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긴급 속보입니다. 청와대에 나타났던 붉은 용이 이번에는 충남 논산에 출몰했습니다. 놀랍게도 오염 지대를 넘나들며 무수히 많은 몬스터를 잡아 왔는데요. 전투 중에 경계 지역 시장이 큰 피해를 보는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현장에 변형신 기자가 나가 있습니다.]
앵커의 말이 끝나자, 화면이 휙 바뀌며 마이크를 든 말상 기자가 나타났다.
변형신 기자는 폐허가 된 시장 어귀를 거닐며 상황을 설명하고 있었다.
그런데 문득 방송국 카메라에 상당히 익숙한 외모의 남녀가 아주 잠깐 잡혔다.
붉은 머리칼을 하고 있으니, 눈에 확 띄어서 유진은 둘을 곧바로 알아보았다.
“걸리지는 않았나 보군.”
아무래도 엔세데스는 현신하여 브레스를 뿜어 대다가 무심코 경계 지역 시장까지 날려 버렸을 터였다.
그만큼 드래곤 브레스의 위력은 엄청난 수준이었고, 범위도 무지하게 넓었으니까.
그나마 다행인 건 시장이 파한 야간에 일어난 일이라, 인명 피해는 없었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뉴스에서도 단순한 사고 정도로 마무리 짓는 듯한 느낌이었다.
‘사건을 축소하라는 윗선의 지시가 있었겠지.’
화룡왕과 한국 정부는 청와대 난동 사태에 관해서 원만하게 합의한 상태였다.
헌터 협회에서는 되레 협력하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있었다.
대중에게 엔세데스의 이미지가 나쁘게 인식되는 걸 원치 않을 것이다.
뉴스도 헤드라인만 자극적이었을 뿐, 이후의 내용은 상당히 온건한 편이었다.
한데, 문득 유진은 뉴스의 자료 화면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그 난리를 쳤는데, 전선 형태가 그대로군. 미궁의 파편이나 성체 미궁을 정화하지 않은 건가?”
레드 드래곤이 오염 지역에서 설치고 다녔다면, 전선이 좀 더 남쪽으로 파고 들어가야 정상이었다.
그는 흑룡으로부터 정기적으로 보고를 받았기에, 한국 전선의 형태를 꽤 잘 알고 있었다.
헬리콥터에서 찍은 경계 지역의 모양은 사흘 전과 완전히 일치했다.
‘일부러 미궁을 정화하지 않은 것인가.’
화룡왕의 막강한 무력을 상정하면, 블라드 유진으로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이내 소파에 몸을 묻으며 눈을 감을 뿐, 아무런 조치도 하지 않았다.
작은(?) 실수가 있긴 했으나, 그래도 엔세데스가 지구에 잘 적응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저 정도면 그리 큰 사고도 아니지.”
유진은 정웅철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며, TV 채널을 이리저리 돌렸다.
그러다가 드디어 미궁 개발 지원안에 관련된 보도가 나오자, 리모컨을 놓고 목 뒤에 깍지를 꼈다.
뉴스에서는 현성건설 부사장이 했던 말과 똑같은 내용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거짓말을 하지 않은 건 칭찬해 줄만 하군. 아니, 어차피 금방 들통날 사실이라 그런 건가.’
그는 피식 미소를 지은 채, 분노를 참으려 애쓰던 신헌영의 얼굴을 떠올렸다.
나름 괜찮은 듯하면서도 왠지 마음에 들지 않는 녀석이었다.
언젠가는 뒤통수를 칠 것만 같은 느낌.
불현듯 떠오른 그런 생각 때문에, 블라드 유진은 오히려 역경매를 추진해 보려 했던 것이었다.
“좀 더 나은 선택지가 있겠지.”
* * *
“대부님, 반갑습니다. 진 연합체의 고문 변호사 조낙범입니다.”
다음날, 블라드 유진을 찾아온 자는 조낙범이라는 남자였다.
나이는 40대 후반이었으나, 관리를 잘한 모양인지 군살 없는 몸매에 깔끔한 외모의 미중년이었다.
이제껏 일면식도 없었지만, 조낙범은 그를 보자마자 최대한 공손하게 인사를 올렸다.
아마 이미 유진이 조직에서 어떤 존재로 자리매김하고 있는지 잘 아는 모양이었다.
“연합체에도 변호사가 있었나?”
“별로 중한 직책은 아닙니다. 그저 정부와 협상하여 잡혀 들어간 조직원들을 빼내 주거나, 자질구레한 일 같은 걸 하고 있지요.”
