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청담동에서 제일 큰 부지를 정원 삼아 영위하는 인물.
현대 헌터 역사에 가장 큰 획을 그은 자를 만나러 가는 길이라 그런지, 도재한 사장은 잔뜩 긴장한 표정이었다.
“휴우! 뭐가 이렇게 떨리냐?”
턱!
대략 5년쯤 굴린 구형 국산 세단을 직접 운전해 온 도재한은 차에서 내리며 문을 조심스럽게 닫았다.
왠지 주차장의 분위기를 보아하니, 시끄럽게 해서는 안 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도재한 사장이 차를 댄 곳은 정원 구석에 마련된 손님용 주차장이었다.
부지가 워낙 넓어서 쓸데없는 것까지 만들어 두나 싶었는데, 지금 보니 무조건 필요한 장소였다.
“바글바글하네.”
방송국 기자부터 각종 기업체 임원, 심지어는 유튜버까지.
온갖 종류의 사람들이 주차장을 거의 점거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언감생심 정문 쪽으로는 접근하지도 못하고, 벤치에 죽치고 앉아 대기하는 중이었다.
놀랍게도 꽤 많은 인원이 모여 있는데, 주변은 상당히 조용했다.
아무래도 집주인의 눈치가 보여 최대한 조심스럽게 행동하는 모습이었다.
그런 대기자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도재한은 어깨를 으쓱이고는 정문으로 걸어갔다.
초인종을 눌러서 자신이 도착했음을 알리려는 것이다.
그런데 문득 도재한 사장의 팔을 붙잡는 누군가가 있었다.
턱!
“저기요?”
“무슨 일이죠?”
“바로 정문부터 두드렸다간 경을 치게 될 겁니다. 아예 주차장에서 대기하는 것도 못 하게 될 수 있어요.”
“예?”
기자로 보이는 남자의 말에 도재한은 고개를 갸웃하고 말았다.
자신은 역경매에 통과하여 용병 헌터로 뛸 사람과 계약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었던가.
약속을 잡고 왔으니, 기다릴 필요가 없는 건 당연한 이치였다.
“저는 약속하고 온 건데요.”
“다들 그렇게 이야기하죠. 괜히 튀어 보이려고 헛짓하다가 나락 가지 말고, 이쪽으로 와서 번호표부터 뽑으세요.”
“예? 아, 네.”
기자가 팔을 잡아끌자, 도재한 사장은 얼떨결에 정문 옆의 작은 초소 건물 앞으로 걸어가게 되었다.
그곳에는 얼굴에 칼자국이 아로새겨진 험상궂은 남자가 꼿꼿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방문잡니까?”
“아, 예. 저는…….”
“이름하고 방문 목적, 전화번호까지만 적고 번호표 받아 가세요. 집주인께서 원하실 때 연락할 겁니다.”
“이미 번호는 아실 텐……. 아닙니다. 적고 가죠.”
남자의 서슬 퍼런 눈빛과 마주한 도재한은 입을 다물고 순순히 인적 사항을 적었다.
그러자 이윽고 78번이라 적힌 번호표를 받게 되었다.
“굳이 저 사람들처럼 안 기다려도 됩니다. 하지만 연락했을 때, 제시간에 오지 않으면 면담 시간이 줄어들 수 있으니 유념하십시오.”
“아, 알겠습니다.”
상대가 손을 휘젓자, 도재한 사장은 번호표를 들고 초소를 나섰다.
그러자 바깥에서 기웃거리던 기자가 잽싸게 따라붙었다.
“몇 명이에요?”
“78번입니다.”
“아뇨. 그 번호 말고, 대기 인수 말이에요.”
“39명이요.”
“아, 두 명 더 들어갔구나? 아까만 해도 41명이었거든요. 오늘은 그나마 좀 만나 주는 편이네요.”
“평소에는 어떻길래 고작 두 명 들어간 거로 그러는 겁니까?”
“아무도 안 만나 줄 때가 훨씬 많죠. 저만 해도 벌써 나흘째 기다리고 있는데요. 그러고도 아직 제 앞에 7명이나 남았네요.”
“허! 나흘이라…….”
상상을 초월하는 대기 인원과 시간에 도재한은 혀를 내두르고 말았다.
일단 역경매에 성공하기는 했는데, 앞으로 갈 길이 먼 듯한 느낌이었다.
“저는 쓰리온 뉴스의 강석형 기잡니다.”
“반갑습니다. 도재한입니다.”
“저기 쟤들도 저처럼 나흘째 기다리고 있어요. 호주에서 왔다던데, 어떻게든 영입해 가려고 혈안입니다. 아주.”
“아, 외국에서까지 찾아올 정도로 유명하신가 보네요.”
“그럼요. 대놓고 활동하시는 분이 아니라서 헌터계 외로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커리어 만큼은 누구도 범접할 수 없죠. 그쪽도 그래서 찾아오신 거 아닙니까?”
