 지대로 향하는 지금, 도형욱의 얼굴은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드디어 유진종합건설이 도약할 첫걸음을 떼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한데, 도형욱 부사장의 기대가 경악으로 바뀌는 것은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서였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립니까? 혼자 가셨다니요?”
베이스캠프를 건설하고 본격적으로 몬스터와 싸울 준비를 하던 중이었다.
아직 해가 중천이니, 용병 헌터끼리 손발을 맞춰 보려던 참이었다.
하지만 잠깐 자리를 비웠다 돌아온 도형욱이 마주한 건 블라드 유진이 사라졌다는 보고였다.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혼자서 저 안으로 그냥 들어가셨어요.”
“오염 지대로 말입니까?”
“네.”
“얼마나 되었나요?”
“베이스캠프를 건설하기 시작할 때부터였으니까, 한 시간 정도 된 거 같은데요?”
한 용병 헌터의 대답에 도형욱 부사장은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짓고 말았다.
뉴스에 보도된 대로 블라드 유진은 특수한 능력으로 최종 보스만 암살하는 게 가능하다지 않았던가.
만약 지금 그렇게 해 버린다면, 미궁 내부와 오염 지대에 있던 몬스터들이 미쳐 날뛰게 될 터였다.
“진작 차근차근 공략하자고 말씀을 드렸어야 했는데……. 이러면 전선이 위험해질지도 모릅니다. 얼른 가 봅시다!”
도형욱은 재빨리 공략대를 이끌고 유진이 사라진 방향으로 차를 몰았다.
혹시라도 벌써 공략이 끝났다면, 이후에 있을 몬스터 웨이브에 대비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이내 눈앞에 벌어진 일을 쳐다보며 경악한 표정을 지어야만 했다.
쿠콰콰콰콰콰!
“아니, 저게 무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