“그렇군.”
조낙범은 스스로 별 볼 일 없는 사람이라 칭하며 낮추고 있었으나, 실제로는 진 연합체에 상당한 영향력을 끼치는 존재였다.
그저 흑룡이 뒤늦게 영입한 인사라, 여태껏 그와는 접점이 없었을 뿐.
‘하수인으로 만들어야 하나?’
혈성쇄혼술이 EX급으로 올라서면서 하수인 자리는 열 개나 남아 있었다.
흑룡이 신뢰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진 연합체의 중심인물이니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츠츠츠츠츠!
순간적으로 블라드 유진이 시뻘건 안광을 쏘아 내자, 조낙범의 눈빛이 멍청하게 변했다.
그러더니 눈꺼풀을 빠르게 깜빡이며 금방 원상태로 돌아왔다.
초면이라 살짝 데면데면하던 분위기는 어느새 완벽하게 사라져 버렸다.
조낙범은 한없이 신뢰가 가득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며 가방에서 서류를 꺼냈다.
“설명을 시작해도 되겠습니까? 대부님.”
“그래.”
“예, 우선은 이것부터 보시지요. 제가 최대한 간략하게 정리한 자료입니다.”
칼밥만 먹고 살던 비인가 헌터 놈들과는 달리, 조낙범은 확실히 유능한 인재였다.
그가 원하는 바를 정확히 파악하고, 고작 하루 만에 완벽하게 조사해서 가져왔다.
그것도 한눈에 알아보기 쉽도록 깔끔하게 정리해서 말이다.
유진은 흡족한 표정으로 요약본을 쭉 읽어 보았다.
그러는 동안, 조낙범은 설명을 이어 갔다.
“현재 용병 헌터들을 끌어모으는 중인 기업 위주로 조사해 보았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대기업과 비인가 헌터를 모집하는 곳은 제외한 결과입니다.”
“50개 업체라……. 의외로 꽤 많군.”
“원래는 이보다 두 배나 더 있었습니다. 각 업체에 연락을 돌려 역경매 의사를 타진해 보았는데,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 곳만 추린 겁니다.”
“혹시 생각해 둔 픽이 있나?”
그가 슬쩍 고개를 들며 질문하자, 조낙범은 송구스러운 표정으로 머뭇거렸다.
원래는 당당하게 발표할 생각이었으나, 하수인이 됨으로써 훨씬 조심스러운 태도가 되었다.
블라드 유진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서류를 가볍게 흔들었다.
“의견이 있다면 편하게 말해도 된다.”
“예, 사실 준비해 온 그대로 보시면 됩니다. 나름대로 건실한 기업체 순으로 정리를 해 보았습니다.”
“이 표의 순서가 자네가 생각한 순위인 모양이로군.”
“넵! 업체의 규모와 자금력, 대표 이사의 적극성 등을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잘했어. 마음에 드네.”
“감사합니다.”
1등부터 50등까지 쭉 내려보던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서류를 넘겨주었다.
“이대로 진행하면 되겠어.”
“그럼 이 리스트의 업체에 연락하여 역경매를 시작하겠습니다.”
“그래.”
자리에서 일어난 조낙범은 고개를 깊이 숙여 인사한 뒤, 테이블에 한 장의 서류를 남기고 저택을 떠났다.
혹시나 유진이 다시 한번 살펴볼까 싶어서 리스트를 남기고 간 것이다.
테이블 위에 놓인 종이를 힐끔 바라본 그는 작게 중얼거리며 커피를 새로 내렸다.
“저런 놈을 어디서 구했지? 흑룡의 수완도 나쁘지 않군.”
조낙범이 다시 블라드 유진을 찾아온 건 이틀이 지난 뒤였다.
보통 중차대한 의사 결정은 시일이 걸리기 마련인데, 상당히 빠른 속도였다.
벌써 50개 업체의 제안을 모조리 받아 온 것이다.
“새로이 순위를 매겨 보았습니다. 이번에는 토지 분배 비율을 순위에 넣었는데, 너무 터무니없는 수치는 아예 뺐습니다.”
“터무니없는 수치?”
“예, 왠지 공수표 같아 보이기에…….”
“얼마나 제시했는지 궁금하군.”
“총 다섯 곳의 업체입니다. 75% 이상을 약속하더군요.”
“허! 75%?”
아무리 미궁 박멸자라 불리는 블라드 유진을 영입하기 위해서라지만, 75%는 너무 심한 수치였다.