“예, 뭐. 그렇지요.”
강석형의 말에 도재한 사장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미궁 박멸자라는 거창한 별명과 세계적으로 드높은 명성이 있었지만, 블라드 유진을 잘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어떤 인터뷰나 검증 없이 그저 어떤 일을 ‘했더라’라는 말만 나돌았으니까.
다양한 전장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으나, 전투 장면을 직접 본 이는 얼마 되지도 않았다.
안테리오르 타워의 생존자는 고작 13명이었고, 천공의 성에서는 공략대와 거의 마주친 적도 없었다.
그러다 보니, 연예 활동을 꾸준히 해 온 다이애나 로즈보다 대중의 인지도는 부족했다.
물론 헌터계 내부에서 유진만큼 압도적으로 유명한 존재는 없었지만.
“담배 태우십니까?”
“네, 조금요.”
“저기 저 귀퉁이에 흡연실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괜히 아무 데서나 피우다가 미운털 박히지 말라고 알려 드리는 거예요.”
“감사합니다.”
“말 나온 김에 가서 한 대 태울까요?”
“그러시죠.”
도재한 사장은 강석형과 함께 흡연실로 이동했다.
이자에게서 뭔가 더 좋은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오! 이런 곳이 있었네요.”
모퉁이를 돌자, 통유리로 된 길쭉한 건물이 나타났다.
상단에 설치된 큼지막한 환풍 시설이 담배 연기를 하늘 높이 날려 버리는 구조인 모양이었다.
이렇게 생긴 흡연 부스를 처음 본 도재한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먹고 살기도 바쁜 이 시국에 도대체 누가 이런 쓸데없는 데 돈을 쓴단 말인가.
그런 도재한 사장의 표정을 본 강석형 기자는 피식 미소를 지으며 입을 털었다.
마치 자신이 설치한 시설인 양 호가호위하는 것이다.
“시설 하나는 죽여주죠? 소문을 듣자 하니, 방문자 대기실 건설도 고려 중이라고 합니다. 대체 돈이 얼마나 많은 건지…….”
“돈 많다고 다 되는 건 아니죠. 그만큼 배려심이 깊은 거 아니겠습니까?”
“하긴 제 회사도 돈이 없어서 직원 복지가 개판인 건 아닐 테죠.”
칙! 칙! 타다다닥!
각자 담배를 꺼내 문 두 사람은 흡연 부스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부분이 청담동 대저택의 주인에 관한 내용이었지만, 사실 실속이라고는 조금도 없었다.
강석형이 종편 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큰 3ON의 기자라고 해도 세간에 알려진 것보다 뭘 더 알고 있지는 않았다.
주요 정보라고 해 봤자, 어떤 인물들이 블라드 유진과 접촉하러 왔는지였다.
그 정도는 이곳에 며칠 처박혀 있으면, 다 알 수 있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도재한 사장은 강석형의 이야기를 꽤 흥미롭게 들었다.
자신과 계약할 사람이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 몸소 느낄 수 있었으니까.
똑똑!
그런데 누군가가 흡연 부스의 통유리를 가볍게 두드리는 것이 아닌가.
문득 고개를 돌려 보니, 말쑥하게 정장을 입은 중년 남성이 손짓을 하고 있었다.
도재한은 거의 다 태운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고 흡연 부스를 나섰다.
자신을 왜 부르는 건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여기서 뭐 하는 겁니까?”
“예?”
“약속 시간이 지났는데, 왜 이러고 있어요?”
“누구신지…….”
얼빠진 얼굴로 질문을 던지자, 상대는 뻘쭘하게 서 있던 강석형을 힐끔거리더니 먼저 발걸음을 돌렸다.
“따라오십시오.”
“아, 예.”
도재한 사장은 중년 남자를 따라가면서 강석형 기자를 향해서 가볍게 묵례했다.
흡연 부스에 혼자 남은 강석형은 황급히 휴대 전화를 꺼내더니, 멀어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찍었다.
“호오? 이거 뭐지? 여기 처박혀 있으면서 가장 큰 게 걸린 것 같은데?”
강석형 기자는 도재한과 중년 남자를 조심스럽게 따라가며 동영상 촬영을 이어 갔다.
그런데 문득 그런 강석형의 뒷덜미를 잡아채는 손길이 있었다.
턱!
“엑?”
“강석형 기자, 여기 촬영 금지라는 말 못 들었습니까?”
끼긱거리며 고개를 돌려 보니, 초소에 있던 칼자국의 거한이 눈에 들어왔다.
탁!
“지우겠습니다. 한 번만 더 걸리면, 그대로 추방입니다.”
“예…….”
휴대 전화를 빼앗아 방금 촬영한 내용을 깡그리 지운 남자는 지척에서 강석형과 눈을 맞췄다.
스산한 살기가 전신을 타고 흐르는 것만 같았다.
옷을 놓아준 남자는 어슬렁거리며 초소로 되돌아갔다.