물론 남은 25%의 중심 지역을 모조리 업체에서 갖겠다는 이야기일 터.
사실상 그럴 거면 차라리 계약을 안 하느니만 못했다.
조낙범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계속 말을 이었다.
“그렇습니다. 그중에 두 곳은 아예 모든 토지를 다 주겠다고 하더군요. 그저 개발 우선권만 보장해 달라고 했습니다. 일단 질러 놓고, 협상장에 나와서는 딴소리하려는 게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남은 건 45개 업체인가.”
“사실 그 외의 조건은 고만고만합니다. 순위를 매겨 보니, 상위의 세 업체가 가장 좋아 보이더군요.”
리스트를 보아하니, 토지 분배 비율은 대부분 비슷했다.
하지만 한 가지 조건만큼은 그에게 접근했던 대기업들과 확실하게 달랐다.
명시해 둔 중심가 토지 비율을 최소 8% 이상 약속한 것이다.
이는 현성건설이나 성호 그룹에서 제시한 조건보다 훨씬 좋았다.
물론 작은 업체들인 만큼, 그 외의 지원 같은 건 거의 없다시피 했다.
그러나 유진에게 인간들의 지원 따위야 있으나 마나 한 것 아니겠는가.
그냥 조건이 좋은 곳 중에 아무거나 하나 골라잡으면 되는 일이었다.
찹! 찹!
한데, 문득 그와 조낙범이 앉아 있던 테이블 옆으로 맨살이 평평한 어딘가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시선을 돌려 보니, 귀가 뾰족한 흑발의 소녀가 파자마를 입고 서 있었다.
귀여운 캐릭터가 그려진 걸 보니, 이 잠옷도 루시아의 작품인 모양이었다.
―머리가 하얘.
레니는 조낙범의 하얗게 센 머리칼을 가리키며 천진난만하게 말했다.
“그간 좀 바빴습니다.”
―우리 주인 따라 하지 마.
“이건 그냥 염색하는 걸 깜빡 잊는 바람에…….”
―나이도 어린 게 말버릇이 왜 그래?
“허허…….”
잠이 덜 깬 모양인지, 레니는 조낙범을 향해서 알 수 없는 말을 막 내뱉었다.
그러더니 블라드 유진의 옆자리에 폴짝 올라가 앉았다.
그는 그런 레니에게 45개 업체의 리스트를 보여 주었다.
“읽을 수 있나?”
―웅. 쪼꼬미 동생들이 한글 가르쳐 줬어.
“하나 골라 봐. 마음에 드는 거로.”
―이거.
놀랍게도 레니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43위에 랭크된 업체를 고사리 같은 손으로 탁 짚었다.
유진은 조낙범을 돌아보며 태연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여기로 하지.”
“정말이십니까? 거긴 조건이 그리 좋지 않은데요.”
“그래 봐야 다 고만고만하잖아.”
“그건 그렇지만……. 알겠습니다. 곧바로 추진하죠.”
조낙범이 의문을 표했지만, 레니는 그의 어깨에 기대어 쿨쿨 잠이 들어 있었다.
토지 분배 논쟁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듯이.
* * *
한편, 조낙범의 통보를 받은 도재한 사장은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이게 왜 되냐?”
동생인 도형욱 부사장을 돌아보며 질문을 던졌지만, 이쪽도 알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게. 여기저기 알아보니까 우리보다 조건 좋은 데가 수두룩하다던데 말이야.”
“왜 하필 우리를 택했을까?”
“어쨌거나 됐으면 좋은 거 아닌가?”
“그건 그렇긴 한데…….”
“나는 용병 헌터들 모아 볼 테니까, 형은 그쪽부터 만나 봐.”
“알겠어.”
도재한은 사업가에 불과했지만, 도형욱 부사장은 용병 헌터로 꽤 이름을 날리는 자였다.
용병 헌터라고는 하나 전선 지원을 자주 해 왔기에, 업계에서 유명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형의 기업을 보호하면서 단물만 빨아먹어도 되지만, 그러지 않음으로써 헌터계의 인정을 받았다.
철컥! 텅!
서류 가방을 챙긴 도재한 사장이 사무실을 나서자, 허름한 컨테이너 건물이 살짝 흔들렸다.
마음이 급해서 문을 너무 세게 닫은 탓이었다.
그러는 바람에 책상 위에 위태롭게 놓여 있던 명패가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
텅!
컨테이너 사무실과 어울리지 않게 강화 유리로 만든 깔끔한 명패에는 ‘유진종합건설 사장 도재한’이라고 쓰여 있었다.