“휴! 하마터면 쫓겨날 뻔했네. 뭐, 상관없지. 사진 없다고 기사 못 쓰나?”
차로 돌아간 강석형 기자는 노트북을 꺼내더니, 방금 본 장면을 부리나케 메모하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저택의 정문을 살폈다.
도재한이라는 사람이 나오면 진드기처럼 들러붙을 작정이었다.
“흐흐! 특종의 냄새가 난다.”
* * *
“블라드 유진 님의 고문 변호사 조낙범입니다.”
“반갑습니다.”
정원의 오솔길을 따라 걸어가는 동안, 흑발의 중년 남자는 자신의 정체를 밝혔다.
며칠 사이에 머리칼이 까맣게 된 걸 보니, 레니의 이야기를 듣고 바로 염색한 모양이었다.
왁스로 머리를 다듬어서 그런지 실제 나이보다는 훨씬 어려 보였다.
조낙범은 정문 뒤편을 힐끔 바라보더니, 도재한 사장을 향해서 주의 사항을 전달했다.
“주차장에서 대기하는 사람들은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특히 기자와는 접촉하지 않는 게 낫겠죠. 계약 내용이 알려져 봐야 좋을 게 없을 테니까요.”
“아, 네. 알겠습니다.”
“특히 강석형 그자는 멀리하십시오. 애초에 연예부 기자가 여기 와서 왜 저러고 있는지…….”
“예? 연예부였습니까?”
“가십거리 캐내려고 혈안이 된 자입니다. 그냥 무시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그렇군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길고 긴 오솔길이 끝나고 드디어 저택이 모습을 드러냈다.
엄청난 영향력을 지닌 헌터답게 블라드 유진의 집은 상상을 초월할 만큼 거대했다.
거주자도 몇 명 되지 않는데, 저렇게 큰 집이 필요한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들어가시지요.”
“네.”
부지가 워낙 넓었기에, 경호원이 수십은 있어야 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정문 옆의 초소에 있던 험상궂은 인상의 남자처럼 말이다.
하지만 저택 주변을 아무리 둘러봐도 사람 그림자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조낙범을 뒤따르던 도재한 사장은 문득 큼지막한 그림자가 옆에 드리움을 느끼고 걸음을 멈췄다.
“헉?”
고개를 돌리자, 어둠 속에 숨겨져 있던 시커먼 무언가가 불쑥 튀어나오는 게 아닌가.
깜짝 놀란 도재한이 허둥지둥 몸을 피하려 하는데, 물컹한 촉감이 오른쪽 머리를 핥았다.
츄릅!
“히익!”
“뭐 하십니까?”
“그, 그게 말이죠. 집 안에 웬 괴물……. 아니, 말이 있는데요?”
“아, 그 친구는 블라드 유진 님의 승용마입니다. 그러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떻게 신경을 안 씁니까? 절 막 핥는데요?”
“그냥 이쪽으로 지나오시면 됩니다. 처음 봤는데 크게 위험하지 않다 싶으면 핥기도 하거든요. 저처럼요.”
도재한 사장은 그제야 조낙범의 머리가 어째서 왁스로 세운 것처럼 되어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이 검붉은 유령 군마의 침에는 소처럼 알칼리 성분이 있어서, 저렇게 머리칼이 삐쭉 선 모양이었다.
도재한은 한쪽 머리칼이 하늘 높이 솟구친 상태로 복도를 지나 거실로 들어갔다.
깔끔하게 정리한 머리는 계약 당사자를 만나기 직전에 개판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뻗친 머리를 되돌릴 시간 따위는 없었다.
이제 그 유명한 미궁 박멸자 블라드 유진을 만날 차례였다.
“여깁니다. 들어가시지요.”
“예.”
조낙범을 따라 들어간 방은 간소하게 테이블과 소파만 놓여 있는 응접실이었다.
그런데 그곳에는 은발의 훤칠한 미남이 아닌, 웬 백인 여성 두 명이 흑발의 소녀와 함께 앉아 있었다.
“에?”
상황 판단이 되지 않았던 도재한 사장은 황당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조낙범이 바로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잘못 들어온 모양이군요.”
“아, 그렇습니까? 죄송합니다.”
도재한은 황급히 그녀들에게 인사를 한 뒤, 돌아 나오려 했다.
한데, 조낙범이 방문 앞에서 비키지 않고 고개를 천천히 가로젓는 게 아닌가.
“왜 그러십니까?”
“이미 늦었습니다.”
“예?”
“한 번 걸린 이상, 빠져나갈 수 없다는 말씀이지요. 그냥 체념하십시오.”
“아니, 그게 무슨…….”
이해할 수 없는 말에 의문을 표하는 순간, 뒤에서 쾌활한 목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둔중한 충격이 느껴졌다.
―뿅망치 전쟁 시작이닷!
뻐어어억!
도재한 사장은 영문도 모른 채 눈을 까뒤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